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소개

정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성곽. 읍성. 사적.

개설

사적 제3호로 수원화성은 1796년에 축성된 읍성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지방 읍성들과의 차이점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주로 옮겨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으며 능행을 위한 행궁을 화성 안에 건축하였다는 점이다.

상세 내용

  • (화성 → 수원 화성)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화성은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전체 길이는 5.74㎞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각루(角樓), 군사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두루 갖췄다.

이는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교류를 보여주고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수원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역사

수원화성의 건축
1789년(정조 13) 1794년(정조 18/1월) 1796년(9월)
수원을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김 축성 시작 수원화성 완공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 운한당 정조 영전

정조영전.jpg

건축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 총 49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되었다. (현재 소멸된 시설물 :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 수원화성만의 건축양식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관련 문화재

수원 화령전

수원 화령전.jpg

  • 개요
화령전은 1963년 사적 제115로 지정되었고 현재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나, 건립기록인 「영건등록(營建騰錄)」이 전해지지 않고, 일제시기인1933년에 한 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사실 외에는 해방 이전의 기록도 거의 찾기 힘든 상황이다. 다만 화령전 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령전은 순조 1년 4월 29일에 완성되었다. 화령전이 수원에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정조가 얼마나 수원을 사랑하고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조가 돌아가신 이후 정조의 신위는 종묘에 안장되었는데, 따로 수원에 영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령전의 이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시경」국풍 주남 <갈담(葛覃)>의 마지막 구절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에 서 '령'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 상세정보

문의 및 안내 : 031-251-4435

쉬는날 : 연중무휴

수용인원 : 300명

이용시간 : 하절기(3~10월) 09:00 ~ 18:00 동절기(11~2월) 09:00 ~ 17:00

주차시설 : 화성행궁 주차장 이용

  • 추가정보
입 장 료(화성행궁)
구분 개인 단체
어른 1,500원 1,200원
청소년, 군인 1,000원 800원
어린이 700원 500원
통합매표요금
구분 개인 단체
어른 3,500원 2,000원
청소년, 군인 2,000원 1,200원
어린이 600원 400원

※ 개별 매표시보다 약 46-50%할인

※ 화성열차,국궁체험은 포함되지 않음(별도매표)

  • 한국어 안내서비스

문화관광해설사 동반해설(4인 이상) / 단체 - 사전신청 후 방문

  • 외국어 안내서비스

사전신청 후 방문 - 해설사 안내(영어, 일어 가능), 음성서비스기 대여

4대 성문

  • 수원화성 지도

4대성문 지도.jpg

  • 장안문(북문)

장안문.jpg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으로 사실상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조는 장안이라는 말을 화성의 정문으로 삼으면서 수원의 백성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였다.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라고 하여 웅장한 위엄을 뽐내고 있으며 장안문은 서울의 국보 1호 숭례문보다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문루가 불타 훼손된 것을 1975년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복원하여 지금의 웅장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 창룡문(동문)

창룡문.jpg

창룡문은 화성의 동쪽문으로 규모와 특징이 화서문(서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다. 무지개처럼 쌓은 석축 위에 1층 누각을 만들었는데 이는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하면 그 규모가 작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 모양으로 쌓아두었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 성문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을 확인할 수 있다.
  • 팔달문(남문)

팔달문.jpg

팔달문은 화성 남쪽의 충청, 전라, 경상도 사람들이 이를 통과해서 들어오기에 사통팔달 통한다는 의미로 만든 이름이다. 이는 축정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 바깥쪽에는 벽돌로 옹성을 쌓았는데 옹성의 출입문이 중앙에 난 것이 특징이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원활한 사람과 물자의 유통을 위해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중앙에 문을 낸 것이다. 성문의 오른쪽 석벽에는 팔달문 공사에 참여한 책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공사실명판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 화서문(서문)

화서문.jpg

화성의 서쪽 대문으로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체제공이 썼다고 한다. 이는 원래의 모습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어 ‘보물 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룡문과 거의 같은 모양으로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 성문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이 있다.

위치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지도를 불러오는 중...
  • 장안공원에서 도보 3분

관련 사진

관련 영상

  • 세계 속에 빛나는 수원화성

  • [문화유산 코리아] 조선 최후의 신도시, 최첨단 전투요새, 수원화성

  • 한국의 세계유산시리즈 - 수원화성

참고 문헌 및 출처

수원화성,<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333100030000
수원화성,<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8%98%EC%9B%90%ED%99%94%EC%84%B1&ridx=0&tot=319
수원화성,<네이버 지식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50075&cid=58249&categoryId=58249
수원 화령전,<지역N문화>,https://www.nculture.org/cul/localCultureDetail.do?targetId=736662&contentType=G
수원시 관광,<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visitsuwon/220656577864

작성자

이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