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사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동제사는 동주공제(同舟共济)에서 따온 이름으로 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별칭은 재상해한인공제회이다.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며 신규식이 창립하였다. 상점의 점원으로 등록된 인물은 신규식, 박은식, 문일평, 신석우, 윤보선, 조소앙, 정인보, 홍명희 등이 있었다. 외관 상 회사의 형태였으나 이익을 분배하지 않고 벌어들인 수익은 신한청년당에 쓰였다.

개설

1912년 7월 4일 신규식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1922년 9월 신규식의 순국과 임정의 내분으로 사람이 떠나면서 해산되었다. 신규식의 순국 후 박찬익이 이사장직을 맡았 기회를 도모하였으나 이후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 목적

신한청년당상하이 임시정부 등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에 금전적, 재정적인 후원과 독입운동 대표단체 건설을 목표로한 상회이자 무역 회사였다. 즉 일제에 대응하여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주요 활동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했던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의 구심점 역할 수행하였다. 회원은 300여 명에 달하였고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청년교육에 주력하면서,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명덕리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군사교육을 강조하여 조선인 학생을 중국의 군사학교에 보내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외에도 청년대상 교육, 한인사회 결속 등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본부는 상하이에 두고 베이징,톈진, 만주 등 중국지역과 구미, 일본에 지사를 두었고 유럽미국 등지에서도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망명한 청년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쏟았다. 1913년에는 중국어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설치한데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박달학원을 창립했다. 또 군인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인사들과 협의해 한국인 학생을 중국의 바오딩군관학교, 톈진군수학교, 난징해군학교광둥강무당 등에 파견, 교육받게 했다. 또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 협조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2년 말에 진기미, 송교인, 황개민, 여천민 등 중국혁명인사들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1915년 베이징의 독립지사들과 연대하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했으며, 1917년에 스톡홀름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가 열리자 조선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해 한국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대회가 실현되지 않아 효과를 얻지 못했다. 191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약소민족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켜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18년 11월에는 조직내의 소장파들로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1919년 1월 25일 프랑스 파리강화회의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동아시아 연합활동

신정은 동제사의 영향력을 넓히고 더욱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동제사의 협력단체 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를 조직하였다. 중국의 거물급 인사인 송교인, 호한민, 료중개, 추로, 대계도, 진과부 등이 신아동제사에 가입하게 됨으로써 그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독립청원서 제출

파리강화회의 참석한 한국 대표단 (출처:[1]

1919년 1월 25일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처음으로 제출된 ‘프랑스어’ 한국독립청원서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존되어 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파리로 건너간 김규식이 기존에 알려진 신한청년당독립청원서와 함께 '한국독립공화당' 명의의 청원서도 가져간 것이다.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미국대표단에 제출한 문서는 신규식이 총재,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표시된 한국독립공화당 청원서였다. 발신자는 가명을 썼으며 신규식은 '신정'(Shinjhung), 김규식은 '김성'(Kinshung)이다. 수신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다. 이 독립청원서는 김규식과 더불어 신규식과 동제사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직접적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청원서의 내용 전개도 여운형의 독립청원서와 구조가 다르다. 3·1 운동 발발 전후로 작성된 여러 종류의 독립청원서들은 대개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 일제의 부당한 합병,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서술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이번에 확인된 독립청원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의 일원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매우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된 이 청원서는 일본의 음모로 부당하게 식민지가 된 한국 사정을 청취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외국 열강은 일본이 한국에서 어떻게 통치하는지 알지 못한다.
  가혹한 검열로 모든 뉴스가 외부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외국 열강)은 일본의 자애로운 보호하에서 아마도 한국이 여전히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 열강들은 일본이 우리 정부를 몰락시킨 모든 조약들을 승인했기 때문에 불행한 한국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 없다.”

청원서에 대한 당시 미국 측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1919년 3월 말 대책회의 결과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으며, 현재 이 문제는 미국 대표단에 제출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측은 당시로서는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가 없으나 미래에 활용할 경우를 생각해 이 청원서를 보관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정병준 교수는 최근 연구논문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에서 김규식과 신규식 인맥이 매우 정교한 기획과 준비작업을 거쳐 시간 안배를 적절하게 하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게 확인된다고 기술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려진 것처럼 김규식이 단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출돼 수동적으로 파리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정 교수의 해석이다.

연원 및 변천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申圭植)은 손문(孫文)의 동맹회에 가입, 신해혁명에 참가해 중국 쪽 요인들과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청국 정부와 중국주재 일본영사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상해의 프랑스인 거주지로 도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한국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일본에서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았다. 신규식은 이들을 규합, 이듬 해 7월 이 단체를 조직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상해 거류 한인의 상조기관처럼 활동했으나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이었다.

이사장에 신규식, 총재에 박은식(朴殷植)이 선출되었다. 그 밖의 중견 간부는 김규식(金奎植)·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문일평(文一平)·박찬익(朴贊翊)·조성환(曺成煥)·신건식(申健植)·김용호(金容鎬)·신철(申澈)·민제호(閔濟鎬)·김갑(金甲)·정환범(鄭桓範)·김용준(金容俊)·민충식(閔忠植)·이찬영(李贊永)·김영무(金永武)·이광(李光)·신석우(申錫雨)·한진산(韓震山)·김승(金昇)·김덕(金德)·변영만(卞榮晩)·윤보선(尹潽善)·민병호(閔丙鎬) 등이었다.

회원은 300여 명에 달하였고, 구미 각지에 사무실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 뒤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보다 깊은 관계를 유지코자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 중국 국민당과 사회 저명인사 중 송교인(宋敎仁)·진기미(陳其美)·호한민(胡漢民)·당소의(唐紹儀)·진과부(陳果夫) 등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에 중국인의 지지를 받고자 노력하였다.

1913년 12월에는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7년 8월에 잠시 조선사회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당시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이칭: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사회주의세력이 주도하는 국제회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독립을 촉구할 목적으로 신규식 등이 발의해 ‘조선사회당’이란 명칭을 쓴 것이다. 1918년 말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동제사 소장파라 할 여운형, 선우혁, 서병호, 조동호 등이 참여하였다. 동제사신한청년당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갖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2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우리나라 독립지사들과 교포들이 조직한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9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정책방향과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리의 독립운동이 세계적인 안목을 갖게 하고 세계 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토록 했다.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로서,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조직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인재양성에 힘써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짧은 기간동안 존재한 조직이었지만 강인한 버팀목처럼 대한독립을 포기하지 않게끔 지탱해준 역할을 하였다.


관련 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동제사 그래프.PNG

"이 저작물상의 네트워크 그래프는 Vis.js 네트워크 라이브러리 (Copyright (C) 2010-2017 Almende B.V. )와 MakeGraph 온톨로지 스크립트 변환기 (Copyright (C) 2017-2018 디지털인문학연구소, AKS)로 제작하였습니다."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동제사 신규식 B가 A를 설립하였다.
동제사 홍명희 B가 A에 참여했다.
동제사 군사학교 A가 B로 활동했다.
동제사 박달학원 A가 B를 설립했다.
동제사 상하이 A에 B에 위치했다.
동제사 신한혁명당 A가 B를 결성했다.
동제사 신한청년당 A에 B가 결성했다.
동제사 신아동제사 A에 B가 결성했다.


참고문헌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조선독립운동 소사』(최남선, 동명사, 1946)

「동제사의 결성과 활동」(김희곤, 『한국사연구』 48, 1985)

"동제사(同濟社)", 두산 백과사전,두산, [사이트]

"동제사(同濟社)",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사이트]

"광복을 위해 활동했던'독립운동단체'들"네이버 블로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