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총국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우정총국은 조선 말, 고종 21년(1884년)에 설치되어 우편(우체) 업무를 맡았던 관청이었다. 책임자 홍영식을 필두로 그 해 음력 10월 1일 우체 업무를 처음 개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청사의 낙성 및 개설 축하연을 통하여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음력 10월 21일 폐지되었다. 폐지된 이후에도 우체 업무는 계속이어졌고, 그 업무가 완전히 마감된 것은 1884년 음력 11월 20일이었다.


우정총국[1]
홍영식[2]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우정국로 59

지도를 불러오는 중...



역사

전의감

원래의 우정총국청사는 1600년대 전의감 건물로 지어졌다. [3] 전의감은 조선시대 의료 기관 중 하나로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다. 궁중 내에서 사용하는 의약재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으로, 특히 조신들의 진료를 전담했다. 왕실을 전담으로 맡은 내의원이 새로 설치된 이후에는 궁궐 밖으로 위치를 옮겨 우정총국청사 위치에 자리잡았다. [4] 전의감은 공식적으로 고종 31년인 1894년에 폐지되었다. 실제 우정총국과 조계사 앞 길에 전의감 터 표지석이 있다.

전의감 터 표지석[5]

우정총국

우정총국은 근대 최초 우체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고종21년(1884년) 음력 3월 27일에 설치되었다. 당시 병조참판이었던 홍영식이 우정총국의 총판으로 임명되었고, 우정총국 직제를 반포하여 조직, 법령 등의 마련을 하였다. 같은 해 음력 10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5문과 10문이 발행되며 본격적인 우체 업무를 시작하였다. [6] 그러나 음력 10월 17일, 개화파들이 우정국 개설축하연을 통해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치개혁을 실시하려 했다. 거사가 일어난 당일 저녁 7시 우정국개국축하만찬회가 우정총국청사에서 열렸다. 개화파의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상재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4일 뒤인 음력 10월 21일, 우정총국은 약 20일 동안의 짧은 기간의 업무를 마치고 폐지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5문, 10문, 25문, 50문, 100문)[7]

애국운동

우정총국 이후 청사의 이용
년도 이용
1897년 한성한어학교
1904년 보안회의 애국운동
1906년 오세창의 야간학교


갑신정변 이후 폐지된 우정총국으로 방치되어있던 청사에 한성한어학교가 들어섰다. 1897년 대한제국 정부가 개교한 한어학교는 중국어를 가르쳐 중국어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1906년 공포된 외국어학교령에 의하여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로 통합되어 교사를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8]

1904년에는 애국단체인 보안회가 우정총국청사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막기 위해 펼친 애국운동이었다.

“당시 보안회라는 우국단체가 있어 이 건물에서 우국 동지 회원들이 모여 시국 강연을 하며 맹렬히 배일(排日) 붐을 일으킴에 나는 어린 마음에도 곧잘 이 회를 찾아가서 창 너머로 귀를 기울이며 주먹을 불끈쥐던 일이 생각난다.” [9]

그 뒤 1906년에는 오세창이 우정총국청사에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그 학교를 뒤이어 1909년 중동학교가 정규 주간학교로서 운영되었다. [10]

현대

그 후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56년 우정사업본부의 전신이 된 체신부의 차관 최재호가 우정총국청사 부지를 매입하면서 옛 우정총국의 모습을 되찾았다. 1972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현판을 작성하였고, 1987년에는 우체국과 전시관 등의 목적으로 다시 운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형을 보존해야 하는 사적(제213호)이라는 점 때문에 우체 업무는 다소 제한되어 기본적인 우편서비스만 가능하다. 10통 이내의 국내외 일반통상 우편물과 경조전보를 부칠 수 있고, 나만의 우표를 제작하거나 우체국 쇼핑상품을 신청할 수 있다. [11] 현재는 느린우체통 서비스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12]
우정총국 느린 우체통[13]

특징

건물 특징

  • 우정총국은 근대식 우정제도를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였던 상징물로, 원래는 여러 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한 채만 남아있다.[14]
  • 이 건물은 도리칸(앞칸) 5칸, 보칸(옆칸) 3칸의 규모이며 남쪽을 향해있다.[15]
  • 내부 천장 중 내진 부분은 소란우물반자로, 외진 부분은 연등천장으로, 바닥은 대리석으로 꾸몄다. [16]
  • 건물의 기둥의 종류는 두가지로 나뉜다. 원기둥은 남쪽의 양 모서리와 북쪽문의 기둥이며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문을 두짝 내었고, 나머지 칸에는 모두 사분합창을 내었으며, 상부에는 모두 빛살 광창을 설치했다. [17]


우정총국 정밀실측 기둥 안쏠림 평면도[18]


  • 지붕에서 합각면이 있는 처마의 아래에는 우정총국현판이 걸려 있다. 처마는 모두 홑처마이며, 단청으로 꾸몄다.


우정총국 현판[19]


체신기념관

우정총국은 현재 “체신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기념관으로서의 업무도 진행하고 있다. 청사 앞 마당의 바닥에는 기념 우표들로 장식되어 있다. 청사 내부에는 집배원복의 변천사, 세계의 우체통, 세계의 우편차 등 전반적인 우정사에 대해 소개한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우정제도를 시작하게 되었던 조미조약이나 보빙사로 파견되었던 일과 관련된 자료와 당시의 집배원복을 전시하기도 한다. 우정제도를 도입하였던 초대 총판인 홍영식의 흉상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우정총국 개국연회장에서의 자리배치도도 볼 수 있다.


의의

갑신정변에 의해 실제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지만 그 자체로 최초의 근대식 우체기관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또한, 폐지 이후, 이는 1893년 전우총국, 1894년 공무아문역체국, 1895년 농상공부통신국, 1900년 통신원 등의 전신이 되어, 근대 우정국의 역사를 이어왔다.


관련 영상

  • 우정문화재 영상[25]


작성자

전세진


출처

  1. [1] 역사문화경관
  2.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3] ‘갑신정변 현장’ 우정총국, 128년 만에 부활 - 경향비즈
  4. [4] 한국우편사업진흥원
  5. [5] 개화 바람에 스러진, 전의감터 - 민족의학신문
  6. [6] 근대 우편은 언제 시작됐나 - 노컷뉴스
  7. [7] 역사문화경관
  8. [8]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9. ‘체신문화’ 1965년 8월호 게재된 농촌사업가 홍병선의 글 중
  10. [9] 한국우편사업진흥원
  11. [10] ‘갑신정변 현장’ 우정총국, 128년 만에 부활 - 경향비즈
  12. [11] 역사문화경관
  13. [12] '성능' 좋은 전국 느린 우체통 6곳 - 중앙일보
  14. [13] 국사편찬위원회
  15. [14] 우정총국郵征總局-대한민국 우편 역사의 시작점 - 매일경제
  16. [15] [문화현장]우정총국, 대한민국 개화기의 상징 최초 우체국 - 천지일보
  17. [16] [역사속의 오늘-4월 22일]최초 근대 통신기관’우정총국’개국 - 미디어인천신문
  18. [17] 국가문화유산포털
  19. [18] 역사문화경관
  20. [19] 역사문화경관
  21. [20] 역사문화경관
  22. [21] 역사문화경관
  23. [22] 역사문화경관
  24. [23] 역사문화경관
  25. [24] 우정사업본부, 우체국 유튜브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