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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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3.6~1564.2.18)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에 의하면,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고,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4세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풍을 배웠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 세 조상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89세를 일기로, 외롭고 괴로운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3]

건축을 위시하여 조각·회화·시, 그리고 공학(工學)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는데 특히 조각은 그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었다. 처음에 기를란다요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인정을 받아 그가 소장하고 있던 고대 미술을 접할 수 있었고 또한 도나텔로의 영향도 받아서 조각에 전념하게 되었다.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생애

미켈란젤로의 가문인 부오나로티가(家)는 1260년대부터 시작하여 피렌체의 시의원, 산타크로체 지방의 시장, 지방 의원 등을 다수 배출한 명문 집안이었다. 1474년 미켈란젤로의 부친인 루도비코는 카프레제(caprese)의 시장에 임명되었다. 1475년 3월 6일 아버지 루도키고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카프레제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임기가 끝난 1476년 피렌체에 돌아온 그는 피렌체 근교의 센티냐노에 사는 어느 대리석공의 아내인 유모에게 맡겨져 성장되었고, 그의 모친은 마차 사고로 인하여 6년 후에 사망하였다. 이때 미켈란젤로가 6세였다. (고국헌, 전게서, p.7)

그의 부친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 미켈란젤로를 무역 계통으로 성공 시켜 메티치가(家) 만큼 역사 깊은 부오나로티가(家)의 부(富)를 재생시키기 위해 10세 때 근대 교육기관인 프란체스코 울비노(Francesco do Urbino)의 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그는 학교 수업 보다는 산타마리아(Santa Maria)시(市) 브란카치(Brancacci) 성당의 마사치오(Masaccio : 1402 – 1429) 벽화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때문에 예술가란 직업을 천하게 여기고 있던 그의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있던 부친과 숙부의 꾸중과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향한 꿈은 완고한 고집의 부친도 막지 못 하였다.

13세가 되던 해 피렌체 후기 꾸아트로첸토(이탈리아 15세기 미술) 거장의 한 사람인 화가 도메니크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 1449 – 1494)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도제(徒弟) 수업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화가로서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 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그는 다른 생도들과는 달리 그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에는 소묘에 매우 큰 비중을 두었으며 고대 즉 희랍 로마의 미술과 아울러 피렌체 거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이전의 지오토(Giotto)와 마사치오(Masaccio) 그리고 특히 도나텔로(Donatello)를 존경하고 그들 예술의 핵심을 탐구하려 했다. (전종무, 전게서, p.5.)

기를란다요의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받던 중 미켈란젤로는 로렌조에게 발탁 된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예술가의 활동을 지원하는 많은 후원자들이 출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大) 금융업자인 메디치가(家)는 교황도 배출되는 당시 피렌체의 막강한 권력자로 대두 되면서 가장 강력한 예술가의 후원자로 군림 한다. 메디치가(家)에 기거 하면서 미켈란젤로는 당시 신(新)플라톤주의자들의 서클인 인본주의(人本主義) 철학자들과 접하게 되면서 도덕과 윤리의 근본 법칙 및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행위의 본질을 탐구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메디치가(家)에서 그는 예술가로서 갖춰야 할 모든 요소들을 습득하게 된다.

1492년 로렌조의 사망과 1493년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변(政變), 프랑스의 샤를르8세의 침입으로 1494년 메디치가(家)는 세력의 약화로 결국 피렌체에서 축출된다. (차하순, 『르네상스의 사회와 사상』, 서울:탐구당, 1984, p.31. 전종무, 상게서, p.6, 재인용)

메디치가(家)의 축출로 인하여 미켈란젤로는 그 도시를 떠나 처음에는 볼로냐 지방으로 도망했다가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로 갔다. 이로서 로렌조에 의해 맺어진 메디치가(家)와의 처음의 인연이 잠시 끊어지고 그의 예술가로의 피렌체에서의 훈련 기간은 끝이 난 셈이다.

그가 로마에서 1501년 다시 피렌체로 올 때까지 그에게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한 작품 <로마 피에타>를 제작 한다. 이 피에타는 15세기의 집요한 탐구와 투쟁 끝에 도달한 짧은 클라이막스인 소위 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를 알리는 최초의 조각으로서 이탈리아 조각의 불멸의 한 이정표가 되었다. 1501년 봄, 로마에서 피에타상(像)을 끝내고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예술가적 재능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피렌체의 반(反)메디치파의 공화정부로부터 전제 정치에 대항하는 자유의 상징으로서 기념비적인 <다비드>상의 제작을 의뢰 받은 것이다. 그의 주관적 견해로써 이 기념상은 1504년에 완성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고전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켈란젤로 특유의 자주적인 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1508년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2세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의뢰 받는다. 여러 가지 악조건 밑에서 절망적인 노력으로 4년 만에 완성한 이 천장화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천지창조, 인간타락, 노아의 이야기의 3장(場) 9화면(畵面)으로 구성하고 그 화면 중간에 예언자들의 인물상을 배치한 역사상 최대의 천장화이다. 1513년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묘소 제작에 대한 계약을 다시 하고 계획에 착수하나 원래의 내용은 바뀌고 단지 묘소를 위한 조각의 일부로 <모세>, <죽어가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만을 제작하는데 레오 10세는 이를 도중에 중단케 하고 피렌체 메디치가(家)의 성 로렌조 성당의 정면 건축을 의뢰 한다.

그러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그 계약은 취소된다. 이 당시 추기경 줄리아노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에 의하여 <메디치가(家)의 무덤> 제작을 의뢰 받는다. 그가 바로 다음해 1521년에 교황에 즉위한 클레멘트 7세이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9인 위원회 의원으로 활약 한다. 그러나 교황군의 반격으로 피렌체는 포위되고, 미켈란젤로는 공포로부터 피렌체를 탈출하여 베니스로 도망간다. 방위 책임자인 그의 배신행위는 후일 회상하기 어려운 모멸 속에 빠진다. 뒤늦게 돌아와 다시 가담 했으나 1530년 마침내 교황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는 대항하여 싸웠던 적의 수중에서 그 우두머리(교황 클레멘트 7세)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굴욕감과 자신의 배신행위를 자책하는 모멸감, 그리고 부친 루도비코의 사망에서 오는 비애로 그의 비극적 성격은 더욱 깊어져 간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이후 대부분의 작품에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 되는 양식으로 나타난다. 1535년 나이 60세에 그의 생애에 있어 단 한 사람의 여성인 43세의 빅토리아 콜로나를 만난다. 이 여성은 미켈란젤로를 침체의 늪에서 건져내어 그의 예술과 생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1534년 로마에 간 그는 새 교황 파울루스 (Paulus)3세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의 정면 대 벽화의 부탁을 받고 6년 후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 한다. 1547년 정신적 반려자인 빅토리아 콜로나의 죽음으로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부단히 발전 시켜온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으로 회의 한다. <성 바울의 개종>과 최후의 회화 작품인 <십자가에 처형되는 성 베드로>에서는 그 무렵 그가 겪는 염세주의적 불안감을 현저히 드러내고 있다.

1564년 2월 18일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사이에 남겨 놓은 작품 중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세 점의 피에타상(像)이 있다. <피렌체 피에타>, <팔레스트리나 피에타>, <론다니니 피에타>이다. (최민, 전게서, p.31, 상게서, p.8, 재인용)이 세 작품들은 모두 주문 때문이 아닌 스스로 원하여 제작한 것들로 이 피에타들은 모두 육체적인 제약을 벗어나 정신적으로 하나로 융합된 영원의 세계로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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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Dai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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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1501년과 1504년 사이에 조각한 대리석상으로, 높이는 5.17m이다.

미켈란젤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청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위엄있게 표현해냈다. 현재 피렌체의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에서 시청의 부탁으로 다비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갈고리형으로 굽은 오른편 손목은 츠크네를 모방하였고, 세부의 해부학적 표현과 고정된 눈에도 전 시대의 잔재를 엿볼 수 있다(석재가 높이에 비하여 얇은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의 면모는 표정이 넘쳐 있고 그 거대한 크기와 더불어 전형적인 남성의 나체상이 되어 있다. 체구를 상반되는 두 방향축에 중심을 두면서 두 어깨의 위치에 높고 낮음을 만들고, 목줄기 근육을 과장하여 조상(彫像)에 긴박감을 부연하였다. 이 작품이 풍기는 긴장감과 불안정성은 헬레니즘 조각의 다방향성(多方向性)을 한층 강조한 것이다. [4]

일견, 미켈란젤로의 전형적인 상(像)은 도나텔로의 서정적인 양치기 목동이나 베로키오의 신경질적인 젊은이에 비하여, 참다운 고전적 감정을 가진 작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상이야말로 현실에 성서의 영웅적인 행위를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의 목적은 소년의 우미함과 젊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청년의 무한한 에너지와 육체의 자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전형을 제작하는 데에 있었다. [5]

Pieta

피에타9.jpg [6] - Public domain

피에타.jpg [7] -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금지(BY-NC-ND)


피에타(Pietà, 1498-1499)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조각한 것으로 현재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보관되어 있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명작품이다. 그의 많은 피에타 상 중에서 최초의 것으로, 당시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의 의뢰로 만든 것이었다. 커다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이 조각상은 장 드 빌레르 추기경의 장례 미사 기념비로 제작되었지만, 18세기에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오른쪽에 있는 경당으로 위치가 옮겨졌다. 이 피에타상은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작품이기도 하다.

이 유명한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다. 원래 피에타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북방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조각상이 제작될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는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유행을 하였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표현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앳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나, 예수의 몸에 비해 마리아의 신체 비율이 매우 거대하게 표현된 점, 그리고 사망한 후 사후 강직이 일어났어야하는 예수의 몸이 부드럽게 늘어져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점 등 매우 독창적으로 제작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만든 거대한 조각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끝마친 작품이기도 하다. [8]


피에타는 완벽한 고전적 작품인데 해부학과 의복의 처리법을 터득하고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 앳된 여성의 무릎에 거의 수평으로 뉘어진 남성상을 표현한다고 하는 어려움을 피라미드형의 구성으로 훌륭하게 해결하였다. [9]

시스티나 성당

Sistine Chapel.jpg [10] - Public domain


Sistine Chapel지도.jpg [11]


시스티나 성당(라틴어: Aedicula Sixtina)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건축 양식이 타나크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전하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에서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12]


시스티나 성당과 미켈란젤로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에 위촉되었고, 40개의 조각을 만들어야하는 방대한 양의 작업이 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교황의 후원받긴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업들이 있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40년동안 묘 짓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묘는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위치하며 중앙에 놓인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에서,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2개의 조각은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 보관되고 있다.

같은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 (1508~1512).콘디비 설명에 의하면,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묘 공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다가 교황을 설득해서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도록 그에게 생소한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을 지탱해주는 삼각 궁륭에 열두 제자를 그리고 천장 중앙에 장식으로 처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를 설득해 재량권을 얻고, 천지창조/인류의 타락/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한 그리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가톨릭 성당의 대부분의 교리를 표현하는 그림의 일부이다.

작품은 500 평방미터의 천장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는 창세기에 나오는 9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지구창조; 하느님의 인간창조와 하느님 은혜 밖으로 추락한 인간,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여주는 인간의 상태.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12명의 인간이 그려져있다; 이스라엘 예언자 7명과 고전세계에 나오는 5명의 무녀. 천정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담의 창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예언자 예레미아, 그리고 쿠메의 시뷜라이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는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다. 교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천정벽화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선조로 시작하여 천지창조 이야기 등 구약 성서의 네 가지 사건이 그려져 있다. [13]

The Creation of Adam

Creation of Adam.jpg!Large.jpg Wikimedia Commons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벽화의 하나이다. 하느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창세기 속 성경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예배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히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14]

The Last Judgment

Last Judgement.jpg [15]

세련된 교양인이자 예술품 수집가였던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제대 위에 웅대한 《최후의 심판》을 그려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래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작업을 마친 지 24년이 지난 1536년에 미켈란젤로는 다시 시스티나 성당의 장식을 맡게 된다. 새 프레스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페루지노와 다른 화가들의 작품 세 점과 그 자신이 천장화를 마무리하면서 1512년에 그린 두 점의 루네트화를 없애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장엄한 장면과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을 골라 ‘심판’이라는 주제를 표현하였는데, 부분적으로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었다. 《최후의 심판》은 1541년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맨 왼쪽 루네트를 그리고, 이어 순서에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서 프레스코를 그렸다. 최후의 심판이 모습을 보인 지 4년 뒤엔 1545년에 바오로 3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구성을 도식화하면 이 작품은 나란히 놓인 세 개의 띠로 이루어졌으며, 꼭대기의 두 루네트에는 날개 없는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수난 당시 사용된 도구들을 들고 있다. 맨 아래 띠 왼쪽에는 종말 이후 죽은 이들의 부활이, 오른쪽에는 영원한 벌을 선고받는 이들의 영혼을 나르는 카론의 배와 이들을 심판하는 미노스가 있는 지옥이 그려졌다. 가운데 띠 중앙에는 심판의 나팔을 든 일곱 대천사들이 있고, 왼쪽에는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영혼들이, 오른쪽에는 지옥의 불로 떨어지는 영혼들이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맨 위쪽 띠에는 성모 마리아 옆에서 구원자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위엄있는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가 있다. [16]

다른 작품들

작품 이름 작품
Moses Moses.jpg [17]
Bacchus Bacchus.jpeg [18] - Public domain
The Battle of Cascina TheBattleofCascina.jpg [19]
Victory Victory.jpg [20] - Public domain
Lorenzo de Medici, Duke of Urbino DukeofUrbino.jpeg [21] - CC0 1.0 Universal (CC0 1.0) Public Domain Dedication
The Rebellious Slaves TheRebelliousSlaves.jpg [22] - Public domain
Madonna of the Stairs MadonnaoftheStairs.jpg [23]
Battle of the Centaurs BattleoftheCentaurs.jpeg [24] - CC0 1.0 Universal (CC0 1.0) Public Domain Dedication

명언

“If you knew how much went into it, you would not call it genius”
“The greatest danger for most of us is not that our aim is too high and we miss it, but that it is too low and we reach it.”
“If people knew how hard I worked to get my mastery, it wouldn’t seem so wonderful at all”
“There is no greater harm than that of time wasted”
“Trifles make perfection, and perfection is no trifle”

cosmos0921의 블로그 - CC-BY-NC-ND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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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논문

  • RISS 미켈란젤로 작품세계에 나타난 정신성에 관한 연구 : 신플라톤주의를 중심으로 = (The)research on the spiritual world showed in Michelangelo's work : focusing on the neo-Plato principle;
  • 저자: 이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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