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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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강릉이고, 호는 파인(巴人)이다.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삼룡(三龍)으로, 1926년 10월 동환(東煥)으로 개명하였다.

1908년 공립 경성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6년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4년 5월 『금성』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사(北鮮日日報社) 조선문판 기자로 복무했고,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어 1925년 5월까지 근무했다. 1925년 3월 첫 시집인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1925년 8월부터 KAPF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외일보』 사회부기자,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일보』 사회부 차창을 지냈다.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종합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간행했다.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조선가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삼천리』의 자매지로 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했다.

1946년 2월 조만식이 이끈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8월 여러 기행문을 엮은 『삼천리강산』을 편찬해 발간했다. 1948년 5월 삼천리사를 재차 창립하고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자수했고,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작품(저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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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저작물(소설, 수필,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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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경향

김동환의 문학활동은 1920년대 중반에 발표된 몇편의 시와 평론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 속에서 추출되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도와 시인으로서의 실제 활동을 검토해보면, 김동환 문학의 지주가 되어 있는 이념은 국가의식과 공동체적 자각을 근거로 하는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을 이야기할 때 주목되는 것이 장편 서사시의 제작이다. 그가 그 무렵에 <국경의 밤> 등의 서사시 양식을 취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금성》파의 한 사람인 유엽에 의해 <소녀의 죽음>과 같은 작품이 이미 선행되어 있었다는 점과 당시의 문단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시문학에 대한 자성과 새로운 시에의 시도, 그리고 이에 부합된 김동환 자신의 남다른 실험정신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고전문학, 특히 가사문학의 전통과의 접맥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국경의 밤>, <승천하는 청춘> 등 두 편의 장편 서사시에서 그는 역사적 사실의 반영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습과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 현실적 상황에 맞서서 투쟁하고자 하는 강한 저항의지를 보여준다. 또, 인간성의 회복과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연애’를 찬미하고, 민중의 동질성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래’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장편서사시는 ‘상실의 문화’라는 터전 위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문학양식이었으며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 전체에 관련된 서사적 내용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시의 영역을 확대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서사시 작품은 전체적인 조화와 일관성을 상실한 채 결과적으로는 상황의 제시라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의 시작 활동 중에 또 한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민요시의 창작이다. 그의 민요시는 율격, 구성, 시어 등의 형식적 요소와 그 정서가 강렬한 향토성을 지녔다는 내용적 측면에서 전래민요의 전통성에 이어져 있다. 그의 민요시의 정서는 여타의 다른 시인들보다 짙은 공감성을 띤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또한 작품 내에 강하게 드러나는 향토성은 그의 국토애와 민족애를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데 작용하고 있다.

김동환의 시 작품 전체를 통해 살펴본 그의 시세계의 특질은 양면성, 혹은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대립적인 요소들인 남성적 의지와 여성편향, 저항과 현실도피, 전통의 부정과 계승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들은 대립 혹은 상보적인 관계를 지니는가 하면 여성편향-현실도피-전통의 계승, 그리고 남성적 의지-저항-전통의 부정 등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시세계의 양면적 구조에서 구심점 내지 핵이 되는 것은 민족주의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견 견고하고 안정된 구조인 듯이 보이는 그의 시세계는 구조 자체가 지니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쉽게 와해될 수 있는 박약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현실과의 대결에 충분할 만큼의 도덕적 열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리움, 향수 등의 일반적 정서에 안주하게 되어 현실도피의 태도를 보여주며, 30년대 말 무렵부터 점차 고뇌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경직되어가는 현실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친일문학으로 빠지게 된다.


관련논문

정미나. (2013). 김동환 시의 정서 연구.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류정월. (2015). 여성적 다시쓰기 -김동환의 전설 개작 양상 연구-. 우리문학연구. Vol.0 No.48.
송기한. (2008). 김동환 시에서 '민족'의 의미 연구. 韓民族語文學. Vol.0 No.53.
김승구. (2009). 일제 강점 말기 지원병제와 김동환의 시국 대응. 현대문학의 연구. Vol.0 No.39.


연보

연도 내용
1901년 (1세)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아명은 삼룡.
1908년 (8세) 공립 경성보통학교 입학.
1916년 (16세) 중동중학교 입학.
1921년 (21세) 도요대학 문화학과 입학.
1923년 (23세) 관동대지진 발생 후 도요대학 중퇴 및 귀국.
1924년 (24세) '적성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 등단.
1925년 (25세)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KAPF 가담.
첫 시집 '국경의 밤' 간행.
두번째 시집 '승천하는 청춘' 간행.
1927년 (27세)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차장을 지냄.
1929년 (29세)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종합잡지 '삼천리' 간행.
1949년 (49세) 반민특위에 자수.
1950년 (50세) 한국전쟁 도중 납북 후 행적불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항목A와 항목B의 관계 비고
김동환 함경북도 경성 A는 B에서 태어났다
김동환 조선일보 A는 B의 사회부 차장이었다
김동환 신간회 A는 B의 중앙집행위원이었다
김동환 삼천리 A는 B를 창간했다
김동환 도요대학 A는 B에서 공부했다
김동환 재일조선노동총동맹 A는 B의 중앙집행위원이었다
김동환 동아일보 A는 B의 기자였다
김동환 시대일보 A는 B의 기자였다
김동환 중외일보 A는 B의 기자였다
김동환 KAPF A는 B에서 활동했다
김동환 국경의 밤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승천하는 청춘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삼인시가집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해당화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평화와 자유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조선명작선집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반도산하 A는 B를 발간했다
김동환 꽃피는 한반도 A는 B를 발간했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