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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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만주 지린성 동남부지역으로 중국 현지에서 연길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개요

간도라는 지명은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 측이 이 지역을 이주 금지의 무인공간지대로 정하고 청국인이나 조선인 모두의 입주를 불허하는 공간 지대로 삼은 뒤,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을 새로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으며, 또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에 위치한 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적었다.

간도는 서간도와 동간도로 구분된다.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 지방인 백두산 일대를 가리키며, 동간도는 북간도라고도 하며 두만강 북부의 만주 땅을 말하는데, 보통 간도라고 하면 동간도를 말한다. 즉, 간도는 노야령 산맥과 흑산령 산맥 사이의 일대 분지와 혼동강과 목단령 산맥 사이의 분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간도의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폭설과 결빙이 계속된다. 주민은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임업이 성하며 연길시에서는 혼춘재·간도재로 불리는 목재를 생산한다.


역사

간도는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 지방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조선 왕국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는 그들이 생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었다.

간도는 두만강과 여러 지류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산지가 발달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해 각종 자원도 풍부한 지방이었다. 그러나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비옥한 지역이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고, 간도를 개척해 농경지로 만든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었다.

간도에 우리 나라 사람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말에서 고종 초부터였다.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농민들이 관권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너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1869년을 전후한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방에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 뒤 1910년을 전후해 일제 침략의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또는 항일 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구해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이 대폭 늘어났다. 1910년 9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간도로 이주한 우리 나라 사람은 2만 5,19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함에 따라 농토를 탈취 당한 농민들의 간도 이주가 계속되어, 농토는 전체의 52%를 소유했고, 화룡과 연길 지방에서는 평균 72%가 우리 나라 사람의 소유 농지였다 한다. 이와 같이 농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이유는 반제국·반봉건투쟁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간도 지역에서는 이들의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에 의해 항일 투쟁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련 단체

  • 간도국민회: 1914년 이동휘, 김약연, 김영학, 구춘선, 마진 등이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 간도대한민회: 1919년 구춘선, 방위룡, 최명록 등이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 광성학교: 1912년 이동휘가 간도에 세웠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 명동학교: 1908년 김약연이 만주 북간도에 세웠던 민족교육기관
  • 북간도국민회: 1910년대 간도로 이주한 동포 중 기독교에 귀의한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자치기관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