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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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오지호는 그당시 표현기법이 변종하와 비슷했던 화가이다.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한때 김주경(金周經) 등과 양화 단체 '녹향회(綠鄕會)'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수법의 유화를 발표하였다. 1935년 무렵부터는 김주경과 함께 프랑스 인상파 화풍의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 한국의 자연미와 풍정미 표현에 열중하였다. 그와 아울러 색채미와 빛의 표현을 본질로 한 순수 회화론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 자비로 출판한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은 한국 서양화사의 인상파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8·15 광복 후 194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과 창설에 참여하여 196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호남 지역 서양화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년기 이후의 작품 활동에서는 인상주의 미학을 소화한, 독자적인 생동적 필치풍부한 색채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말년에는 1978년과 1980년 유럽 여행에서의 감흥을 분출시킨 분방한 필치의 작품도 많이 남겼다.

1960년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초대 작가 및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고, 197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 활동 이외에 자신의 예술 이념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언한 「구상회화 선언」(1959) 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1968년에는 논문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하였다. 1978년에는 전남매일신문사에서 『오지호작품집』을 간행하였다.

1982년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뒤 미망인이 유작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사과밭」(1937년), 「추광(秋光)」(1960년), 「항구」(1980년) 등이 있다.


오지호 작품의 특성

  • 1910년대 고희동, 나혜석, 김관호 등의 주도로 유화가 도입된 이후 1930년대에 이르러서 한국화단의 서양화 분야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어느 누구보다 유화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한 화가라 할 수 있다.
  • 동경미술학교 수학시절, 당시 일본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외광파(外光派)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단순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닌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집하고 발전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오지호는 1930년대의 국내화단을 지배했던 화풍인 향토주의의 중심에 서서 우리나라의 자연이 지니고 있는 밝고 명랑한 풍광을 밝은 색채로 담아냈다. 인상주의만이 미술의 본질이라는 생각으로 평생 인상주의만을 고집했으며,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왜곡된 추상미술은 미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화단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오지호의 구상회화선언)
  • 오지호 작품세계의 중심은 빛에 의한 밝은 색채이다. 특히 색채 중에서도 한국적인 빛을 표현한다는데서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한국의 빛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풍경을 화폭에 담은 화가였으며, 대표적인 예로써 <남향집(1939)>을 들 수 있다. 단순히 인상주의를 토착화 시켰다는 의미를 넘어, 한국 근대화단에 민족의 혼을 불어 넣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1950년대에는 활달한 색채와 필치로써 시골풍경과 화분의 꽃, 온실의 싱싱한 관상식물을 주로 그렸으며, 1960년대 이르러서는 한결 증후하게 이루어진 붓놀림과 주제 대상을 단순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자회색조와 짙은 자주색조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면서, 야산과 어선 및 바다풍경들을 정감있고 친근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면, 청록색의 숲과 가옥의 붉은 지붕색 등이 부드러운 분위기로 색 조화를 이룬다.
  • 오지호에 의해서 표현된 우리나라 빛은 한국적인 색채를 찾은 것이었다. 결국 오지호에 의해 우리나라의 기후와 정서에 맞는 인상주의가 정립된 것이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 그의 작품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그가 보여준 화풍의 일관성이다. 오지호의 후기와 초기 작품을 비교해 보면, 다른 어떤 작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상주의라는 화풍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상파로서 출발하여 거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유일한 작가다.
  • 오지호는 우리나라 서양화의 제 2세대에 속하면서 그 세대의 화가 대다수가 서구의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 혹은 사실주의외광파의 절충양식에 시종했던 것과는 달리 인상주의 및 그 후 모던아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인상주의를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철저히 추구함으로써 한국 인상주의 회화운동의 기수가 되었고, 그 이념을 늘 새로운 눈으로 탐구하고 실형해갔다. 이는 그가 동 시대 화가들에 비해 시대정신과 시각이 앞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 한국적 인상주의 미술의 정착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오지호서구 인상주의 이론을 적극수용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 작가이다.
  • 그는 이론 면에서도 남다른 열의를 가지고 수많은 글들을 발표했으며, 때로는 추상회화현대회화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제시하거나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는 그러한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오지호의 대표작품


오지호의 연보

1905 전남 화순군 동복면 출생, 본명은 점수(占壽)

1921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

1923 고려미술원연구소에 다니며 데생과 유화기법 기초 공부. 김주경과 김용준을 만남

1926 동경미술학교에 김용준, 임학선 등과 함께 입학

1931 동경미술학교 졸업. 귀국 후 제 2회 綠鄕會展(녹향회전) 참가

1935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부임. 7월 김주경과 만주여행. '之湖' 라는 自號를 씀.

1938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 출판(한성도서주식회사 刊)

1948 광주광역시 정착. 10월에 <무등산>등 35점으로 첫 개인전

1949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초빙

1956 조선일보에 <데포르메論> 발표

1965 전라남도 미술대전 창설

1973 현대화랑 개인전. 국민훈장 목단장 수상

1974 3월~11월 부인과 함께 유럽여행

1980 두번째 유럽여행

1982 오지호 김기창 변종하 3인전

1982 5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2월 25일 타계

상훈

년도 상훈
1973 제8회 대한민국문화훈장 모란장
1977 제22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
1985 10월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지호 회고전이 열림
1988 4월광주의 남봉미술관에서 회고전이 개최
2002 문화훈장 금관장이 추서됨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오지호 변종하 오지호변종하와 표현기법이 비슷했던 서양화가이다. 서양화가

참고문헌

[블로그]

『오지호기념관 소장작품도록』(오지호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2005)

『빛을 그린 화가 오지호』(국립광주박물관, 2003)

『한국근대회화선집-양화 3-』(금성출판사, 1990)

『오지호작품집』(오지호유족간행위원회, 1988)

『오지호작품집』(전남매일신문사, 1978)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이진용 기여자 김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