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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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의숙


개요

금병의숙은 소설가 김유정이 1931년 자신의 고향 실레마을에 세운 야학당이다.

상세소개

김유정이 무용수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의 실패와 연희전문학교에서의 제적, 재산을 탕진하고 있는 형과의 소송 등의 이유로 고향에 내려가 세운 야학당이 그 시초이다.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다음 해 봄 김유정은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자퇴하고, 매형의 주선으로 광업소에서 일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들을 계기로 김유정은 개과천선하여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그 후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김유정 문인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야깃거리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녹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총각과 맹꽁이』『소낙비』『노다지』『산골』『동백꽃』『만무방』『금 따는 콩밭』『안해』『가을』『[[두포전]』 등이 모두 금병의숙을 개설한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설립정보

1931년 강원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설립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금병의숙 김유정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금병의숙 실레마을 A는 B에 세워졌다.
금병의숙 김유정 문인비 A에는 B가 있다.
금병의숙 계몽운동 A에서는 B를 행했다.
금병의숙 금병산 A는 B에서 따왔다.

금병의숙rdf.JPG

참고문헌

김유정문학촌: http://www.kimyoujeong.org/Kimyoujeong/GeumByeong

작성자 및 기여자

  • 작성자:정근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