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왕가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부르봉 왕가

시기

1589년~1792년, 1815년~1848년

부르봉 왕가 계보도.png부르봉 왕가 군주 리스트.png 프랑스의 영토 확장.jpg

부르봉 왕조는 카페 왕조의 방계가문으로 1589년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이 루이 9세의 후손인 부르봉 가문 출신의 나바라 왕 앙리 3세(앙리 4세)에게 넘어가면서 시작되었다.

부르봉 왕조 초기

앙리 4세

앙리 4세.jpg

종교전쟁을 거친 후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종교문제로 왕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원래 개신도교의 수장이었으나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개신도교가 자신의 지역에서 신앙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왕국의 통합과 질서 회복을 위해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만드는 데 힘썼다.

루이 13세

루이 13세는 친 합스부르크적인 어머니와 청치적 개입들을 타파하면서 추기경 리슐리외와 함께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형성했다. 대내적으로 지방의 대귀족과 개신교도 공동체를 제압하고, 대외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며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반을 닦았다.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어릴 적 겪은 프롱드 난은 그가 지방 귀족들을 확실히 제압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야 함을 알게 했다. 루이 14세는 1661년에 본격적인 친정을 시작했다. 1680년대 초까지 콜베르의 활약으로 국가 재정이 넉넉해지자 수많은 전쟁을 벌여 승리를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과시하고자 했고,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여 지방 귀족들을 중앙집권적인 왕권에 들이고자 했다. 이 시기에 베르사유 궁은 유럽 내 모든 군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모범이었다. 그러나 1683년 콜베르가 사망한 후 루이 14세는 무리한 전쟁을 감행하여 재정 상황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1685년 낭트 칙령을 철폐하여 개선도교인 유능한 상공업 인재들을 프랑스에서 축출하였다. 이후 흉작과 기근으로 왕국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고, 이는 18세기 내내 프랑스 왕정의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부르봉 왕조 종말

루이 15세

루이 15세는 최기에 플뢰리와 같은 유능한 재상의 활약으로 재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퐁파두르 부인에게 의존했고, 이는 고등법원과 민중들의 반감과 불신을 초래했다.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크게 패배하여 아메리카와 인도의 식민지를 상실하여 재정은 더욱 악회되었다.

루이 16세

루이 16세는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근본적인 재정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힘들었다. 또한 7년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하려는 시도에서 미국 독립혁명을 도왔으나, 재정만 낭비한 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총신분회의를 소집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전하였다. 결단력이 없고 소심했던 루이 16세는 상황을 회피하고자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려다 국경 근처에서 체포되었고, 1792년 왕정 폐지와 1793년 사형 집행으로 이어졌다.

루이 18세

루이 18세는 비교적 온건하게 입헌 군주정의 틀에 맞춰 프랑스를 이끌었다.1815년 3월에서 6얼까지 나플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난 뒤 파리로 돌아와 왕위를 유지했다. 그는 왕국의 질서 유지와 안정에 힘썼고, 혁명의 정치적 유산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샤를 1세

즉위 전부터 극단적인 왕당파 세력을 규합하여 왕국 곳곳에서 백색 테러를 일삼았던 샤를 10세는 즉위하자, 본격적으로 절대적인 왕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고, 이는 전국적으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루이-필리프 1세

루이-필리프 1세.jpg

샤를 10세가 망명하자, 혁명세력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동조했던 부르봉 왕조 방계가문 출신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를 새로운 입헌군주정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루이-필리프는 초기에 입헌군주정의 틀에 맞게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의회와 국왕 참사회의 결정들을 존중하였다.국가 전체로 본다면 대부분의 인민들이 막대한 부를 소유한 소수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즉 혈통을 재산이 대체하고,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자들만이 거액의 세금을 내고 참정권과 선거권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일으킨 1848년 2월 혁명을 끝으로 루이-필리프 1세마저도 퇴위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부르봉 왕가에 의한 프랑스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출처

부르봉 왕가 루이 1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