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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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1912.7.1~1996)

생애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오산학교를 다니며 독서에 빠지게 되었고 6년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29년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유학 중에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 출판사에서 근무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36년 시집 <사슴>을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사를 그만 두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함흥에서 기생 김영한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백석은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유족 확인을 거친 후, 사망연도가 1996년임이 밝혀졌다.

작품세계

백석은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당시 유행 경향이었던 모더니즘을 띄고 있으면서도 평북 지방의 방언을 사용해 향토적,토속적 색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은 초기 백석의 시에서 두드러지는데 고향의 풍물과 민속,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묘사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매우 객관적으로 절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집 〈사슴〉을 발표한 이후에는 묘사 이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담하게 직접 표현하는 방식으로 시가 변화하게 된다. 백석은 38년 이후의 시에서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시작 태도를 보이면서, 공간성보다도 시간성과 역사성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 땅의 역사에서도, 시인 개인으로서도 힘들었던 이 시기에 백석의 시는 원초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역사성과 깊은 인식을 보여준다.

백석은 앞서 말했듯이 고향의 자연과 풍속,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이 소재들은 그의 고향의 삶과 역사에 깊이 관련을 맺는 것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석의 시에서 '고향'은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고향은〈모닥불〉에서 보이듯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정겹게 하나 되는 곳으로, 〈여우난곬족〉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자연, 귀신과 사람까지도 화해롭게 공존하는 제의적이고 풍요로운 공동체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주인공은 고향과 공동체의 품에 안겨 있지만, 현실의 자신은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 속에서 따뜻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마음과 이와 상반되는 현실의 상황이 백석 시에 의미와 생명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백석은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움으로써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시인이다.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 다른 시인들은 대부분 방언을 어투에서 활용하였지만 백석은 사물을 지칭하는데 썼다. 생소한 방언을 열거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표현하였다. 또한 우리말의 구문이 품고 있는 의미 자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장면 묘사와 서술에 중점을 둔 이야기 구조의 서사지향적인 시를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주 짤막한 형태로 이루어진 시들은 대상의 미감을 가장 압축된 형태로 보여준다. 또한 다양한 시적 심상 사용하여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해냈다.

여담으로 월북 등의 이유로 군사독재정부 아래 백석의 시는 검열된다. 하지만 그의 시는 문학계에서 인정받아 왔기에 몰래 유통해 읽혔다. 그리고 그의 시 대부분은 매우 향토적인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닥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같이 시를 제외하면 읽기 힘들다.

작품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여우난 곬족
  • 통영
  • 고향
  • 북방에서
  • 적막강산


(시 낭송) 유투브 백석



김영한과의 관계

김영한(=자야)은 1935년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선생이 투옥되자 면회 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졌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안타깝게도 이 둘의 사랑엔 장애물이 엄청나게 많았다. 봉건적인 백석의 부모는 기생인 김영한의 신분으로 인해 백석과의 혼인을 거부하였고 그녀는 본인 때문에 백석에게 피해를 입힐까 염려하여 그의 도주 요청을 거절하였다.

김영한백석이 함께 한 시간은 겨우 3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영한은 그 이후의 삶을 평생 백석을 그리며 살았다. 그녀는 길상사에 머물며 매년 7월 1일 백석의 생일날이면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지냈다고 한다.



  • 김영한의 아명인 '자야'는 백석이 지어주었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왔으며 백석은 이백의 시 '자야오가'를 보고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 김영한 자서전 「내 사랑 백석」

내사랑백석.jpg

『사슴』의 시인 백석의 연인 김자야 여사가 50여 년 만에 털어놓은 백석의 삶과 사랑. 20대 시절 백석 시인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지금은 팔순이 넘은 자야 여사가 회고하는 시인 백석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시 문우들과의 관계 등이 고전적인 문투로 펼쳐진다.


「나는 내 삶의 은인이신 해관선생을 만나기 위해 타관 객지에 잠시 와서 머물고 있는 처지였고, 당신 역시 서울에서 그 바람 센 함흥땅으로 부임해와 있는 멋쟁이 시인총각이었다. 단 한 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당신은 첫 대면인 나에게 대뜸 자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곤 당신이 마신 술잔을 꼭 나에게만 건네는 것이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런 내색을 전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말없이 연거푸 기울이는 술잔에 용기를 얻은 당신은 덥석 나의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내 손목에는 이미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내사랑 백석(40,41쪽)


  • 류시화,「백석의 연인 김자야」

「시인과 자야가 처음 만난 때는 1936년. 금광을 하다 파산한 친척 때문에 기생이 된 자야는 함흥의 함흥관으로 간다. 함흥 영생 고보 교사이던 백석이 그 자리에 있었다. 둘은 '나도 저도 모르게 정신이 연결돼 사랑에 빠지고' 백석이 1939년 섣달 만주로 떠날 때까지 서울 청진동에서 산다. <중략> 백석은 1940년 「테스」를 번역해 서울로 왔으나 연인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 비참하게 산다. 해방 후 조만식 선생을 돕다가 김일성대 교수를 역임한다. 6·25 전쟁에서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하자 주민들의 추대로 정주 군수가 된다. 1960년대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게 드물다.」 -류시화,「백석의 연인 김자야」中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백석 김영한 A와 B는 옛 연인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통합논술 개념어사전

위키백과

yes24 내 사랑 백석

내 사랑 백석 리뷰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정윤서

기여자 : 양준, 우민혁,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