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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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1910년대 중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걸쳐 일본의 문예계에서는 민중예술론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민중예술’을 둘러싸고 전개된 문학ㆍ예술론으로, 30~50명의 식자가 가담하고 90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된 근대 문학 논쟁사상 드물게 보는 대규모의 논의였다.
이 민중예술론은 와세다(早稻田)대학 출신의젊은 문예비평가 혼마 히사오(本間久雄)가 발표한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1916.8)에서 비롯되었다. 이글에 대해 『요미우리(讀賣)신문』지상에서 벌어진 야스나리 사다오(安成貞雄)와의 논쟁이 계기가 되어 민중예술을 둘러싼 논의가 문학자, 비평가들 사이에서 널리 전개되었던 것이다. 당시 민중예술론의 전개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기반이 된 ‘민중’의 정치 지평으로의 등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혼마가 제기한 민중에 대한 ‘교화운동의 기관’으로서의 민중예술의 주장은 당대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오스기 사카에(大杉榮)에 의해 구사회에 대한 신흥계급의 ‘전투기관’으로서 그 의의가 전환되었다.
이로써 민중예술에 계급성과 운동성이 부여된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 민중예술론은 이 시기에 등장하는 ‘노동문학’, ‘제4계급문학’에 영향을 주어프롤레타리아 문학에로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여러 논자의 민중예술론에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로맹 롤랑의 <민중예술론>이 그 이론적 근거로서 자주 인용되고 있었다. 이 책은 오스기에 의해 1917년 『민중예술론』으로 번역되었다. 오스기는 롤랑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사회운동으로서의 민중예술을 주장했던 것인데, 이와 같은 민중예술론은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민중예술론이 준 영향

부잔(豊山) 중학 4학년이었던 1923년에 겪은 간토대지진은 유치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욱 강하게 심어주었다. 부잔 중학 시절의 유치진은 통영의 문학동인 토성회 활동을 통하여 그러한 공포로부터 벗어나보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로망롤랑이 쓴「민중예술론」을 읽은 유치진은 비로소 인생의 지표를 찾으며 예술 가운데에서도 연극을 택하게 된다. 로맹 롤랑의「민중예술론」은 조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유치진의 막연한 생각에 구체적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인간 유치진과 예술가 유치진에게 획기적인 전향을 가져오게 된다. 그때부터 유치진은 일생 동안 연극을 하기로 결심한다. 연극으로 민족계몽 운동을 해 일본과 싸울 각오를 한 것이다. 이후 유치진은 대학 생활은 거의 포기한 채 극장만 찾아다니며 연극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연극이 사회와 인생을 가장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유치진은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하여, 1931년 7월 서항석(徐恒錫)·이헌구(李軒求)·이하윤(李河潤)·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김진섭(金晉燮)·함대훈(咸大勳)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했다.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유치진 민중예술론 영향을 받았다

참고 문헌

나무위키

구글

작성자 밎 기여자

작성자 이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