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본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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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소개

개요

1970년 경기도 하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하던 중 2004년 다시 하남으로 돌아왔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밝고 쾌활한 사람이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바뀐다. 수학강사, 보육교사, 사회복지사로 일했으며, 지금은 고향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학력



딸이 본 엄마의 이야기

딸의 기억

엄마가 신나서 자랑하던 졸업장과 표창장.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고백하건대 나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일가를 이루지 않은 작은 삼촌도 함께 살았었다. 분명 집에 사는 사람은 많은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것을 계기로 결국 문헌정보학과에 오게 되었을 정도로. 아무튼,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일하느라고, 엄마는 보육교사 자격을 얻는다고 아주 바빴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나보다 공부가 좋은가보다 했다. 혼자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다가 울기도 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일자리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무사히 자격을 얻은 엄마는 명일여고 근처의 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집에서도 종종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리도 듣기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걸 질투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일하지 않게 된 지 오래임에도 엄마는 종종 즐거운 듯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고등학생이겠거니, 하면서.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에 엄마는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경영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직장을 잃은 엄마는 나를 맡겨두던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했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엄마는 그걸 위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을 또 공부했던 모양이다. 유치원이 문을 닫았다거나, 새로 공부를 해야 했다거나 하는 사정은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내심 엄마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리 오래 일할 수는 없었다. 재개발로 아동센터가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치는 시기였다. 그때의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 나는 모른다. 결국, 엄마는 새 직장을 구하는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마침 할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거들어 힘쓰는 일을 돕는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진하기에 앞서, 엄마가 한 일은 다시 공부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엄마가 졸업장을 자랑하던 날에야 알았지만, 그때 엄마는 경기 농업마이스터대학에 다니며 친황경 채소재배와 약용작물에 대한 걸 배웠다. 시험을 봐야 한다며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열심히 노력하던 엄마는 어엿한 한 사람의 농부가 되었다. 하우스 몇 개에서 철마다 오이, 상추, 가지를 돌아가며 키운다. 최근에는 청경채도 키웠다. 할아버지가 농사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후에는 나도 종종 일을 거들었지만, 지금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오신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겨울이면 상추에 이불을 덮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근력과 지구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로 가끔 부탁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싫었을까 하는 후회만 든다. 딸에게 힘든 일 시키기를 싫어하던 엄마가 굳이 부탁하는 일이면 참 급한 일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던 걸까.

외양간이 있었던 자리 앞에 이런저런 것들을 보관하는 비닐하우스가 생겼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잘 나온 것이 없다. 장독대 옆의 우거진 풀숲이 바로 외양간이 있던 자리다. 이제는 흙이 쌓이고 풀에 덮여서 거의 언덕처럼 보인다.

내가 없던 시기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 것은 할머니의 장롱에서 발견한 사진첩과 편지들 때문이었다.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군대에 있을 적에 보낸 편지들 가운데 딱 하나 엄마가 고등학생 때 쓴 편지가 있었다.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쓰게 시켰다던 편지 내용은 내가 고등학생 때 썼던 편지와 아주 흡사했다.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부러 장난스럽게 쓰는 편지. 나 때에는 써서 직접 부모님께 가져다드리도록 했기 때문에 한 번도 제대로 전해진 적이 없었는데, 엄마 때에는 학교에서 직접 댁으로 편지를 부친 모양이다. 옛날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엄마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나는 문득 고등학생인 엄마를 상상했다. 아주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머리로는 엄마에게도 당연히 어린 시절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실제로 그 시기의 흔적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뒤이어 찾은 보육원 졸업 사진 속의 조그마한 엄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할머니의 장롱 안에서 나온 사진첩에는 누렇게 낡은 사진이 잔뜩 있었다. 대학생 무렵의 엄마는 정말로 나와 똑같이 생겨서, 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소개도 전에 “어, 네가 혜원이 딸이구나!”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단하게 패인 주름이 한 줄도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볼 때마다, 궁금해졌다. 언제 찍은 사진일까? 왜 찍었을까? 웃고 있는 걸 보니 좋은 일이 있었을까. 고민이나 걱정거리는 없었을까? (물어본 결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을 받았다.)

우리 집을 배경으로 둔 사진에서 지금은 허물어진 외양간을 보았을 때는 너무 신기했다. 내가 보았을 때는 늘 지붕이 폭삭 내려앉고 덤불이 무성한 폐가였는데, 이때는 이 안에서 정말 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로 외양간이 있었다고 신기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소 똥냄새가 지독해서 싫어했지만, 갓 짠 우유는 맛있었다고 얘기해주었다.




엄마의 이야기

엄마와는 늘 가까운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지만,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관해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과제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대화는 몹시 즐거웠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묻자, 엄마는 유치원 때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종례시간에 오줌을 쌌다는 것이다. 나는 이건 잊을 수 없을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선생님이 말을 너무 많이 하셔서 그랬다며 뒤늦은 변명을 했다. 화장실이 너무 급했는데도, 손을 들고 “화장실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못 했다는 것이다. 부끄러워서.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끊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엄마가 부끄럼을 탔다니! 내가 아는 엄마는 늘 긍정적이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내 놀라는 반응이 재밌었는지 엄마는 자신이 얼마나 수줍음 많은 아이였는지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었다. 예를 들면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동물의 외형을 묘사하면서 어떤 동물인지 맞춰보세요,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틀리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손을 들고 자기 생각을 발표하는데 엄마는 혼자서 속으로만 정답을 맞혔다는 것이다. 그때의 엄마에게 손을 번쩍 들고서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내가 아는 엄마는 친구가 많고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활발한 사람이었다. 자기 생각을 망설임 없이 표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의 어린 시절이 수줍음 많고 소심한 소녀라니.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엄마는 대학교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했다. 성급한 내가 왜 바뀌었냐고 묻자, 엄마는 그럴 때는 왜 내가 자신감이 없는 아이였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엄마가 자신감 없는 아이였던 첫 번째 이유는 심한 아토피였다. 지금도 엄마는 팔다리의 관절이며, 입가나 코밑까지 자잘한 흉터와 딱지가 가득하다. 지금은 딱지가 되었지만, 막 아토피로 고생하던 어린 시절에는 상처에서 피고름이 마구 흘렀다고 한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아토피가 참 생소할 때였다. 의사들조차 아토피 환자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서, 자주 씻게 해라,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비누를 써라, 아니 쓰지 마라. 의사마다 말이 달랐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고민 끝에 엄마를 씻기되 비누칠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엄마는 후줄근한 옷에 팔다리에 피딱지가 앉은 꾀죄죄한 아이였다. 당연히 자신감이 생길 리가 없었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자신감은 없었지!” 엄마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했다. 물론 그 말은 바로 다음에 뒤집어 졌는데, 엄마가 자신의 자신감 부족의 원인으로 꼽은 두 번째가 바로 큰 삼촌의 대학 진학이었다. 큰삼촌은 한영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다가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것도 담임선생님이 서울대학교에 가라고 권했음에도, 본인의 로망을 따라 진학했다. 그리고 엄마는 세종대에 진학했다.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똥통 대학에 내는 등록금이 아깝다고 말했다. 당연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지도를 불러오는 중...


흔히 믹서(Mixer)라고 부르는 믹싱 콘솔(Mixing Console)

대학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의 엄마는 큰삼촌과 비교되는 것이 지긋지긋해서인지 대학새활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바뀐 것은 아직 1학년이던 때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엄마도 잘 모르지만, 울분이 쌓이다보면 사람이 폭발하기 마련이다. 엄마는 “될 대로 되라!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하고 싶은 걸 해보자고 생각해도 뭘 하면 좋을지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고민하던 엄마가 선택한 것이 교내의 방송국이었다. 엄마는 학교 방송국의 믹서(Mixing Console)가 그렇게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생각났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엄마는 곧장 방송국에 지원했다. 면접을 봤고, 무사히 통과했다. 엄마는 그렇게 원하던 대로 방송국에 들어가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즐겁게 배우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공에 대한 경험은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아주 좋은 치료제였다. 엄마는 점점 밝아졌다. 도전을 겁내기보다는 “못할 게 뭐 있어.” 라거나 “아이, 안 되면 말지!” 하고 뛰어드는, 그야말로 낙천주의자다운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그 변화는 좋은 변화였다고 생각한다며 밝게 웃었다. 나 또한 그 생각에 동의 한다.


이쯤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할 수 있다. 바로 엄마가 대학을 다녔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가 대학을 입학한 것은 1989년이었다. 6·10항쟁이 있었던 1987년에서 2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기다. 이 항쟁을 계기로 정권이 바뀌며 민주주의가 차츰차츰 시작되던 시대였던 것이다. 당시 세종대학교에서는 재단비리가 심각했다고 한다. 『재단 이사장 ○○○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재단 비리에 대해 시위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흔하게 들리던 때였다. 그리고 엄마가 입부한 방송국은 단순한 동아리가 아닌 학교의 공식적인 부속 기관이었다. 웃으며 이야기하기를 엄마가 입부한 방송국은 무려 좌파였다고 한다. 나는 문득 엄마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던 곡들을 떠올렸다. 무려 노동의 새벽이라는 이름을 가진 곡을 말이다. 사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웃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기는 학생운동 비스므리한 것을 했을 뿐이라고, 제대로 활동한 적은 없다고 했지만, 그에 관해서 자세히 말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없다.



최루탄.jpg

대신 엄마는 최루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과연 직접 체험해본 사람은 달랐다.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엄마는 최루탄을 맡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최루탄을 맡으면 눈물이 하염없이 나와서 눈을 뜰 수가 없고, 숨을 쉬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이때 좋은 방법으로는 치약을 코와 눈 밑에 바르는 것이 좋댔는데, 절대로 물로 씻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웃고 있지만 치를 떠는 듯 보이는 얼굴에 나는 문득 혹시 최루탄을 물로 씻어보았는지 물었다. 엄마는 단호한 얼굴로 그건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얼굴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최루탄과 관련된 일화가 또 있다. 명동사거리에서의 일이었다. 신세계 본점 앞을 지나는 엄마의 앞에 지랄탄이 떨어져 내렸다. 피유유웅, 하는 소리까지 엄마는 재현해주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모양이다. 바닥에 안착한 지랄탄은 마구 몸을 뒤틀면서 연기를 내뿜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것이 눈앞에 떨어지기 무섭게 돌아서서 달렸다. 막 뜀박질을 시작하려던 엄마의 앞에 아저씨가 한 사람 넘어졌다. 네모난 모양으로 각이 진 서류 가방을 들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회사원이었던 것 같다. 평소의 엄마였다면 그 사람을 일으켜서 함께 도망을 쳤을 텐데, 그날의 엄마는 넘어진 사람을 뛰어넘어서 달렸다고 한다. 위기가 닥치니 사람을 돕는 것 보다 도망치는 것이 먼저였다. 그 사람도 알아서 잘 갔겠지, 라고 말은 하지만 그날의 일을 꽤 후회하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은 하고 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써 말하지 않는 것을 들춰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엄마는 단지 학생운동 비슷한 것을 했을 뿐이고, 그 분야의 골수분자들은 따로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시위며 데모에 참여하는데 골수분자가 따로 있겠는가. 엄마는 대학 시절의 동기들, 특히 같은 방송국의 일원이었던 사람들과 지금까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일 년에 두 번 1박 2일로 가족 모임을 하는데, 초등학교 때는 나도 종종 그 모임을 따라갔었다. 이모, 삼촌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엄마는 별일 없었다고 했지만, 나는 어려운 일을 함께한 경험이 있기에 이렇듯 오래도록 교류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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