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역사-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주제 선정 이유

-현재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인 남양주의 역사적 인물 중 한명인 다산 정약용에 관해 소개하고 싶어, 다산 유적지를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 콘텐츠는 다산 유적지 및 다산 정약용에 대한 정보도 함께 제공해주고 있다. 그 이유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정보를 함께 제공함으로써 이 콘텐츠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이 좀 더 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의 일생과, 대표 업적, 그리고 대표 서적 및 영상을 제공해주고, 그 다음으로 다산 유적지에 관련된 정약용 생가, 정약용 묘, 다산 기념관, 다산 문화관 등에 대한 정보를 이미지와 설명 등으로 상세하게 제공해주고 있다.

정약용 선생 소개

다산 정약용.jpg

Ccl 유형.png - 본 이미지는 ccl유형 중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BY-NC-ND)으로 개방한 한국사진연구소의 한국사진사연구소-다산정약용-S1223.jpg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공유마당, 공유마당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 일생

출생

-다산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 (門巖逸人)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성장기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고문(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 하였으며 그가 7세 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여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다산은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이가환(李家煥)공이 문학으로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한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관직시절

-다산은 23세 때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 때 (1789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다.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연천 현감 김양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였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23세때 甲辰年(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斗尾峽)의 배 위에서 다산과 사돈 관계에 있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으로 부터 처음 천주교를 접하였다. 이후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 곧 손을 떼었다. 다산은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유배시절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제자들 또한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이청·황상·이강회·이기로·정수칠·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만년시절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김매순·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 업적

  • 수원성 설계
  • 거중기 창제
  •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 행정의 쇄신
  • 농민의 토지 균정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

대표 저서

정약용 선생 관련 영상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공공누리 4유형.jpg -본 저작물은 한국문화정보원에서 2015년에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 4유형으로 개방한 [한국문화 100]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문화포털 사이트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다산 유적지 소개

다산 유적지.jpg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는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 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흐름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다산문화관이 있 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 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유적지 관람시간 및 입장료

  • 유적지 관람시간: 매일 09:00 - 18:00 입장 가능 시간 9:00~17:30 (월요일 휴무)
  • 입장료: 무료

유적지 시설 현황

정약용 선생 묘

다산정약용묘.gif

-1972년 5월 4일 경기도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능내리에 정약용을 모신 유택인 여유당(與猶堂)과 함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묘는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한 원형의 묘로 남향하고 있고, 묘 앞에는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춘 비가 있다. 비신에는 2열로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 淑夫人豊山洪氏 之墓)’라고 씌어 있다. 비좌는 높이 31.5㎝, 너비 129㎝, 두께 90㎝이며, 비신은 높이 179㎝, 너비 69.5㎝, 두께 34.2㎝이고, 옥개석은 높이 62㎝, 너비 119㎝, 두께 81㎝이다. 묘역 앞에는 1959년에 세운 묘비 2기와 자연석에 여유당이라 쓴 비가 서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육각향로석이 있으며 봉분 왼쪽에 1974년에 세운 비가 있다. 계체석과 상석 오른쪽에 제단이 있고 그 앞에 또 하나의 비와 망주석이 서 있다. 상석 옆에는 높이 250㎝, 너비 10㎝의 비석과 상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이 서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정약용선생묘 [丁若鏞先生墓] (두산백과)

정약용 생가

다산 생가-여유당.gif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있다. 그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다산의 생가인 여 유당이 고졸한 자태로 은근히 나그네 유혹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곳은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의 다산묘소이다.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 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있는 다산선생은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 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한다.

다산 기념관

다산기념관.gif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 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던 거중기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다산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다산 문화관

다산문화관.gif

-다산 기념관 옆에 있는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의 인간적 고뇌와 삶의 철학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다산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5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래픽 패널로 전시하였고, 다산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다산의 삶'이라는 애니메이션 영상물이 자동으로 상영되고 있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공공누리 제3유형.jpg-본 저작물은 남양주시 문화관광에서 공공누리 제 3유형으로 개방한 다산문화체험-남양주 다산유적지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남양주시 문화관광에서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도

다산 유적지 위치

지도를 불러오는 중...

참고사이트 및 자료

  • 문화포털 [1]
  • 남양주시청-남양주 문화관광 [2]
  • 다산학술문화재단 [3]
  • 공공누리 [4]
  • 공유마당 [5]
  • 네이버 지식백과 [6]
  • 위키백과 [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작성자

김효진17

라이센스

Ccl 유형2.png -김효진17에 의해 제작된 남양주 역사-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