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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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66년,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조선을 침공한 전쟁을 말한다. 병인년에 서양 또는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배경

프랑스 해군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은 병인박해의 생존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분노했고 프랑스 정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1866년 7월 8일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청나라 섭정이자 총리 아문의 수석 대신인 공친왕에게 조선을 정복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다음 조선의 미래와 장래의 왕위를 나폴레옹 3세의 의지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 통보했다. 하지만 이는 벨로네 공사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한편 청나라는 매우 놀라서 조선을 변호하며 프랑스를 진정시키려는 한편 조선에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전개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는 9월 25일 강류(江流)·연변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일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결국 로즈 제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의의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立約協商) 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이다.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천주교박해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관련사진

표1. 병인양요 관련 사진
사진 이름 출처
양헌수 승전비.jpg 양헌수 승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수산성.jpg 문수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로즈제독.jpg 로즈제독 위키백과

위치

지도를 불러오는 중...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 문수산성

지도를 불러오는 중...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 양헌수 승전비

관련영상


출처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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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