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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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신헌(申櫶, 1810 ~ 1884,)은 181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부사 신의직(申義直)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 자는 국빈, 호는 위당,금당,동양,우석. 본명은 신관호(申觀浩)였으나 나중에 개명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시문에도 밝았으며 예서에 특히 조예가 깊어 훗날 여러 건축물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김정희는“예서첩은 가르친 나보다 훨씬 나은 기쁨이 있으니 문득 내 글씨가 형편없는 것을 깨닫겠네”라고 말했을 정도다. 신헌이 남긴 득의작 중 하나가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 뒤채 가운데 있는 법보전 현판 글씨다. 또한 그는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박규수 등과 폭넓게 교류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질 수가 있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적으로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 녹도에 유배되었다. 1853년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에서 요양하기도 하다가 74세에 고향인 진천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활동

정치

순조

1827년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에 차출되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제외되었다.

철종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고종 초기에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군사

수뢰포 모형도 - [6]
불랑기동차 - [7]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로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신무기 개발에 관심을 쏟아 수뢰포, 불랑기동차, 쌍포합이조선군의 대표적인 군사무기를 개발하였다.
특히 수뢰포는 일종의 기뢰로 잠수부가 수중에 폭약을 설치하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폭발하는 장치이다. 즉, 물속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1867년에 제작된 수뢰포의 용도는 바다에 나아가 적선을 격침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다 밑에서 침입하는 적의 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기술 수준으로 수뢰포를 제조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뇌관은 조선 자체 기술로 제작할 수 없어서 청나라에서 수입하여 이용하였다. 동화모 제조 기술의 도입은 흥선 대원군 정권이 몰락한 이후 고종영선사를 청나라에 파견하는 1880년대에 가서야 추진되었다.
불랑기동차는 당시 조선의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의 운반이나 발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포차로서 모포 속에 자포 1문을 끼어두고 활차 좌우의 등자철에 두 개씩의 자포를 놓아둠으로써 유사시 신속하게 자포를 교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활차를 이용하여 포를 좌우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불랑기의 활용도를 더욱 높였다.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지행삼군부사,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덕진,초지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외교

운요호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인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沁行日記) 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슈펠트(Shufeldt, R. W.)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저서

표1. 신헌의 저서
도서명 내용 사진 출처
심행일기(沁行日記) 조선말기 신헌강화도 조약체결의 전말을 기록한 일기 심행일기2.jpg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보집설(民堡輯設) 조선 후기의 무신 신헌이 1867년 편집, 간행한 민보방위에 관한 책 민보집설.jpg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융서촬요(戎書撮要) 전체적으로 장수의 선임과 지휘의 원칙, 군사의 정신훈련, 군령 등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는 병서(兵書) 융서촬요.jpg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산필기(酉山筆記) 우리나라 고대 단군조선으로부터 역대 국명·지명·제도·풍속·인명·사물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으로 풀이한 역사지리서 유산필기2.jpg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 조선 말기 훈련도감에서 편찬한 병서(兵書) 훈국기계도설.jpg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 금석학 관계를 저술한 저서 현재 전하고 있지 않음
농축회통(農蓄會通) 농서 x

문화재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사진출처 - 문화재청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호로 건립 당초에는 ㄱ자형으로된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중문 등이 있었으나, 사랑채, 행랑채는 근년에 해체하여 진천읍내의 길상사를 중수하는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ㄱ자형의 안채 주변에는 동남쪽으로 중문과 광채가 있고, 주위로는 막돌로 쌓은 담장이 장방형을 이루면서 이어져 있다. 안채는 가운데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마루 전면에는 4분합문을 달았다.

관련 영상


출처 - Youtube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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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1. 작성자: 김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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