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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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염상섭(廉尙燮,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은 일제강점기 시기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해바라기」등을 저술한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서원(瑞原). 호는 제월(霽月) 또는 횡보(橫步). 서울 출생이다.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염규환(廉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義城) 김씨김영옥(金英玉)이다.

생애 연보

  • 1897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부친 염규환, 모친 경주 김씨의 8남매 중 넷째로 출생. 호는 제월(霽月), 횡보(橫步).
  • 1904년 조부에게서 한문 수학.
  • 1907년 관립 사범부속보통학교 입학.
  • 1909년 보성소학교로 전학.
  • 1910년 보성중학교 입학.
  • 1911년 일본 유학.
  • 1912년 도쿄 아자부 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가 중퇴하고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
  • 1917년 교토 부립제이중학교로 편입.
  • 1918년 게이오 대학 문과 예과에 입학. 한학기만에 병으로 자퇴.
  • 1919년 황석우를 통하여 <삼광三光> 동인이 됨. 3월 18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다가 피검, 6월 10일 석방
  • 1920년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로 입사, 6월에 퇴사. 남궁벽, 황석우 등과 더불어 <폐허> 동인 결성
  • 1922년 최남선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 학예부 기자로 활동. 《묘지》연재 시작.
  • 1924년 첫 창작집 《견우화》와 장편 《만세전》출간.
  • 1926년 재 도일. 창작 활동에 전념
  • 1929년 김영옥과 결혼. 조선일보 입사, 학예부장으로 취임.
  • 1931년 <조선일보>에 《삼대》연재.
  • 1935년 매일신보 입사
  • 1936년 만주로 이주하여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
  • 1939년 중국 안동으로 이주
  • 1945년 신의주로 귀국
  • 1946년 서울로 돌아와 돈암동에 거주.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으로 취임
  • 1949년 단편집 《해방의 아들》출간
  • 1950년 6.25 전쟁 당시 피난을 못 가 숨어지냄
  • 1951년 해군 정훈장교로 종군.
  • 1952년 <조선일보>에 《취우》연재.
  •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응로 추대. 서라벌 예대 학장으로 취임.
  • 1960년 단편집 《일대의 유업》출간.
  • 1962년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여.
  • 1963년 직장암으로 사망.

경력사항 요약

  1. 1920.2.~ 동앙일보 창간과 함께 정경부 기자로 활동
  2. 1920.7.~ 동인지 폐허를 창간
  3. 주간종합지 동명의 기자
  4. 1929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
  5. 1936년~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
  6. 1946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7. 1955년~ 서라벌예대 초대학장

작품세계 (활동내역)

염상섭은 500여 편의 글을 남겼다. 소설이 180여 편, 평론 100여 편, 수필 50여 편, 그 밖에 시 1편과 기타 잡문으로 되어 있다. 염상섭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소설이지만 평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상섭은 1920년대 초에는 대표적인 평론가 이기도 했다. 그의 평론은 시대 정신이 투철했으며, 날카로운 관찰력과 비판력을 지녔기 때문에 논리가 정연했다. 당시 황무지였던 문학 이론에 특히 기여한 바 크다. 더욱 그의 프로 문학과의 대결시에빚어졌던 논쟁에서의 민족 문학 이론은 논리가 정연하고 자시 주장이 분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삼은 물론 우리 문예 이론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염상섭은 150여 편의 단편을 썼으나 그 본령은 장편 소설이었다. 그는 삼십여 편의 장편을 갖고 있다. 작가적 기질로나 작품적 기법으로 보아서는 염상섭은 훌륭한 장편 소설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가적 체질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초기의 염상섭 문학은 이론과 실제가 병행하고 있었다. 이때의 작품은 사회와 개인의 적응 관계가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사회성이 강조된 나머지 작품적 기법이 소홀히 다뤄졌다. 그러나 미숙한 대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회 관찰을 중요시하는 사회성 문학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즉 암담하고 침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개인의 생활을 통하여 받아들였고 외래적인 요소를 체질화하거나 개성화하지는 못하였으나 개인의 적응관계를 충분히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염상섭의 일차적인노력은 폭넓은 사회 관찰을 가능케 하였다. 너와 나의 개인적인 문제나생 활을 떠나 단체나 집단의 대립과 갈등을 문제 삼았고 개인의 고뇌를 통한 생활의 연구가 계속되면서 보다 심도 깊게 인간의 문제들을 작품에 부조시킬 수 있었다. 민족과 민족의 문제나 사회와 종교의 순수성 문제가 등장하고 계급과 계급의 마찰이 문제시되며 애욕과 윤리 문제가 다뤄지면서 염상섭 문학은 명실공히 리얼리즘 문학으로 안착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해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장편 소설들이다. 그 중에서도 〈삼대〉를비롯한 1930년대의 장편과 광복 후에 〈취우〉를 비롯한 1950년대의삼부 대하 장편 소설 군이다. 이들은 그의 문학의 핵심적인 작품들일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 문학에서도 주류에 속하는 소설들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기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전성기의 작품들이라는점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모을 충분한 이유를 지닌다.


그의 문학이나 생활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첫째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 둘째 민족 문학, 셋째 사실주의 문학, 넷째 현실주의 문학, 다섯째 절충주의 문학, 여섯째 사회성 도시문학 등으로 불리어 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요즈음 가장 강력한 주장은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이라는 견해이다. 이에따라 종래 자연주의라는 견해는 수정되기 시작했고 상섭 문학 속의 자연주의적인속성의 약점이 강조·지적되었다. 그 예로 과학 정신의 결여가 지적되면서 사회성이 강조되어 상섭 문학은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정통이란 정의로 낙착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생활에 있어서의 첫째 보수주의자, 둘째 점진적 개량주의자. 셋째 소시민적 서민 넷째 휴머니스트, 다섯째 민족주의자, 여섯째 철저한 개인주의자·자유주의자, 일곱째 항일·반공주의자 등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작품 및 저서

작품 및 저서
박래묘 이중해방 부득이하여 저수하에서
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 제야 묘지[미완]
지상선을 위하여 E선생 죽음과 그 그림자 해바라기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 필주 금반지 니즐 수 없는 사람들[미완]
만세전 선후감 견우화 이심
우주시대 전후의 아들딸 윤전기 검사국 대합실 고독
여객 두 출발 작금의 무산문학
사랑과 죄 숙박기 소설시대 이심
광분 타락 삼대 무화과
사랑과 죄 백구 구두 우보와 새 생명
무현금 어떤 날의 여급 실직 불연속선
청춘향로 첫걸음 모란꽃 필 때 영감가쾌와 돌쇠
이합 재회 효풍 도난난
허욕 그리운 사랑 삼팔선 신혼기
일대의 유업 혼란 화투 두 파산
임종 해방의 아들 굴레 난류
거품 취우 해지는 보금자리 풍경 미망인
감사전 두 살림 후덧침 절곡
아내의 정애 순정의 저변 대목 동티 대를 물려서
싸우면서도 사랑은 결혼 뒤 십자매 두 양주
일대의 유업 해복 얼룩진 시대의 풍경 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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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세전

염상섭의 중편소설. 원제는 ‘묘지’로, 1922년 7월부터 9월까지『신생활』에 연재되다가 잡지의 폐간으로 중단되었다.

조선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겨울, 동경에 유학중인‘나’는 기말시험 도중에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을 받고 급작스레 귀국한다.

시모노세키에서부터 서울까지의 여정을 그리면서 '묘지'같은 조국의 모습을 보고 '나'는 분노를 느낀다.

3·1운동 이전의 사회 현실을 그리고 있다.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안의 형편과 실상을 목격하고 깨달아간다는 설정을 통하여,

식민사회의 현실을 여실없이 드러내었다.


  • 삼대

염상섭의 장편소설.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총 21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1930년대 서울의 보수적인 중인계층 출신이며 식민지 중산층 집안인 조씨가(趙氏家)의 몰락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삼대의 이야기는 마침내 할아버지의 죽음이 몰고 온 재산상속 문제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 인물들의 엄청난 추악상을 드러내 보인다.

삼대에 걸친 가계의 전개를 통하여 식민지시대인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변천과 정신사의 이면을 함께 묘사한 1930년대 가계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 표본실의 청개구리

염상섭의 첫 단편소설. 작자의 첫 단편소설로, 1921년 8월부터 10월까지 3회에 걸쳐 『개벽』(14∼16호)에 연재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삶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느끼기를 갈망하지만,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삶의 열정을 잃은 등장인물의 모습과 그들이 갈망하는 삶의 내용을 각각 개구리 해부 장면과 광인 김창억으로 표현한다.

3·1운동 직후의 패배주의적 경향과 우울 속에 침체되어 있는 지식인의 고뇌가 당대의 식민지 현실을 투영한다.


  • 두 파산

염상섭의 단편소설. 1949년 8월 신천지 38호에 발표되었다.

독립 이후 경제의 불안정성, 물질 만능 주의로 고통받는 정례 가족과 이들을 괴롭히는 옥임과 교장의 횡포를 다룬다.

'두 파산'이라는 제목은 정례 모친의 물질적 파산과 고리대금업일을 하는 김옥임과 교장의 정신적 파산을 뜻한다.

문학적 경향

염상섭과 자유주의1
염상섭이 프로문학론자들을 비롯한 당대의 사회주의자들에 비해 보수적인 정치의식을 유지하였기에 그의 문학은 프로문학에 비해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염상섭이 중산층 보수주의를 견지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 보수주의의 의미가 여성관, 전총관,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에 비해 다소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 정도로 한정하여야 할 것이다.
초기에 염상섭의 자유주의개인주의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후 자유주의는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하거나 혹은 사회주의에 섞여들어 항일운동을 도모했으나, 점차 파시즘화가 심화되고 사회주의에서 전체주의로 변모되는 모습이 나타나자 이내 근대적 모랄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조선의 정치적 공간은 갈수록 엄혹해지는데, 그렇다고 개인을 타자화하는 사회주의와 무턱대고 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염상섭은 자유의 행로로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을 마련하는 길을 택했다. 항일운동을 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정신적 성숙 이외에 다른 자유의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30년대 중반의 염상섭, 그리고 식민지시기 자유주의가 도달한 막다른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염상섭과 민족의식2
<해방의 아들>로부터 시작된 염상섭의 해방직후 소설은 ‘민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해방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민족의 문제를 염상섭이 다시 소설 속에서 천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에 대한 관심은 크게 혼혈인에 대한 서사와 일본인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해방 후 창작한 첫 소설인 <해방의 아들>에서 염상섭은 혼혈인을 소재로 하여 국적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 <만세전>(1924), <남충서>(1927), <사랑과 죄>(1927~8) 등의 작품에서 혼혈인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모색했던 작가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염상섭은 <남충서>에서 혼혈인 충서의 내적 갈등을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전통, 즉 문화의 공유라는 측면과 연결시켰다. 반면 <해방의 아들>에서는 식민지 시기 일본인 마쓰노로 살아온 조준식에게 조선에 대한 귀속의식, 민족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의 의미를 의식의 차원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작가는 혼혈인 조준식의 내면을 보여주기보다는 서술자인 홍규를 통해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서술자인 홍규의 의지는 곧 작가 개인의 의지로 치환이 가능하다. 그것은 만주에서의 염상섭의 이중적인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만주에서의 염상섭의 생활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일본인과 비등한 것이었지만, 민족적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만주국의 상황에서 염상섭의 위치란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방의 아들>에서 ‘온전한’ 조선인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서술자의 의지는 염상섭이 만주국시기 가졌을 의식적·무의식적인 부채감을 민족의식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염상섭이 일본인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시선의 문제와 관련시켜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염상섭은 해방 이전 <만세전>에서 일본인(타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 이인화의 민족 정체성 자각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시선이 가지는 문제성은 해방 직후의 <모략>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모략>에서 염상섭은 만주국에서 이중적인 위치에 있던 창규가 가진 일본에 대한 강박관념을 드러냄으로써 민족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모략>의 결말에서도 작가는 설득력 없이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을 내세워 분열된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경계인적 위치로 인한 부채감을 해소하고자 한 의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염상섭과 식민지 현실3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아 정치면을 갖지 못한 식민지 신문이 사회면에서 잡다한 사건들과 함께 부수적으로 정치적 사건을 보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염상섭 소설에서도 정치적인 사건과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이 혼재되어 있다.
염상섭과 여성상4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장편 「효풍」에서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임무가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현모양처’형 여성관과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생활 및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여성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과도기적 양상을 띄게 된다. 한편,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10여 편의 단편들을 통해서는 여성들이 경제력을 획득하면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나타난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남성들을 대신해돈을 버는 여성들의 모습은 매우 소소하고 일상적이다. 그래서 ‘일상으로의 함몰’ 내지는 트리비얼리즘적 요소가 강하다는 평가를 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가장 현실적인 측면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염상섭의 냉철한 현실 감각이 시대정신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타

염상섭의 생활

말년에 이마 한쪽에 자두만한 큰 혹이 생겼다. 종양으로 보이긴 하나 생애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이 의사에게 찾아가 수술을 받으라고 권하였지만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며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혹이 유명해서 다양한 매체에서 혹이 난 염상섭 사진을 많이 사용한다.

원래 불교 신자였으나 18세쯤에 천주교로 개종했으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주당에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를 피우는 데만 라이터 2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문란한 성생활 끝에 결혼을 했지만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자식을 낳았다는 주인공의 모델이라는 추측이 있다. 염상섭은 이 일로 김동인과 크게 싸우고 15년간 절연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전쟁 직후라 그렇기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월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친일 의혹

일제 말엽에 절필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가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친일의혹이 존재한다. 염상섭은 만몽일보와 이후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합쳐져서 발행된 만선일보의 편집자 겸 주필로 이름을 올렸다. 만몽일보는 일본이 만주지역에서 대조선인용으로 만든 기관지이다. 이때 같이 이름을 올린 인물이 친일파 최남선, KAPF 활동으로 유명한 홍양명, 총독부에게 많은 자금 지원을 받은 진학문 등이 있었다.

또한 염상섭은 진학문과 최남선이 창건한 잡지 동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동명이나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총독부의 강요와 그로 인한 자금 압박으로 무너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편집부에 일본인과 확실한 친일파들이 참여하였고 진학문과 당시 총독부 사이에서 자금 지원이 오간 기록, 최남선이 사이토 총독 측근인 아베에게 보낸 편지 등이 남아있었다. 이것이 염상섭이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친일 의혹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이다.

염상섭 문학전

전시명은 '염상섭 문학전:근대를 횡보하며 염상섭을 만나다' 이다. 처음 염상섭 문학전은 2017년 11월 27일부터 2018년 2월 25일까지 국립 중앙도서관 본관 1층 전시실에서 염상섭의 탄생 120주년을 맞아 염상섭의 작품세계와 생애를 조명하기 위해 열렸다.

그 이후 2018년 3월 6일부터 2018년 5월 27일까지 국립세종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염상섭 문학전이 열렸다. 전시에는 해바라기, 만세전, 삼대 등의 다양한 저작과 함께, 육필원고, 원고지함, 군번표등 염상섭의 손때가 묻은 유품이 전시됐다. 염상섭의 글을 필사하거나 당시 경성 거리를 색연필로 칠하는 등의 관람객 참여 코너도 있었다.

염상섭 문학전 포스터

수상 내역

  • 1954년 「취우」로 서울시 문화상
  • 1956년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
  • 1957년 예술원공로상
  • 1962년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관련연구

학위논문

  • 염상섭문학의 개인주의

최인숙, 인하대학교 대학원,[2013] [국내박사]

  • 염상섭 장편소설의 도시 공간 연구 :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ity Space in the Yeom Sang-sub's Novel : Centering on Public and Private Space

이주연,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2008] [국내석사]

  • 식민지시기 염상섭 문학의 자유주의 연구1

박성태, 고려대학교 대학원,[2018] [국내박사]

  • 전후 염상섭 단편소설 연구 : 전후 단편에 나타난 도시 공간을 중심으로 = Study of Yeom Sang Seob's Short Story after Korean War

양점술, 대구한의대학교 교육대학원,[2009] [국내석사]

  • 염상섭 초기 소설의 자연주의적 특성에 관한 연구 : E.졸라 소설과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naturalism in Yeom, Sangsub's early novels : compared with the E.Zols's novels

김선묵,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2000] [국내석사]

  • 염상섭과 아리시마타케오 소설비교연구 : 근대적자아 양상을 중심으로 = (A) Comparative Study on Novels of Yeom Sang-sup and Arishima Takeo : Focusing on Types of Modern Ego

김수영, 同德女子大學校 大學院,[2005] [국내석사]

  • 염상섭 문학비평 연구 = (An) Approach to Sang-seop Yeom's Literary Criticism

김민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2001] [국내석사]

  • 염상섭과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 소설에 나타난 탈식민적 글쓰기 전략 연구

페브리아니, 서울대학교 대학원,[2017] [국내석사]

  • 염상섭 가족사 소설 연구 : 식민지 자본주의의 전개와 가족제도의 변화 = A Study on Family Novels Written by Yeom Sang-seop : The Development of Colonial Capitalism and Changes in the Family System

김성연, 동덕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2012] [국내박사]

  • 1930년대 중반 염상섭 소설의 애정서사 연구 : 『백구』, 『牧丹꽃 필 때』, 『불연속선』을 중심으로

전훈지, 고려대학교 대학원,[2013] [국내석사]


국내학술지논문

  • 염상섭 초기 산문 연구 = A Study on the Modern Critical Essays of Yeom Sang-seop

김영민,(大東文化硏究, Vol.0 No.85,[2014])[KCI등재]

  • 염상섭과 4·19혁명 = Yeom Sang-seop and April 19 Revolution

오창은(Oh, Chang eun),(국어국문학, Vol.- No.170,[2015])[KCI우수등재]

  • 일반논문 : 1950년대 문예지와 염상섭의 단편소설 = The literary magazines and the short stories of Sang-sup Yeom in the 1950`s

김준현 ( Jun Hyun Kim ),(泮橋語文硏究, Vol.40 No.-,[2015])[KCI등재]

  • 해방 직후 염상섭 소설에 나타난 민족의식 고찰 = A Study on 'National Consciousness' in Yeom Sang-Seop's Novel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2

최진옥(Choi Jin-ok),(한국현대문학연구, Vol.23 No.-,[2007])[KCI등재]

  • 염상섭 초기 문학에 나타난 ‘폐허'와 ‘죽음'의 의미 = The Meaning of ‘Ruin' and ‘Death' in the Early Works of Yom, Sang—seop

임희현(Lim, Hee-hyun),(구보학보, Vol.14 No.-,[2016])[KCI등재]

  • 1920년대 중반 염상섭 작품에 나타난 프로의식의 성격 = A Study on the nature of the pro-consciousness appeared Yeum Sang-sup`s Literature in mid 1920s

조미숙 ( Mi Sook Jo ),(한국문예비평연구, Vol.37 No.-,[2012])[KCI등재]

  • 염상섭 초기 산문 연구 = A Study on the Modern Critical Essays of Yeom Sang-seop

김영민 ( Young Min Kim ),(大東文化硏究, Vol.85 No.-,[2014])[KCI등재]

  • 염상섭의 프로문학론 비판과 개성적 사실주의 문학론 = Criticism of the Proletarian Literary Theory and Personality Realism of Yeom Sang-seop

박성태 ( Park Seong Tae ),(現代文學理論硏究, Vol.66 No.-,[2016])[KCI등재]

  • 1950년대 서울 종로 중산층 풍경 속 염상섭의 위치 = The middle class landscape in Seoul and Yeom Sang Seup`s position in the 1950`s -focused on The young generation and Deeding the estate to next generation-

최애순(Ae Soon Choi),(현대소설연구, Vol.- No.52,[2013])[KCI등재]

  • 염상섭의 소설론에 대한 고찰 = The study of the Yeom Sang-Seop's theory of novel – focus on 1927~1929's –

박현수(Park, Hyun-Soo),(한국근대문학연구, Vol.- No.28,[2013])[KCI등재]

  • 염상섭 소설과 식민지 현실의 재현 : 식민지 신문과 정치의 관계를 중심으로 = A Study on Representation of Colonial Reality in Yeom, Sang seop’s Novels3

이수형, (동악어문학, Vol.0 No.69, [2016])[KCI등재]

  • 해방기 염상섭 작품의 여성상 및 여성의 역할 변모 양상 = The Women's image and role change in Yeom, Sang-sup's novel in post-liberation era4

전훈지(Jun, Hoon-jee),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34 No.-, [2016])[KCI등재]

관련영상

  • 권영민의 문학콘서트 - 염상섭의 만세전 - 식민지 현실의 인식

  • 만세전 오디오북

  • 미래엔 문학TV 작가 염상섭


관련장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혜화동성당방학동묘원에 위치한 염상섭 묘소
    말년에 성북동에 살았던 염상섭은 가톨릭에 귀의하여 천주교 혜화동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던 연고로, 사후 혜화동 교회 추모 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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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 위치한 염상섭의 생가와 염상섭 동상
    동상은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염상섭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상가터인 좀요공원 부근에 세웠다. 2009년 종묘광장 정비 사업으로 삼청공원으로 이전했다가 2014년 교보빌딩 앞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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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염상섭 그래프.png

Domain(A) Range(B) 설명 비고
염상섭 만세전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숙박기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두 파산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삼대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취우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무화과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폐허 A는 B를 통해 동인활동을 했다.
염상섭 일제강점기 A는 B의 인물이다.
염상섭 최남선 A는 B의 직장 동료이다.
염상섭 해바라기 A는 B를 저술했다.
염상섭 내간체 A는 B를 활용했다.
염상섭 고백체 A는 B를 활용했다.
염상섭 개인주의 A는 B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염상섭 보수주의 A는 B의 기조를 보인다.
염상섭 자연주의 A는 B의 기조를 보인다.
염상섭 전체주의 A는 B와 거리를 두었다.
염상섭 가정소설 A는 B을 작성했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