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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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

정의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


상세소개

개설

1922년 2월서울에서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1922년 7월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가 1926년 1월에 합동하여 결성되었다. 1921년 상해에 있던 이광수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한국지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 후 이광수는 김종덕 박현환 김윤경 등 11명을 규합하여 1922년 2월서울에서 청년 남녀의 수양 기관을 표방한 수양동맹회를 결성하였다.

1922년 7월평양에서는 동우구락부라는 친목 단체로 합법 위장한 민족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두 단체는 같은 흥사단 계열로 1926년 1월 통합, 수양동우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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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목적

  • 무실역행

무실(務實)’이란 ‘실(實)’을 힘쓰자는 뜻이고 ‘실’은 진실·성실, 거짓 없는 것을 말하며, ‘역행(力行)’은 ‘행(行)’을 힘쓰자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비성(非誠)이면 무성(無成)’이라 하여 성을 마음의 근본자세로 삼았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성실을 천명하여 역행에까지 실현하는 것이 위학(爲學)의 근본이며 사람된 도리라고 생각하여 왔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하늘에 견주어 생각했음은, 인간의 참되려는 노력이 하늘의 진실무망(眞實無妄)과 통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성(誠)에 대한 이이(李珥)의 사상뿐만 아니라, 성의(誠意)를 궁극적 신조로 삼았던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사상에서도 성은 크게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계승, 전개되어온 성실본위의 무실역행사상은 안창호(安昌浩)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되어,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전개되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깨어나는 길은 자아혁신·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민족개조를 이루는 데 있다고 믿은 안창호는 자신이 설립, 조직한 대성학교(大成學校)·청년학우회·흥사단 등을 통하여 이러한 사상을 널리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무실역행사상 및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됨은 알맹이가 들어 있기에 실(實)이 붙은 성실이요, 거짓은 속이 비어 있기에 허(虛)가 붙은 허위(虛僞)라고 하여,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참되기’와 ‘거짓이 없을 것’을 가르치며 위(僞)와 가(假)를 배격하였다.

약속을 지키는 것, 집합시간을 지키는 것이 모두 성실의 공부요, 약속을 어기는 것,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허위의 실천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고 참된 것이 무실이기 때문에 참의 정신, 참의 실천, 참의 도덕으로 우리 민족을 교육시켜 갱생시키고자 하였다.

안창호가 말한 역행은 힘써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행하기를 힘쓰라는 말이다. 즉 공리공론의 허식 명분론을 버리고 실천궁행(實踐躬行)하기에 노력하자는 것이다.

이 실천주의는 재래 문약(文弱)을 비판하고 강장(强壯)한 기풍을 숭상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대성학교에서는 덕(德)·체(體)·지(知)의 삼육(三育)을 중히 여겼다. 덕육(德育)과 체육(體育)을 지육(知育)보다 먼저 내세운 것은 바로 이 역행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힘이 없이 이름만 있는 당시 우리 나라의 실정을 안타까워하며 ‘힘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임을 역설하였다. 그는 웅변에서 “힘이다, 힘이다.”, “외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 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외칠 때, 그 절규의 사상적 근거도 분명 역행이었다.

이 역행은 큰 목적이 눈앞에 실현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 가정을 고치는 일, 허위를 버리는 일, 민족운동의 동지를 구하는 일, 자기자신을 개조하는 일 등은 모두 오늘에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안창호는 스스로 행함에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성을 다할 것을 강조하고, 표리부동(表裏不同)과 모략중상을 극도로 경계하였으며, 스스로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1909년에 조직된 청년학우회의 4대 정신에서도 나타났는데, ‘무실·역행·충의·용감’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안창호는 이 4대 정신 이외도 ‘자강·충실·근면’의 셋을 더해서 7대 정신을 내세웠는데, <청년학우회가 靑年學友會歌>를 지은 최남선(崔南善)은 가사에서 “무실역행 등불 밝고 깃발 날리는 곳에, 우리들의 나갈 길이 숫돌 같도다.”라고 하여, 그 정신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안창호는 다시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설한 흥사단에서도 이러한 사상을 계속 전개하여, 단가에 ‘무실역행 깃발 밑에’, ‘무실역행 정신으로’ 늠름하게 모여든다고 하였다.

흥사단 입단 문답 때 위원은 단(團)의 격식에 의하여 어깨에 누른빛과 붉은빛의 두 쪽을 합하여 된 단대를 메었다. 누른빛은 무실이니 참됨을, 붉은빛은 역행이니 힘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리고 문답내용의 한 예로 “우리 나라의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길은 무엇이뇨?”라는 위원의 물음에, “무실운동이요, 2천만 민족이 참된 사람들이 되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안창호는 이 무실역행의 정신으로 신문화 창조의 지도적 역군 및 민족부흥과 사회개혁의 많은 일꾼을 양성하였다.

  • 민족의 재생

국내에 2개의 흥사단계 단체가 결성된 사실을 알게된 안창호는 1923년 3월이광수를 베이징으로 불러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를 평양의 동우구락부와 합동하고 운동을 적극화할 것을 지시했다. 기관지인 『동광』의 사설에 따르면, 6가지 근본적 도덕을 힘쓸 것을 제시하고 우리 민족의 재생을 위해 이에 힘쓸 것을 역설했다.

동우회 사건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동우회로 개칭한 뒤에 눈에 뜨이는 활동이 없던 수양동우회는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되었다.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양심적 지식인 및 부르조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가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를 표적 수사한 것이다.

1937년 8월 서울에서 55명, 11월 평안도 지역에서 93명, 1938년 3월에는 황해도에서 33명 등 모두 181명의 동우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 11월에야 무죄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홍난파, 장로교 목사 정인과, 의사인 이용설 등이 대표적이며, 중심 인물이었던 이광수와 주요한은 특히 극렬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 동우회는 1937년 해산되면서 보유 자금과 토지, 사무기구를 매각한 금액까지 긁어모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했다.

윤치호는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과 청구구락부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까지 서 주면서 그는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연혁

연도 내용
1926 미국의 홍사단 원동위원부의 진로 논의, 혁명대당으로 성격 전환
1929.11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 단체의 성격을 혁명단적인것으로 바꿈
1931 회세 확장 4개년 계획 수립
1932 회관 거닙과 기관지 동광을 발행
1933 일본 경찰에게 안창호 붙잡힘, 회세확장 4개년 계획 실패
1937 181명 붙잡힘
1941 전원 무죄 판결

관련 인물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한다.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수양동우회 이광수 소속이다
수양동우회 안창호 소속이다
수양동우회 홍난파 소속이다
수양동우회 주요섭 소속이다
수양동우회 주요한 소속이다
수양동우회 계몽운동 지지했다
수양동우회 이광수 배신했다
수양동우회 주요한 배신했다
수양동우회 강제해산 되었다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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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동광(東光)』 『한민족광복투쟁사연구』(이현희, 정음문화사, 1988)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흥사단 70년사』(흥사단, 1980) 『3·1운동사론』(이현희, 동방도서, 1979) 『한국현대사의 이해』(이현희, 서문당, 1976) 『일제시대사의 연구』(이현희, 삼진사, 1974) 『독립운동사』1∼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80) 『한국독립운동사』1∼9(국사편찬위원회, 1966∼1978) 「독립운동」(김호일, 『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978)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