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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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요약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역사

역사적 배경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뒤 미국은 아시아팽창정책을 추진하며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였다.

또 셔먼호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나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경과

그러다가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리고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일단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으나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는 57명으로 되어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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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경로


결과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는 미국의 포함외교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871년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측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배외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패인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주 01)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和蘭商館]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유럽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와 같은 교역 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서구문물에 어두웠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개항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하면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


관련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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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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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당시의 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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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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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순절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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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순절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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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군 수자기


관련영상

참고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