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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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감성적인 세계인식, 유기체적 세계관, 관념주의를 중심내용으로 삼는 근대적 문예사조

배경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나 유럽 전역을 풍기한 문학운동이다.

고전주의의 ‘이성적 폭력’ 앞에 질식된 인간의 감정적 욕구와 개성적이며 독창적인, 곧 자연상태로서의 인간의 ‘선성과 완전성’에서 낭만주의의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낭만적’이란 말은 고대 불어의 ‘로망(roman)’에서 파생되어 처음에는 ‘기이(奇異)’·‘가공(架空)’·‘경이(驚異)’·‘환상(幻想)’ 등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18세기 말을 전환점으로 하여 비로소 고전주의에 대립된 개념으로 ‘낭만주의(romanticism)’란 특정의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서 일어난 낭만주의는 유럽의 전역을 풍미한 문학운동으로 그 시대의 철학사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는 음악·미술·건축·정치·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한때를 풍미한 사조이기도 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의 전역에 펼쳐졌던 문학사조로서의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문학사조의 반동으로 일어난 협의의 개념으로 해석된다.

낭만주의는 세계를 인식케 하는 힘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성(感性)이고, 세계 그 자체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여 관념의 세계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 감각성보다는 관념성을 훨씬 강조한다.

한국의 낭만주의

병적 낭만주의

낭만주의의 한국적 특질로 엄밀한 의미에서 ‘낭만주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서구 문학사조의 동시적 유입과 그것도 각 사조의 핵심적 차원이 아닌 표피적인 일국면의 영향을 받고 형성되어,

감읍벽(感泣癖), 곧 비애와 감상(感傷)의 정조와 병적(病的) 관능(官能) 등의 속성을 띠게 되었다.

먼저 한국 낭만주의의 특질을 논의하기에 앞서 서구 낭만주의가 우리 나라에 이입되어 오며 1920년대 전반기에 집중화된 서구문학 사조의 혼류현상을 반영하였다.

한국 낭만주의 문학에 나타난 특질을 백철(白鐵)은 감상성의 과잉(過剩)과 환몽적(幻夢的) 요소, 우울(憂鬱)이나 비애(悲哀)의 정조를 들어 ‘병적(病的)인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한국 낭만주의의 다양성을 ‘감상적’·‘퇴폐적’·‘서정적’·‘정신주의적’·‘감각적’·‘관념적’·‘저항적’·‘탐미적’·‘민족적’ 등의 문학적 경향으로 유형화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한국적 양상은 다음의 두 시기로 구분되는데, 1921년 황석우(黃錫禹)가 주재하여 출간한 시지 『장미촌』을 기점으로 폐허동인의 활동을 전기로, 백조동인의 활동을 후기로 볼 수 있다. 
  • 두 동인지의 출간기간의 차이는 불과 2년이지만, 『장미촌』을 중심으로 전후기의 시적 특색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 전기의 폐허동인의 시적 경향이 무겁고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기조로 한데 반하여, 장미촌이나 백조동인의 시적 경향은 가볍고 밝은 정조와 감상성을 기조로 하고 있다.

전기 낭만주의

폐허동인을 중심으로 한 전기 낭만주의의 특색으로, 먼저 김안서·황석우 등이 『태서문예신보』에서 본격화되는

서구시의 번역 소개와 함께 한 시작활동이 습작품들이긴 하지만 근대 자유시 운동을 선도한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폐허동인들의 문하적 경향을 놓고 그 다양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일괄해서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세기말적 사상에 휩싸여 절망과 퇴폐, 죽음과 허무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테면 황석우의 「태양의 침몰」은 태양이 잠긴 암흑의 세계를 노래한 것으로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 시론을 근거로 자신의 시학을 확립한 전신자적 역할과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황폐화와 허무에다 새 생명을 티우려는 남궁벽(南宮壁)의 ‘대지의 생명과 비의(秘義)’와 자연친화의 사상,

그리고 강한 민족의식을 타오르는 정열로 승화한 변영로(卞榮魯)의 「논개」, 오상순(吳相淳)의 ‘방랑(放浪)’과 ‘허무혼의 절규’ 등은 모두가 낭만적 발상법이 되고 있다.

백조동인이 결성되기 직전에 간행된 『장미촌』은 그 동인의 구성으로 보아 폐허와 백조동인의 성격과 같이하고 있다.

후기 낭만주의

황석우와 변영로가 폐허동인이었고, 박종화·박영희(朴榮熙)·노자영(盧子泳) 등은 후에 백조동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동인의 구성으로 보아, 장미촌 동인의 시적 경향은 폐허동인과 백조동인의 중간적 특색, 곧 백조파 동인의 비애와 감상적 낭만과 밝은 정조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조』지를 주재했던 홍사용(洪思容)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일련의 초기시에 나타난 허무와 비탄(悲嘆), 동경(憧憬)과 감읍벽(感泣癖), 향토적 정서,

그리고 「나의 침실로」 등 이상화(李相和)의 일련의 초기시에서 보인 데카당스와 병적 관능은

보들레르나 베를레느와 같은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홍사용과 함께 한국 낭만주의 시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색(色)’·‘성(聲)’·‘향(香)’의 감각에 의한 오관(五官)의 작극을 시도한 박영희의 「미소(微笑)의 허화시(虛華市)」에 나타난 환몽(幻夢)과 낭만적 정조와

박종화의 「흑방비곡」 시편들에 나타난 비애와 감상성 등은 거의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관련 인물

한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오상순, 이상화, 박영희 등이 있다.

관련 작품

동인지

한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오상순, 이상화, 박영희 등이 일제 식민지 시기 영향으로 퇴폐성과 허무적 색체가 드러나는 퇴폐적 낭만주의 시를 발표하였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동인지에는 폐허장미촌, 백조가 있는데, 폐허에는 오상순의 '허무혼의 선언'등이 수록되었고,

백조에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와 '말세의 희탄',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가 수록되었다.

의의 및 평가

백조파를 중심으로 한 1920년대 초반의 우리 낭만주의 시인들이 프랑스 상징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프랑스 상징파의 시나 시론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주관과 감성을 기조로 한 환몽과 비애의 눈물과 감상성을 띠게 된 것은 한국 낭만주의 시의 한계성이다.

이와 같이 한국 낭만주의가 서구의 문예사조들이 일시에 유입되어 다양성을 띠게 된 요인으로는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을 지적된다.

서구의 경우와도 같이 여러 문학사조들이 순차적(順次的)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초의 극히 짧은 기간에 여러 사조들이 집중적으로 유입되어 혼류현상(混流現象)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대 우리 시인 및 작가들이 서구의 다양한 문학사조를 심도있게 받아들일 만큼의 문학적 소양이나 지적 수준이 못 미쳐 있었고, 사상적 기반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낭만주의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도입된 다른 문학사조들도 그 본질이나 깊이에 접근했다기보다는 표피적인데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RDF

항목A 항목B 관계
낭만주의 계몽주의 A가 B에 반발하다
낭만주의 고전주의 A가 B에 반발하다
낭만주의 감성 A는 B를 강조한다
일제강점기 낭만주의 A가 B에 영향을 끼치다
낭만주의 장미촌 A가 B에 영향을 끼치다
낭만주의 백조 A가 B에 영향을 끼치다
낭만주의 폐허 A가 B에 영향을 끼치다
오상순 낭만주의 A가 B에 영향을 받다
이상화 낭만주의 A가 B에 영향을 받다
박영희 낭만주의 A가 B에 영향을 받다

네트워크 그래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윤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