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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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1860-1939)는 체코의 화가이자 장식 예술가,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생애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기원인 모라비아의 이반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라비아에서 장식용 회화, 주로 연극 풍경을 그리는 일을 한 후 1879년 비엔나로 건너가 비엔나 연극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예술 교육을 받았다. 1881년에 회사 건물이 불타 직장을 잃은 뒤에는 모라비아로 돌아와 데코레이션, 초상화를 그리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Mikulov의 Karl Khuen 백작이 무하에게 Hrusovany Emmahof Castle의 벽화 장식을 맡겼는데, 이후 무하의 예술 학업을 지원해줄 정도로 그에게 감명을 받았다.

무하는 1887년에 파리로 이사해 Académie Julian과 Académie Colarossi에서 순수 미술 공부를 계속하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 일을 맡아 했다. 1894년 크리스마스 무렵, 인쇄소에서 우연히 파리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영화의 새로운 포스터 작업을 하게 되었다. 무하는 2주 내에 석판화 작업을 하겠다고 자원했고 1895년 1월, 그가 포스터를 제작한 연극 '지스몽다(Gismonda)' 광고가 파리 거리에 나타났다. 그 포스터는 하룻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예술 스타일과 그 스타일의 창조자를 파리 시민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베르나르는 무하와의 6년 계약에서의 첫 포스터 성공에 매우 만족해했다.

이후 무하는 다양한 그림, 포스터, 광고를 그려냈고 삽화, 보석, 벽지, 극장 세트 등의 디자인도 맡았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초기에 '무하 스타일'로 불렸지만 후엔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로 불리게 되었다. 기존의 포스터 작가들과 달리 파스텔 색상을 사용하며 신고전주의적 예복을 걸치고 꽃에 둘러싸여 머리 뒤에서 후광을 내뿜는 여성을 자주 묘사하였다. 1900년 파리 국제 전시회에서 '무하 스타일'이 국제적으로 퍼져나갔고 무하는 "박람회가 예술과 공예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무하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자주 모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하가 그의 일생 동안 거리를 두려고 했던 스타일이었다. 그는 세련된 양식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순수하게 체코 예술과 체코 예술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은 오직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그 이상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상업 예술을 통해 얻은 명성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으며 고귀한 예술과 그의 출생지를 고귀하게하는 더 높은 프로젝트에 항상 집중하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무하는 1906년 6월 10일 프라하에서 Maruska (Marie / Maria) Chytilová와 결혼했다. 부부는 딸인 야로슬라바가 뉴욕에서 태어났을 때,1906 년부터 1910 년까지 미국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1915년 3월 12일 프라하에서 아들 지리를 낳았다. (그 아들은 이후 유명한 기자, 작가, 시나리오 작가, 자서전 소설 작가 겸 무하 작품 연구자가 된다.) 프라하에서 그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프로젝트에 투자할 자금을 모을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백만장자 찰스 크레인 (Charles R. Crane)의 지원을 받아 혁명을 촉진하고, 슬라브 민족주의의 토마스 마사 리크 (Thomas Masaryk)를 만난 후 도움을 받았다. 가족은 체코의 땅으로 돌아와 프라하에 정착하여 무하는 극장의 미술관을 장식했고, 시장 사무실의 벽화와 도시의 다른 랜드 마크들에 그의 작품으로 공헌했고 체코 슬로바키아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했을 때, 무하는 새로운 우표, 지폐 및 기타 정부 문서를 새 주에 맞게 디자인했다.

1930년대 후반 파시즘의 물결은 무하의 작품과 그의 슬라브 민족주의를 '반동적'이라고 비난했다. 1939년 봄 체코 슬로바키아로 독일 군대가 행진했을 때, 무하는 게슈타포가 체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노화한 무하는 폐렴에 걸렸다. 결국 석방되었지만, 그는 그 사건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프라하에서 1939 년 7월 14일 폐 감염으로 사망했고 비 셰흐 라드 공동 묘지에 묻혔다.

작품과 성향

아르 누보

아르 누보(프랑스어: Art Nouveau, IPA: [aʁ nuvo]) 또는 유겐트슈틸(독일어: Jugendstil, 영어: Jugend-Style, IPA: ['juːɡəntʃtiːl])은 19세기 말 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유럽의 예술 사조이다. 최고조를 이룬 시기는 20세기 전후(1890-1905)이다. 아르 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을 뜻한다. 독일어권에서는 유겐트 잡지 이름을 따서 유겐트 양식(유겐치틸)이라고도 불린다. 19세기 아카데미 예술의 반작용으로 아르 누보는 자연물, 특히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따온 장식적인 곡선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아르 누보는 예술가가 건축에서 가구까지 삶의 예술에 관한 모든 부분에 대해 작업해야 한다라고 접근한다. 알폰스 무하가 1895년 1월 1일에 빅토리앵 사르두의 연극 지스몽다 광고용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을 때, 아르 누보는 무하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는 갑작스런 파급 효과를 내었고, 새로운 예술 장르와 예술가들을 파리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하 스타일이라 불렸는데 이는 곧 아르누보로 알려졌다.



파리의 보헤미안

프랑스 기존 체제에서 외국인, 아웃사이더였던 '보헤미안'으로서의 무하의 초기 작품들이다. 이방인 예술가였던 무하가 사라 베르나르의 '지스몽다' 포스터로 그의 예술 인생에 어떤 전환점을 가져왔는지 알 수 있다.


무하는 '지스몽다'포스터 제작 이후 파리에서 스타덤에 올라 각종 광고, 포스터, 패키지 디자인 등을 맡게 된다.



무하 스타일

여성의 이미지와 꽃, 자연에서 가져온 모티브뿐만 아니라 숨겨진 예술적 철학 등을 이용하여 어떻게 그만의 예술적 방식으로 ‘무하 스타일’을 발전 시켰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890년대에 포스터는 파리 시각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컬러 석판화의 발달과 벨 에포크의 상업 문화 속 광고에 대한 수요 증가 덕에 아티스트들은 새로운 예술 형태를 탐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도시의 광고판, 포스터들은 거리의 전시장이 되었고 무하는 섬세한 파스텔 톤과 신비스러운 비잔틴 효과, 독특한 구성과 구도로 파리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신비주의자

무하는 19세기 말에 활동하던 많은 유럽 예술가들과 지식인들과 같이 영성론(靈性論)에 큰 영향을 받는다. 무하는 스웨덴 출신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티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와 친분을 쌓으며 점차 그의 신비철학에 매료되었고, '신지(theopophical)학' 모임에도 들어갔다. 1898년에는 '프리메이슨(Freemasons)' 조직의 파리 지부에 가담한다. 이후 석판화 연습에 몰두하던 무하는 고향으로 돌아온 후 1923년에 프리메이슨의 체코 지부 총 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영성론은 그의 예술적 철학과 그의 예술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

Le Parter는 무하가 그린 주기도문의 일러스트 판이다. 그것은 무하가 미래 세대들에게 전하는 인류의 발전에 대한 메시지였다. 고대 기독교 기도를 통해, 그는 인간이 영적인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태인 신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를 원했다. 무하는 <Le Pater>를 그의 인쇄된 걸작으로 여기며 1900년 1월 5일 뉴욕의 The Sun Newspaper에 "자신의 영혼을 넣은 것"이라고 언급했다. 1899년 12월 20일 인쇄된 <Le Pater>는 무하의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주제에 대한 초자연적 시험이었으며 단 510 개의 사본만을 제작하였다.



애국자

파리와 미국에서의 성공 이후, 1910년 무하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30여 년 전 고향을 떠난 이후 무하는 줄곧 조국과 그의 민족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는 방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특히 무하는 그의 야망이 담긴 20점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질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 작품의 제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묘사한 작품을 통해 무하는 모든 슬라브 동포의 정신적인 통합을 원했고 그들과 함께 정진하여 모든 슬라브 국가의 공통된 목표인 정치적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무하의 애국심과 민족 자긍심이 나타난 작품으로는 그가 조국을 위해 제작한 두 가지의 기념비적 작품, 프라하 시청사의 시장실에 그린 벽화와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이다.


무하는 그가 그 자신의 순수 예술 걸작이라고 여겼던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에 다년간 몰두했다.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는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묘사한 20편의 거대한 회화 시리즈로, 무하는 젊은 시절부터 늘 그러한 슬라브 역사를 기념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완성하기를 꿈꾸었다. 1963년 이후로 그 시리즈는 체코의 모라브스키 크룸로밧(Moravsky Krumlovat)에 전시되어 있다.


                                                                         거대한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는 무하의 모습이다.

영향

무하는 유럽에서 초기 아르누보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잠시 가라앉았던 무하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에 크게 부활하였다. 이는 영국의 밴드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포스터를 제작한 Michael English and Nigel Waymouth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무하의 작품들은 많은 삽화가들과 예술가들이 주기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일본의 만화가 타케우치 나오코는 그녀의 만화 캐릭터들에 대한 모티브를 무하의 작품에서 가져왔고, 만화가이자 현재 마블 코믹스의 편잡장인 조 퀘사다 또한 무하의 기술과 일련의 작품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Alphonse Mucha Art Nouveau Visionary


저작자: Maxim film 게시자: Diseño Grafico Editorial

아르누보 양식 선구자로서의 알폰소 무하 (CC BY)

참고문헌 및 출처

알폰스 무하 공식 홈페이지 생애 부분 참고 (CCL)

Wikimedia Commons-Alphonse Mucha 카테고리 작품 사진, 무하 프로필 사진(SiefkinDR), 무하 서명 (CC BY-SA 3.0)

Wikiart-Alphonse Mucha 작품 사진(public domain)

위키피디아-슬라브 서사시 작품 사진, 작품 설명 참고(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3.0)

위키피디아-아르 누보 아르누보 설명 참고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3.0)

알폰스 무하 작품들: Public Lisence

작성자 및 라이센스

작성자: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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