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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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요약

광화문은 1395년에 경복궁을 지으면서 같이 지어진 경복궁의 정문이다. 1425년 집현전의 학사들에 의해 광화문이라고 명명되었다. 여러차례 복원 및 철거가 이루어졌고 현재의 모습은 2006년 복원하여 2010년에 완성된 모습이다.

상세 내용

1395년 조선시대 태조 4년에 경복궁과 함께 지어진 건축물로서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이라 명명되고 오문(午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425년 세종 7년에 집현전 학사들이 모여서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라는 뜻의 광화문(光化門)이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소실 되었던 것을 고종이 왕이 되고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존엄성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을 재건할때 같이 재건함

일제강점기 당시에 조선 총독부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광화문을 해체하여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근처로 이전 시켰다.

한국전쟁당시 폭격을 맞음으로 인해 광화문의 목조부분이 전부 불에타서 사라지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1968년 광화문의 윗부분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겉모양만 복원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8년 복원 당시 원래 광화문의 위치에서 벗아나서 복원 되었다.

2006년 광화문을 고종이 중건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 하기로 결정하고 이후 2010년 8월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게 되었다.

역사

조선 시대

광화문은 1395년 태조가 경복궁을 지으면서 경복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위치에 지은 건축물이다. 초기에는 정도전에 의해 경복궁의 4개의 정문이라는 뜻의 사정문(四正門)이라고 명명되고 오문(午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우리가 현재 부르는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세종 집권시기인 1425년 집현전의 학사들이 모여서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라는 뜻의 광화문으로 정한 이후 아직까지 광화문이라고 불리고 있다.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한양을 점령하면서 조선의 법궁(法宮) 다시말해 임금이 지내는 궁인 경복궁을 방화하면서 같이 소실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270년간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았기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또한 재건 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흥선대원군이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게 되면서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한다는 이유로 경복궁을 재건하게 되는데 이때 광화문도 같이 재건된다.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이 조선 총독부를 짓기 위해 방해가 되는 광화문을 없앤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지식인들도 반발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은 일본의 한 잡지에 '사라져가려고 하는 어느 조선의 건축물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내게 되는데 이 글이 조선의 동아일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사람들의 반대가 더욱 게세지게 된다. 이후 일본은 어쩔수 없이 조선 총독부를 짓기 위해 광화문을 철거하는게 아닌 이전 시킨다는 계획을 다시 발표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경복궁의 남쪽에 있던 광화문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근처로 이전 되게 된다. 하지만 이후 1945년 해방된 다음에도 광화문은 다시 원래 자리가 아닌 경복궁 동쪽에 계속해서 위치하게 된다.

한국 전쟁

광화문은 한국전쟁당시 전쟁중에 떨어진 폭격에 의하여 목조부분이 전부 불타서 사라지게 되고 석재로 만든 축대만이 남게 된다.

복원

한국전쟁이후 광화문의 복원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이다. 이때 광화문의 석축 앞서 말한 석재로 만든 축대부분은 그대로 남겨두고 윗 부분을 철근과 콘크리트로 재건하게 되면서 광화문의 겉모습만 복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여론이 생기기도 하였다. 심지어 광화문의 본래 높이보다 좀 더 높게 짓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철근 콘크리트를 이용한 복원은 이루어지게 되고 광화문은 다시 경복궁의 남쪽에 자리하게 된다. 이때 광화문을 경복궁의 남쪽에 지으면서 본래 광화문의 위치가 아닌 좀 더 뒤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당시 복원을 하면서 현판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는데 한글 정용이라는 관심을 반영하여 한자가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한글 현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2006년 문화재청의 주도하에 광화문을 고종시기에 재건된 모습으로 다시 복원을 시작했다. 과거 박정희 시기처럼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석축위에 목조건물을 올리는 형식으로 복원을하고 광화문의 본래 위치에 맞게 복원을 하게 된다. 복원 사업이 끝나는데 걸린 공사 기간은 총 3년 8개월 로서 2010년 8월 15일 광복절날에 맞추어 일반인들에게 공개 되었다. 2010년 광화문이 복원 된 이후 광화문의 현판의 색상 오류등에 대하여 지적이 나오게 되지만 문화재청은 도쿄대의 1902년 유리건판 사진, 궁립중앙박물관의 1916년 유리건판 사진을 근거로 들어 현판이 하얀색 배경에 검은색 글자로 만든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된 1893년 이전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사진에 현판의 바탕색이 글자색보다 좀더 진한것을 근거로 검은색 배경에 흰색 글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이후 문화재청은 여러 실험을 통해 현판의 글씨가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자인 것을 확인 했다고 한다. 결국 2019년 상반기에 광화문의 현판을 지금의 하얀색 배경에 검은 글자가 아닌 검은색 배경에 금박 글자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특징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좌우의 문이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3가지 문의 천장에는 각각 영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중앙문의 천장에는 임금과 왕비를 상징하는 봉황 한쌍이 그려져 있고 오른 쪽에는 기린이 왼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참고로 광화문뿐만 아니라 천장에 영물들이 그려져 있는 문들은 몇개 더 있다. 또한 광화문 밖의 좌우에 나란히 해태상이 있는데 과거부터 해태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서 간주되어 궁궐등의 건축물을 지을때 장식한다. 그리고 현재 광화문앞의 광화문 광장은 광화문이 처음 지어질 당시 정도전이 의정부를 비롯한 육조들을 배치한 자리로서 육조거리라고 불리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하나씩 철거되가 시작하면서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에 와서는 광화문 앞 광화문 광장은 사람들이 집회를 하거나 월드컵 등의 국가적인 일이 있을때 관람을 하는 장으로 바뀜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모이는 곳이 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장소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관련 사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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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해 있다.

관련 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

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광화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5227&cid=40942&categoryId=33076

네이버 지식백과: 광화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34895&cid=43667&categoryId=43667

위키피디아: 광화문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D%99%94%EB%AC%B8

네이버 지식백과: 궐문 천장 그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87179&cid=58385&categoryId=58385

네이버 지식백과: 해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87179&cid=58385&categoryId=5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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