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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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틴

개요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발명된 사형기구. 참수형의 발전형으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루이제트(louisette)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언젠가부터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두대라는 것은 그 용도를 통해 의역하여 붙인 이름이고, 서양에서는 조제피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부른다.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고, 단두대를 보고 '그나마 인권이 보장되는 사형기구겠구나'라고 해서 이걸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때의 주장은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참수형을 할 때 뇌물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위력을 달리하는 관행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단두대는 그런 관행이 거의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에 평등하다면 평등하다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본래 대학교 해부학 교수였기 때문에 인체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몸을 고정시킨 다음, 낙하하는 칼날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목을 자르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과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며, 필요한 에너지는 칼날을 끌어올리기 위한 약간의 노동과 처형인을 틀에 고정시키는 정도의 수고뿐, 나머지는 간단한 물리법칙으로 끝난다. 작동은 순식간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고 하나, 이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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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이유

기요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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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는 역설적으로 사형수의 인권과 평등을 위해서 발명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범죄자의 인권과 처벌의 평등이 중요한 논쟁이 되었는데, 특히 그 중 논란이 된 것은 혁명 당시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아니면 참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이는 유럽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논쟁이었다. 크리스트교적 교리가 주를 이루는 서양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죽음(자살을 암시하기도 함), 즉 교수형은 평생 구원받음을 실패하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보는 유교 사상과는 반대되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참수형을 교수형보다 좋게 치는 풍조가 생겼다. 그리고 대대로 숙련된 망나니 집안의 사형집행인이 집도하는 참수형은 나무에 매달려서 온갖 모욕이란 모욕은 다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수형이나 거기에 못으로 박히기까지하는 십자가형보다 더 나은, 교리상 천국을 갈 수 있기는 하는 처형방법으로 보던 가톨릭의 인식이 한 몫했다고 한다. 이 중세를 거치며 그대로 이어져 "참수형은 귀함, 교수형은 천함"이라는 처형법의 전통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왜 범죄자를 끌어올리는 것이냐?', 혹은 '귀족을 인정하라는 거냐? 전원 교수에 처해 모두 평등하게 끌어내려야 한다!'는 반론도 있었다. 하지만 기요탱 박사 등이 범죄자에 대한 인도적이고 고통이 적은 처형을 주장했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형수에 대한 참수형이 결정되었는데, 이 참수형을 대체할 목적으로 발명된 게 바로 단두대다.

동양에서는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내 몸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함부로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상 때문에 참수형이나 거열형 같은 신체를 분리하는 신체훼손형벌이 교수형이나 사약 같은 정적인 사형보다 더 잔인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현대에도 교수형 등으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기요틴 도입을 두고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형 수요가 많다거나 참수가 어렵기 때문에 도입되었다고 알려진 경우도 많은데, 이 논리는 도입목적이 아니라 단두대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논리였다. 위 논쟁이 "전부 참수"로 결정난 후에도 기요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도입 당시 시민들은 기요틴으로 처형하면 기존의 일반적인 참수형보다 덜 고통스럽다는 점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 이유는 유럽을 비롯한 많은 전근대 국가에서 사형집행은 참수든 교수든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오락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형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특히나 참수형이 진행되면 사람들은 사형수의 피와 기름 등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참수형이 처형 방법이 된 것은 이 때문도 있었다. 그런데 참수형을 기요틴으로 바꾼다니까 불만이 심했던 것였다. 한 마디로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마치 현대에 연극이나 영화, 혹은 프로 스포츠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걸 설득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 당시 파리의 사형집행인들로, 이들은 소수의 사형집행인들로는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들을 설득했고, 실제로도 참수형은 물리적으로는 고도의 전문 기술+전문 도구+집행 시간이 필요하고, 집행인이 직접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점에서 사형집행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처형법이며, 당연히 집행비용과 실패할 확률이 높은 비효율적인 처형수단이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시민들도 납득하여 단두대의 도입이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단두대의 도입은 당시 시민들의 의식과 사형도구의 도입 명분의 합의가 이뤄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기요틴의 용도를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로 보이나, 그 당시에는 실제로 차륜형, 능지형, 기타 고문을 동반한 처형에서 단두대 참수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역시 매우 급진적인 진보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단두대가 사용되었는데, 특히 자코뱅 집권기에 적극 이용되어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다만 시대 변화에 따라 이것조차 너무 잔인하다는 비판 여론이 늘게 되자 단두대를 이용한 공개처형은 독일 출신의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에게 집행한 1939년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 단두대형은 이후 교도소 내의 처형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었는데, 이것도 1977년에 강도와 강간, 살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튀니지 출신 사형수 아미다 잔두비(Hamida Djandoubi)의 사형 집행을 끝으로 1981년에 프랑스에서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며 단두대도 해체되거나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인물들

뒤바리 부인

루이 16세

마르셀 프티오

마리 앙투아네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빌리 파울 헤롤트

샤를로트 코르데

생 쥐스트

앙리 데지레 랑드뤼

앙투안 라부아지에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 루이 16세의 여동생

올랭프 드 구즈

자크 피에르 브리소

자크 르네 에베르

조르주 당통

카미유 데물랭

푸키에 텡빌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프랑수아 조세프 웨스텔만

프리츠 하르만

피터 쿠르텐

하얀 장미 단원들

출처

단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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