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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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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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755년 11월 2일에 태어나 1793년10월16일에 사망했다. 풀네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Marie 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오스트리아식(독일어)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폰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또는 성을 ‘폰합스부르크로트링겐(von Habsburg-Lothringen)’으로 쓰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하였으며. 1770년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1774년 왕비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관(館)에서 살았으며, 사교·관극(觀劇)·수렵·미술·음악 등의 모임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어 작은 요정(妖精)이라고 불렸다. 검소한 국왕 루이 16세와는 대조를 이루어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루이 16세와 그녀 사이에는 2남 2녀의 자녀가 있다.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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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녀들의 초상화

이 초상화는 당대의 유명 여성화가이자 '앙투와네트의 화가'라 불린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룅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기 2년 전에 그린 작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그려진 집단 초상화이나 당시 연속된 사건으로 인해 왕비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차 있다. 장남 루이 조제프가 가리키고 있는 요람은 차녀 소피아 알렌 베아트리스의 것으로, 여기에 누워 있던 소피아가 죽었기 때문에 검은 천이 둘러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엔 차녀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최종본에서는 지운 것이다.

  •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78년 ~ 1851년.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 때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 후에는 출산으로 인한 치질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7년만에 어렵게 가진 소중한 첫딸 마리 테레즈에게 모유 수유를 하려 했으나 친정어머니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실 및 귀족 사회에서도 남자 후계자를 바라는 바람에 2주만에 포기하고 유모에게 보내야 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출산을 하고 1년만에 임신을 하나, 임신 초기에 마차 문을 닫다 배에 문을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한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배려해 이 일을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 장남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1년 ~ 1789년. 왕위계승권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척추결핵으으로 사망했다.

  • 차남 루이 샤를

1785년 ~ 1795년.

  •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1786년 ~ 1787년. 11개월만에 숨져 영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어린 시절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또래 왕족들과 어울려 놀며 예법과 교양도 쌓는 평온 안락한 생활이었다. 18세기 유럽 공주들이 받은 교육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쓰기에서 곤란을 겪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쓰는 습관을 익혔다”는 증언이 있다. 아주 느리게 쓰고 종종 얼룩이 번지고 철자도 틀릴 정도였으며 읽기에서도 죄의식을 느낄 정도로 읽기를 겁냈다. 그녀가 받은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도 그녀에게 집중력을 키워주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는 대화 도중 다른 곳으로 건너뛰는 경향을 보였고, 한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하기 못하고 빠르게 관심이 바뀌며 산만할 때가 많았다. 13살 무렵까지 독일어 외에, 프랑스어, 이탈리어를 말할 줄 알았지만 프랑스어는 독일어 구문이 자주 튀어나오는 엉성한 수준이었다. 프랑스 왕실이 파견한 베르몽 주교가 1년간 가르친 끝에 결혼할 무렵부터 비교적 유창하게 구사했다. 성격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본성이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예쁜 용모에 착하고 상냥하며 예술을 애호하지만, 산만하고 쓰기와 읽기 능력이 부족한 편인 14살 소녀. 18세기 유럽 왕실에서 매우 평범한 한 소녀였다.


유명한 말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이 말은 그가 세상 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곤 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마리 테레즈가“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 말했다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히려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으로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는 짓을 거부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최후

1787년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공주의 죽음과 1789년 루이 조제프 왕자의 죽음 사이의 10여 년은 프랑스 혁명의 여건과 분위기가 무르익는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운명 측면에서는 비극을 향해 치닫는 시기였다.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 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 싼 악의적인 소문이 날로 증폭되어갔다. 루이 16세는 성품이 선량하고 즉위(1774년) 초반 국정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복잡하고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할 만한 리더십과 능력은 애당초 없었다. 불안과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1789년 5월 루이 16세는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신분제의회를 인정하지 않는 제3신분 대의원들은 6월에 국민의회 성립을 의결하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 그리고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 파리 시민들은 10월에 베르사유를 습격했고 왕실 가족은 튈르리 궁에 유폐되었다. 왕실 가족은 1791년 6월 20일 왕당파 세력이 강한 몽메디로 도주하려 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혀 실패했다. 이후 탕플에 유폐되었다가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됐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당신의 오빠(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1793년 10월 16일 새벽 4시30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에게 쓴 편지다. 이 편지를 쓴 마리 앙투아네트는 38세 생일을 약 2주 앞두고 처형 당한다. 그녀가 죽고 난 뒤 혁명 재판소는 많은 축하문을 받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심약한 남편을 휘두르며 고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프랑스를 배신하고, 사생활이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아들과 근친상간을 한 여자.'국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던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가 마침내 떨어졌다.' 그리고 1815년 1월 21일, 그녀와 루이 16세의 시신은 생 드니 성당 지하 납골소에 안치됐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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