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 양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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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정의

일제강점기 「석사자상」, 「귀거래」, 「슬픈 모순」 등을 저술한 소설가.평론가, 번역가.

생애

1889년 경성 탑동에서 출생, 관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부터 10여 년간 중국 북경평민대학에서 유학했다. 불교진흥회의 전임서기와 불교진흥회 기관지인 『불교진흥회월보』와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의 기자를 역임하며 문화적 계몽운동인 거사불교운동을 펼쳤다. 늘 가난에 시달리고 가정적으로 불운했던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정신질환을 앓다가 1944년 2월 7일 사망하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궁하던 그 시절, 백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밥보다 책을 더 좋아했던 그는 책을 구하는 것에는 필사적이었다. 1930년대 매일신보 학예부장 조용만의 기억이다. “하루는 백화가 찾아와 저녁 지을 쌀이 없으니 원고료 2회만 변통해달라고 졸랐다. 돈을 받아 곧장 집으로 갈 줄 알았더니 의외로 백화는 진고개 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어쩐 일인가 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물어봤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진고개 책사에 좋은 중국책이 있었는데, 놓칠까봐 허둥지둥 가서 샀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백화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중국책 때문이었다. 그는 ‘인류를 구제하는 종교’란 글을 통해 불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15~16년 전 나는 불교를 한 미술로 보았다. 그 때 나는 내외 소설서류(특히 중국의 것)를 탐독하다가 불교를 알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경전을 공부할 작정을 하던 차에 마침 각황사에 불교강습소가 개설돼 입학했다. 당시 영변 석왕사에서 온 서월화스님에게 〈능엄경〉 강의를 듣고 비로소 불교가 세계에 다시없는 광대무변한 종교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불교에 귀의하지 않고, 다만 고급 미술품으로 감상했다. 그 후 〈유마경〉을 보고, 선과 교에 대해 공부하면서 불교를 교로 보지 않고 미술로 본 것이 무지한 범부의 망상이란 것을 알았다. 이에 나는 깊이 참회, 부처님께 귀의하고 불제자가 됐다.” 덧붙여 그는 불교가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배경에는 외국어학교 은사였던 간정 이능화의 영향도 있었다.

1910년대는 백화가 이능화와 함께 거사불교운동에 뛰어들었던 시기다. 불교진흥에 뜻을 품었던 그는 단편소설을 쓰면서 대중포교활동에 참여했다. 이런 백화의 활동은 불교계 상황과 흐름을 같이 한다. 친체제적 활동으로 일본의 신임을 얻은 해인사 주지 이회광조선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 원장에 임명됐다. 이회광은 승속이 연합해 불교를 진흥한다는 취지로 불교진흥회를 설립했다. 1915년 1월1일 본산 주지와 50여명의 거사가 중심이 돼 창립총회를 가졌다. 백화 또한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전임서기로 〈불교진흥회월보〉의 편집을 맡았다.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불교진흥회는 거사불교운동의 중심이 됐다. 백화를 비롯해 이능화.장지연.최동식 등은 매월 회보를 발행해 유학과 불교, 서양철학 등 학설을 소개하고 비교분석하는 등 불교의 근대화 작업에 앞장섰다. 백화 역시 이런 일들을 의욕적으로 진행했다. 그는 월보 매 호마다 불교관계의 학술논문을 번역.발표했다. 칸트철학을 소개, 〈능엄경〉 〈화엄경〉에 대비시켜 상호 유사성을 입증하는 ‘서철강덕격치학설’을 쓰고, 월창 김대현(?~1870)의 〈술몽쇄언〉을 한글로 번역해 세상에 내놓았다.

1915년 3월 창간해 12월까지 통권 9호를 끝으로 폐간한 이 잡지에 백화는 ‘국여’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도 발표했다. ‘석사자상’을 비롯해 ‘미의 몽’ ‘파경탄’ ‘귀거래’ 등이 이때 쓴 소설이다. 그의 처녀작인 ‘석사자상’은 그의 불교적 세계관이 담겨진 것으로 식민지 지식인이 가져야할 진정한 가치개념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 ‘미의 몽’은 불교적 교훈을 줘야 한다는 목적의식 때문에 작위적이란 평을 받았지만 두 작품 모두 보시.인과 등 불교사상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오늘날 현대적 감각으로 쓴 한국최초의 불교 소설로 평가받는다.

백화는 진흥회월보가 폐간되고 얼마 후인 1916년 4월 〈조선불교계〉가 창간돼 1917년 6월 통권 3호로 폐간될 때까지 여기에 꾸준히 글을 발표했다. 이 즈음 한용운 스님이 창간한 〈유심〉에 ‘悟’를 실었다. 중국 위앙종 2대 법손인 향엄 지한(香嚴智閑)스님을 소재로 한 이 소설에서 백화는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불교문학을 보여줬다. 명지대 김복순 교수는 ‘1910년대 단편소설 연구’에서 “백화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제시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불교가 어떤 철학이나 세계관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조선불교계〉 1호에 ‘한일월(閒日月)’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 ‘백화’라는 호를 사용하는데 이 시기는 그가 문단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때. 국여거사에서 소설가 백화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백화의 불교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에 대해 동국대 고재석 교수는 “3.1운동에 대한 불교계의 미온적 대응에 대한 실망감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했다. 3.1운동 당시 불교계는 백용성.한용운 스님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불교계에 대한 회의가 거사운동에 대한 무력감도 작용했을 것이란 것.

고 교수는 또 “1920년대 문화통치가 시작된 후 인쇄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교계 잡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고 백화의 활동범위도 달라졌을 것”으로 봤다. 1910년대 무단통치시절, 유일하게 남아있는 언론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종교관련 잡지였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의 한계를 절감한 일본은 유화정책을 편다. 이런 기류 속에서 각종 신문과 잡지 등 200여개의 간행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해 종교계 잡지는 설 자리를 잃었고, 백화는 창작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 후 그는 중국문학 연구로 관심을 돌린다. 당시 문단에서 중국문학은 비인기 분야. 외롭게 중국의 문학혁명운동을 소개하고 중국희곡을 번역한 백화는 대접은커녕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홍루몽〉 〈아Q정전〉 〈왕소군〉 등을 번역하는 등 중국문학 분야에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 가난과 싸우며 중국문학을 연구하던 백화는 1930년대 후반 정신질환을 앓다가 문학사에서 사라졌다.

중국문학의 속내까지 알고자 불교를 공부하다 불제자가 된 백화. 식민조선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불교를 선택했던 그는 소설을 매개로 중생들에게 ‘할’을 던졌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발표된 그의 소설들은 불교문학뿐만 아니라 1910년대 사실주의 문학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백화의 죽음과 함께 거사로서 그의 삶과 소설가로서의 삶 또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묻히고 말았다. 백화가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 그가 쌓은 불교문학과 중국문학의 탑이 회갑을 맞은 듯 한바퀴 휘 돌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을 쓰면서 백화는 아마 정신적 혁명을 꿈꿨을 것이다. 일제의 폭압에 괴로워하는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백화거사의 ‘깨달음’과 ‘자비’는 요즈음 같은 ‘폭주의 시대’에도 큰 파장으로 다가온다.

특징

양건식과친구들.jpg

▶1934년 9월1일 <삼천리>에 실린 사진. 앞줄 맨 왼쪽이 양백화다.


  • 10여편의 소설과 20여편의 평론, 30여 편의 번역을 남긴 작가
  • 주로 백화(白樺), 국여(菊如)의 필명으로 활동
  • 명목상의 양반 또는 평민층 출신
  • 흐느적거리며 걷는 소설가겸 번역사, 조선 유일의 중화극 연구자요 번역가’로 평가(이광수)
  • 희곡 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
  • 그의 생활방식은 1915년 생활자서전이 "귀거래"에서 볼 수 있음.
  • 횡보 염상섭, 빙허 현진건, 월탄 박종화, 수주 번영로, 안서 김억, 김동인, 방인근 등과 교분
  •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으며 항상 떠들고 술만 퍼마시는 패거리, 본인 주량은 약함, 횡보와 각별,
  • 6척, 긴 얼굴, 흰 피부, 노란 눈동자, 유순한 미소가 있고 좀 크게 웃을 때에는 쿡쿡 소리를 내어 목을 흔듦, 여름이면 흰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까만 구두를 신고 다니는 문사의 모습
  • 독실한 불교신자
  • 형식적 결함은 내용의 결함에서 발생한다(소설론)

작품

주로 백화(白樺), 국여(菊如)의 필명으로 활동한 양건식은 『불교진흥회월보』의 편집 책임을 맡으면서 여기에 불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 「석사자상(石獅子像)」(1915)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석사자상」은 비참함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과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작품이다. 그의 소설로는 소설가 자신이 작품을 써서 출간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색적인 작품인 「귀거래(歸去來)」(1915),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 「슬픈 모순」(1918) 등이 대표적이다. 평론 중에서는 문학의 미적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효용적 가치의 인정을 주장한 「춘원(春園)의 소설(小說)을 환영(歡迎)하노라」(1916)와 「지나(支那)의 소설(小說)과 희곡(戱曲)에 대하여」(1917)가 있다. 양건식은 소설과 평론 외에 중국의 시, 소설, 희곡 문학을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하였다. 이에 이광수는 그를 ‘조선 유일의 중화극 연구자요 번역가’로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희곡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홍루몽(紅樓夢)」, 「비파기(琵琶記)」 등 일제 강점기 한국에 소개된 중국 희곡 중 3분의 1 정도를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의 번역과 연구는 당시 일본문학과 서양문학 중심의 한국문단에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양건식은 1913년부터 1940년까지 총 200여 편에 달하는 소설과 평론, 중국문학의 번역과 연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이광수 염상섭 등 동료 문인들에게조차 ‘중국문학을 연구한 불교애호가’로 기억되던 백화는 죽음과 함께 한국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는 1910년대 소설가와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현대 중국문학 번역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초창기 ‘국여’라는 이름으로 남긴 ‘석사자상’ ‘슬픈 모순’ 등의 소설은 북한 문학사와 근대문학사에서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지대 김복순 교수는 “그의 작업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은 불교를 재해석함으로써 불교이념이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이며, 식민지 조선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임을 밝힌 것”이라며 “‘석사자상’이나 ‘슬픈 모순’은 이런 주장을 소설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석사자상’ ‘미(迷)의 몽(夢)’ ‘슬픈 모순’ ‘도야지 주둥이’ 등은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의 처녀작 ‘석사자상’은 주인공 김재창과 아내 영자, 그리고 거지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사건을 담고 있다. 자수성가한 김재창은 아내에게 타인에게는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말 것을 강조하던 중, 석사자상 밑 처참한 거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적선을 베푼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배반한 셈. 이 작품에 대해 한점돌은 ‘양백화 소설과 모순의 미학’에서 “백화는 생존경쟁을 신봉하는 주인공에 대해 불교사상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식민지 지식인의 사상과 행위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사자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슬픈 모순’은 백화의 대표작. 이 글에서 백화는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억압받는 하층민의 삶과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릉대 양문규 교수는 ‘슬픈 모순과 1910년대 비판적 사실주의의 문제’에서 “당대 도시 시정의 세태나 풍속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실한 묘사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 작품으로는 ‘슬픈 모순’을 따를만한 작품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의 몽’은 어느 날 자기 집에 들어온 도둑이 자신의 장인이 될 사람임을 알게 된 주인공이 그를 찾아가 따지자 뒤늦게 참회하고 자살한다는 내용. ‘양건식 문학연구’에서 동국대 고재석 교수는 “‘석사자상’에 비해 작품적 성취도는 높지 않지만 개인이 타락한 원인이 외부적 환경, 곧 식민현실에 있음을 강렬하게 암시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백화가 발표한 소설들은 한결같이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내세워 식민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불교라는 종교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백화는 중국현대극을 한국에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중국의 문학혁명운동을 소개하고 희곡을 번역하는데 매진한다. 중국문학을 알리는데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던 그는 고명의 〈비파기〉, 공상임의 〈도화선기〉 루쉰의 〈아Q정전〉, 곽말약의 〈목양매화〉 〈왕소군〉 등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개했다.

남윤수.박재연.김영복 등은 그의 글을 모두 엮어 〈양백화 문집〉(1995. 강원대출판부)을 발간했다. 전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1권에는 18편의 단편소설과 번역시, 번역소설이 담겨있다. 2권에는 그가 번역한 중국희곡을, 3권에는 산문, 평론이 수록돼 있다.

중국단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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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였다. 남들은 어떤 것을 탐독하든지 말할 것 없고 우리는, 특히 우리 조선 청년들은 읽으면 피가 끓어오르고 읽고 난 뒤에는 그 썩고 구린내 나는 생활 속에서 “에라!” 하고 뛰어나올 만한 원기를 돋워 주는 혁명적 문예를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나는 우리가 남달리 더럽고 기구한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한 역사를 등에 지고 있는 그 값으로 반드시 정치상으로 대정치가가 생기고 문학상으로 대문학자가 생길 것을 깊이 믿어 왔다. 한데 그동안 국내의 많은 독자와 작가들은 대체로 나의 이 생각과 이 기망(企望)에서 멀리 배치하여 가는 현상에 있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 문예 작품 중에서 이상에 말한 혁명적 소설을 심구(尋究)하여 그것을 소개하려 하였던 것이 곧 나의 초지(初志)이었다. 하나 여기에도 그렇게 훌륭한 걸작은 없었다. 하나 최후의 승전은 시시비비만을 말하고 공격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시대시적(時代是的), 인간시적(人間是的)의 위대한 작품을 산출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계급적 의식에서 신신앙(新信仰)을 가진 작가 그들에게 하루바삐 승전고를 울리기 촉망하며 동시에 나는 모파상의 말을 빌려 이렇게 청구한다. “당신들의 신신앙과 성정에 따라 가장 적의한 형식으로 거룩한 작품을 많이 낳아 놓으라!”고"  
-중국단편소설집 역자의 말-

번역작품

<번역 작품>
이름 주제 작품
번역시 중국당대의 신시 햇빛, 달님, 봄 맡은 여신의 노래, 봄은 왔다, 등산, 내 아들, 죽음의 유혹, 월, 표박의 무용가, 풀, 해와 자모
번역소설 지식인의 갈등, 여성해방, 애국정신, 민중, 소시민 홍루몽, 수호지, 목양애화(금강산애화),두발이야기, 양란의 모친, 범위내에서, 양봉회신, 이혼한 뒤, 선상, 소설의 결국, 내 아내의 남편, 초어스름에 온 손님, 구약삼장, 화지사, 피와 눈물
번역희곡 시와 소설과 유사한 주제 왕소군, 탁문군, 당체화, 양귀비, 반금년, 화가와 모델, 말괄량이, 형가, 도상의 공부자
소설 석사자상(1915년, 사회진화론의 극복 제시, 신지식층<김재창>의 성장배경,그들의 사회인식, 전지적 서술 형태, 서술자이 객관적입장에서 관찰, 결말부분이 반전, 근대 단편소설의 전형적 특성), 엷고 힘없고 간절한 동정(1916년, 1인칭 고백적 서술, 근대지식인의 내면의식,나), 미의 몽(1915년, 모순으로 가득찬 허위세계 고발, 봉건적 지식인<김일오>이 근대사회로의 변화 과정에서 겪는 의식의 변화양상을 형상화,신소설의 서술자의 목소리), 실지묘사 귀거래(자신의 소설 집필에서 출판, 홍보까지, 작가-편집장-활판직공-비평가, 삼면기자, 3인칭 서술), 파경탄, 한일월, 아의 종교, 슬픈 모순(1918년, 식민지 지식인의 방황과 실천, 1인칭 서술기법,"나", 산책시 만나는 이들, 백화란 인물 등장), 오!(사회가 거세된 종교적 구원), 빨래하는 처녀(1922년 중국 고대를 배경, 조국을 위해 실천적 삶을 사는 실천의 궁극적 모습), 도야지 주둥이, 출발, 청경시행, 여류음악가,여장소년
평론,논설 춘원의 소설을 환영하노라(1916년 신소설의 문제점을 비판, 이광수의 소설이 대안책, 소설은 인생에 관한 제현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사상의 아름다움과 서정 서사의 묘에 있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문체[사람의 특질,그의 사상,시대의 소리],본령[쾌락의 정, 미적 쾌감], 상상[소설의 미학적 측면]이다., 지나의 소설급희곡에 취하야, 홍루몽에 취하야, 인형의 가에 대하여, 파수만초(금운교전), 문단에 대한 요구, 홍명희군, 반신문학의 출판물이 휴행하는 중국문단의 기현상,소설로 관찰한 불교, 염상섭론
수필 유학십년, 역자 후기, 인류를 구제하는 종교(1929)


작품목록

  • 석사자상
  • 한일월
  • 오(悟)!
  • 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
  • 문단에 대한 요구
  • 빨래하는 처녀
  • 도야지 주둥이
  • 반신문학의 출판물이 유행하는 중국문단의 기현상
  • 꼭지의 딸
  • 소설로 관찰한 불교
  • 염상섭론
  • 나의 본 육당
  • 착오된 비평의 기자
  • 시조론
  • ‘수호전’ 이야기
  • ‘홍루몽’ 시비
  • 출발
  • 원곡개설
  • 강담과 문예가
  • 예술상으로 본 서상기와 그 작자
  • 소위 중등 조선어 작문에 대하여
  • 조선문학의 여명운동
  • 청량사행
  • 중국문학혁명의 선구자 정암 왕국축
  •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
  • 중국의 명작소설 ‘홍루몽’의 고증
  • 중국의 근대시승 소만수대사 일생
  • 문예만담
  • 인간 서해
  • 중국의 현대작가
  • 내가 붓을 잡기는
  • ‘구운몽’의 가치
  • 여장소년
  • 조선의 문학을 위하여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백화 양건식 석사자상 A는 B를 저술했다.
백화 양건식 귀거래 A는 B를 저술했다.
백화 양건식 슬픈 모순 A는 B를 저술했다.
백화 양건식 친일문학인 A는 B에 속한다.
백화 양건식 백화 A는 B이다.
백화 양건식 국여 A는 B이다.
백화 양건식 중국단편소설집 A는 B를 번역하였다.
백화 양건식 염상섭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현진건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박종화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번영로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김억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김동인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방인근 A는 B와 친하다.
백화 양건식 박태원 A는 B의 스승이다.

네트워크 그래프

양건식 네트워크 그래프 캡처.PNG

연구결과물

  • 「백화 양건식의 번역문학-‘중국신문학운동’ 번역을 중심으로」(왕철,성균관대학교대학원석사학위논문,2010)
  • 「양건식 문학연구」(박용식·고재석,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민족문화연구』,1991)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