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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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나, 1968년 6월 16일 사망하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었으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들이 없었던 백부(큰아버지) 김태흥은 김수영을 집안의 장손으로 여겼고 온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선린상업학교 재학 시절, 시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을 외워 읽을만큼 유창한 영어 실력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성장했기에 그가 쓴 시나 에세이 중에서는 완전 일본어로만 작성된 글도 간혹 보인다.

이후 일본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학도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가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심영 등과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46년부터 시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그 후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잠시 재학했으나 졸업하지 않았으며,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징집되었으나 탈출했다. 그러나 다시 남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 만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민간인억류자로 석방되었다. 이후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 창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김수영이 본격적으로 시대와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참여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된 것은 4.19 혁명 이후였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김수영은 여전히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않았으며, 시·시론·시평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성격의 글들을 발표했다.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문우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귀가하던 중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여 의식을 잃게 된다.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학력

  1. 조양 유치원
  2. 공립보통학교 (현재 효제초등학교)
  3. 선린상업학교 전수부
  4. (일본 도쿄) 도쿄상과대학 중퇴 (현재 히토츠바시 대학)
  5.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현재 연세대학교)

경력

  1. (일본 도쿄)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
  2. 연극계 조연출
  3. 길림극예술연구회
  4. 선린상업고등학교 영어교사
  5.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연보

  • 1921년- 11월 27일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 1924년- 조양 유치원 입학
  • 1928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입학
  • 1935년- 경기도립상고보에 응시하나 장티푸스, 뇌막염, 폐렴 등 악화된 건강상의 이유로 선린상업학교 전수부 입학
  • 1942년- 영어와 주산, 미술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이후 일본 도쿄로 유학,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들어갔던 조후쿠 고등예비학교를 그만두고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수업 수강.
  • 1943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겨울에 귀국하여 종로6가 고모집에서 머물다 당시 연극계를 주도하던 안영일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조연출을 맡음
  • 1944년- 봄, 가족들이 있는 만주 길림성으로 떠나고 길림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 무대 참여
  • 1945년- 8월 15일 광복. 9월 김수영 가족은 서울로 귀환
  • 1946년- 시「묘정의 노래」를 ≪예술부락≫에 발표, 이 작품의 발표를 계기로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그만두고 영어학원에서 강사, ECA통역 등 종사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9월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 동원. 유엔군과 인민군의 혼전을 틈타 야간 탈출을 감행, 서울 충무로의 집 근처까지 내려왔으나 경찰에 체포당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됨. 얼마 후 수용소 내 미 야전병원의 통역관으로 종사.
  • 1952년- 11월 28일, 충청남도 온양「국립구호병원」에서 석방
  • 1958년- 11월,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
  • 1959년- 첫 시집『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출간
  • 1968년- 4월 부산에서 열린 펜클럽 주최 문학세미나에서「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 6월 15일, 귀가하던 밤길에 교통사고로 다음날 6월 16일 아침 숨을 거둠

수상내역

  1. 1958-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2. 1999-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3. 2001- 금관문화훈장

작품

주요 특징

삶에 대한 반성과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며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시를 통해 당대의 상황을 표현하였다.

스스로 자신의 시어가 평범하다 했지만,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진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은 고정된 언어와 일체의 정립된 언어를 부정직하게 여겼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관습적이지 않고 그만의 의미가 담긴 새로운 언어를 사용했다. 김수영의 시에는 한자, 영어, 일본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문어와 구어가 구별 없이 사용되며, 관념어나 구체어가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한 한자, 영어, 일본어, 속어, 구어, 관념어 등은 어느 하나의 지배적 언어로 귀속되려는 언어에 대한 경계가 된다.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였으나 점차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4.19 혁명을 기점으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주로 자기 고백의 직설적인 어조로 소시민의 자기 각성, 지식인의 정직한 고뇌, 자유가 억압된 현실에 대한 항의를 다루며 ‘온몸’의 시학을 주창했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 세계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극복한 곳에 자리하고 싶어했다. 그렇기에 그의 시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넘어 열린 시각으로 읽어야 그의 시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 《묘정의 노래》
  • 《병풍》
  • 《그 방을 생각하며》
  • 《눈》
  • 《공자의 생활난》 (1945년)
  • 달나라의 장난》 (1953년)
  • 《거미》(1954년)
  • 폭포》 (1957년)
  • 《푸른 하늘을》 (1960년)
  • 《그 방을 생각하며》 (1960년)
  • 《거대한 뿌리》 (1964년)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 (1965년)
  • 《사랑의 변주곡》 (1967년)
  • 》 (1968년)

시집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합동시집, 1949년)
  • 《달나라의 장난》 (1958년)
  • 《거대한 뿌리》 (1974년)
  •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1976년)

산문집

번역서

  • 《카뮈의 사상과 문학》 (김붕구 공역, 1958년)
  • 《현대문학의 영역》 (이상옥 공역, 1962년)

평가

평론

  • 김수영의 시는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탐구적이고 가장 준열하고 우상 파괴적이며 가장 유연한 시적 양심이었다. 김수영은 탕진됨을 모르는 가능성이자 안타까운 미완성이었다. - 문학평론가 유종호
  • 그럴듯한 언사를 농함으로써 시 자체와의 만남을 회피하고 심지어 시를 죽이기까지 하는 작태는 오늘날 그 어느 때 못지않게 극성스럽다. 혹은 ‘민중시’ 혹은 ‘순수시’에 관한 논의들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름이 붙는 작품들 자체에도 그러한 혐의를 걸게 되는 일이 흔하다. 김수영의 살아있음을 올바로 증언하는 산 자의 책무가 막중해진다. 그것은 김수영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삶답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부인 것이다. - 문학평론가 백낙청
  • 김수영의 생애는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 시대에 있어서의 예술가의 의미를 밝혀준다. 그는 예술가의 양심을 넘어서 인간의 양심을, 예술가의 자유를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였다. 그의 자유로운 언어는 사실이나 감정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의 언어이고 자신의 모든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의식을 포착하려는 데서 나온다. 그는 시에 있어서 무엇보다 거짓을 미워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워했던 것은 감정이나 태도의 거짓 꾸밈이었다. 그에게는 일체의 정립된 언어, 고정된 언어는 부정직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으로서의 시의 언어의 이상은 완전히 정직한 언어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예술가적 양심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유로운 언어는 사실이나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정직한 언어이고 그러한 언어는 비판적 언어였다. 이 비판은 자기비판을 포함하여 언어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위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언어는 언어행위 한가운데에 스스로의 행위를 살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밀착되어 있으며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앞지르는 언어가 된다. 비판적 각성이 언어의 자기몰입과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문학평론가 김우창
  • 김수영은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다. 이 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 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시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이 넓어지면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 문학평론가 황현산
  • 김수영의 시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인간 상실로부터의 인간 회복이 시인의 임무’임을 말했을 때, 요컨대 그는 인간을 가난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노력 속에서 시작의 본질을 보았고,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죽음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중대한 결론이 사랑이며 이 사랑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 - 문학평론가 김종철
  • 김수영은 해방 후 한국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그에게 시는 일상에서 벗어난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양심의 산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사소한 개인의 일상에서부터 정치 현실까지 다양한 소재가 그의 시에서 새로운 표현을 얻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어였고 특유의 반복기법으로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어내었다. 난해하면서도 새롭고, 엉뚱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한 그의 시는 1960년대 이후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한국인이 처한 서러운 현실을 고스란히 껴안은 김수영의 시는 자유와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다. 그는 자유가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였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으로서의 자유였다.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으려는 양심과 세상을 바로 보려는 그의 정직은 비속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 비속어를 사용했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직설적인 문장을 사용했다. 그의 시 쓰기는 사랑의 작업이었고 자신의 시가 세계사의 전진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내가 움직일 때, 세계는 같이 움직인다. 이것이 김수영이 희망한 시의 영광이자 기쁨이었다. - 문학평론가 이영준

회고

  • 김수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 시인 김현승
  • 그러나 우리는 기려 기억할 것입니다. 한 시대를 바르고 진실하게, 순정하고 양심의 지시대로 살아보려던 김형의 예리한 지성, 성실한 행동력, 참다운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그 찬연한 업적을 우리들의 우정과 우리의 문학사는 길이 기억하고 전승할 것입니다. - 시인 박두진
  • 그가 어느 날 대폿집에서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신형, 사실 말이지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 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 그러나 그의 커다란, 사슴보다도 천 배, 만 배 순하디 순한 눈동자를 기계문명의 부속품들은 궁지로 몰아넣으려했다.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민족시인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민족의 알갱이들은 다 알고 있다. - 시인 신동엽
  • 이윽고 양주동 선생의 소개를 받고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시인이 걸어 나왔다. 검은 싱글에 후리후리한 키의 그는 약간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듯이 보이는 피부에 검고 깊던 두 눈, 시를 낭독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할 만큼 그가 내게 준 인상은 깊었다. 그가 바로 김수영이었던 것이다. - 시인 김철

학술연구

  • 김성조. "한국 현대시의 난해성과 도피적 상상력 - 50년대 시인 김수영ㆍ 김춘수ㆍ 김종삼의 시를 중심으로" VOL.- NO.- (2010)
  • 정현덕. "김수영 시의 풍자 연구" VOL.- NO.- (2002)

관련 콘텐츠

기사

사진

영상

  • 지식채널e - 그해 4월, 시인 김수영 1, 2


  • EBS 문화사 시리즈: 명동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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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명동, 문인들의 이야기, 시인 김수영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24부작 드라마이다.

연극

  • 김수영푸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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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서거 50주기를 기념하는 시극

RDF 및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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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수영 서울 (A)가 (B)에서 태어나다
김수영 묘정의 노래 (A)가 (B)를 발표하다
김수영 6.25 전쟁 (A)가 (B)를 겪다.
김수영 거제도 포로수용소 (A)가 (B)에 수용되다
김수영 국립구호병원 (A)가 (B)에서 석방되다
김수영 한국시인협회상 (A)가 (B)를 수상하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A)가 (B)를 발표하다
김수영 4.19 혁명 (A)가 (B)에 의해 각성하다
김수영 민주주의 (A)가 (B)를 추구하다
김수영 (A)가 (B)를 발표하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A)가 (B)를 발표하다

그외 4개 과제

6.25 전쟁

4.19 혁명

시여, 침을 뱉어라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부. (2011). 김수영의 문학과 생애. 문예운동, (), 20-29.

김수영 문학관

작성자

윤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