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 나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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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엄마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며 가장 친밀한 사람. 엄마가 해주는 지난 삶에 대한 이야기.

엄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엄마는 내 삶을 전부 지켜봐왔지만, 나는 엄마가 '엄마'가 된 이후의 삶만을 겨우 알고 있다.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았어? 엄마가 내 나이일 때, 20대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딸로 태어나 엄마로 살기까지 엄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이름은 박선주”



박선주에게 삶은 ( 드라마 )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십 대의 감성인 것 같아요.

해가 바뀔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데 나의 생각은 아직도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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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1974년생, 1남 3녀 중 막내, 슬하에 2녀.



박선주 씨의 주요 일과


6:30 고양이 밥 주고 다시 취침

7:20 기상

8:20 출근

17:30 퇴근하고 고양이 밥 주기

18:30 저녁 식사

20:00 실내자전거 운동

22:00 넷플릭스 시청

24:00 취침


고양이 두유

엄마는 이렇게 살아왔어

요약
연도 나이 주요사건
1974년 1세 연기군 전동면에서 태어남
1986년 13세 현재 키 163cm 달성
1990년 27세 작은언니와 함께 천안에서 자취 시작
1996년 23세 대학교 입학, 농협 입사
1997년 24세 한 살 연상의 입사 동기와 결혼, 첫째 딸 출산
2001년 28세 둘째 딸 출산, 내 집 마련


응답하라 1974, 착한 막내딸로

어느 시골 농부의 막내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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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15일 충남 연기군 전동면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는 엄마, 아빠, 언니 둘, 오빠, 그리고 내가 막내. 큰언니랑은 여덟 살, 오빠랑은 다섯 살, 작은언니랑은 세 살 차이가 나는 사 남매였다. 엄마가 결혼을 일찍 하셨다. 스무 살에 결혼하시고, 큰 언니를 낳으셨다. 엄마랑 아빠랑은 일곱 살 차이,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스물여덟 살, 아빠는 서른다섯 살이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1970년대였고, 시골이었기 때문에 당시 부모님은 두 분 다 농사를 짓고 계셨다. 주로 밭농사,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가진 땅이 많지 않아서 다른 사람 땅에 농사를 지으시다가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두 분 다 직장을 다니셨다. 처음에는 두 분 다 공장에 다니시다가 아빠는 농장으로 옮기셨고, 엄마는 계속 공장에 다니셨다.

어릴 때, 유치원이 있긴 했다. 학교 병설 유치원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언니 오빠들 모두 유치원은 가지 못했다. 우리 남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유치원을 다닌 아이가 없었다. 나도 유치원은 건너뛰었다. 어릴 때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는데, 크면서 이사를 가는 집은 많고 오는 집은 거의 없어서, 사람이 차츰 줄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이름은 조혜영. 그 친구도 고학년 때 전학을 갔다.


163cm, 일찍 철든 모범생

초등학교 졸업식. 가운데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학교 다닐 때는, 나름 모범생이었다. 당시는 학교에서 체벌이 용인되는 때였지만 단체 기합 등을 빼고는 선생님께 맞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때는 한 반에 애들이 드글드글 했다. 52명, 53명 해서 한 학년에 4반, 5반 정도. 시골이다 보니 전체 학생 수는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요즘 학교 한 반에 20명, 30명 있는 거에 비하면 교실도 적고 학교 자원 규모가 한정적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성장이 빨라서 나보다 키 큰 남자애들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63cm로, 지금의 키에 가까워졌다. 좋아했던 이성 친구는 없었고, 학교생활의 기억 대부분이 친구와의 기억이다. 한 반에서 다섯 명 정도 해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서 간식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같이 다녔다.

어릴 때 가정환경이 어려웠지만,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생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가 어려웠다.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집안일을 많이 했고, 엄마가 주·야간으로 일을 다니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밥 짓기는 도맡아서 했다. 학교는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까지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동네 애들도 다 그렇게 다녔다. 이후 교통이 발달하면서 버스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탔다.


80년대, TV를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가 80년이었는데, TV를 보면 맨날 대학생들 데모하는 게 나왔다. 그때는 상황을 잘 몰라서, 주변 어르신들이 나쁘게 얘기하고, 또 언론의 자유가 없던 때다 보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인가보다 했다.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냥 ‘아, 저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을 하나 보다’ 생각하다가, 사춘기 이후에 교육을 통해 생각을 바꾸게 됐다. 당시 정권 때문에 선생님들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지는 못했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잘리거나, 권고를 받을 수 있어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하셨지만, 우리가 ‘이게 잘못됐구나’라고 알 수는 있었다. 기억나는 건, 중학교 1학년 때 전교조인 선생님이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기피하고 따돌리고는 했었다. 일 이년 후에 결국 그만두셨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분이 한 일과 사상이 옳더라.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

응답하라 1997, 나의 전성기

성실했던 20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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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대학을 가고 싶었다. 가정 형편상 갈 수 없는 걸 알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상고에 진학했다. 우리 동네에는 고등학교가 없어서, 천안에서 작은언니랑 둘이 살았다. 그때부터 천안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는, 은행이나, 현대, 대우, 삼성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걸 1차 목표로 두고 노력했다.

첫 직장은 삼성 협력사인 한일가전이었다. 가전제품 만드는 회사였는데, 대기업에 가까운 회사기 때문에 생산직보다는 많이 받는 편이었다. 그때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다. 생활하는 데 지장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없고 했다. 그래도 나는 소비가 많은 편은 아니었고 직장 생활 하면서 충실히 돈을 모았다. 그때는 삼 년에 천만 원 모으는 게 이상적인 저축 생활이라고 해서, 급여의 70프로 이상을 저축했다. 사십 만 원 받으면 이십몇만 원 이렇게. 3년 정도 다니다가, 원하는 걸 이루고 싶어서 그만뒀다. 그만두고는 공부하다가 대학 진학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농협 시험을 봐서 농협에 취업했다.


일 년이었지만, 만난 횟수는 36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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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농협 입사 동기로 만났다. 동기라고 둘이 같이 출근도 하고 퇴근도 하고, 그러다 일 년 연애하고 결혼하게 됐다. 기간은 일 년이었지만, 만난 횟수는 363번 정도 될 거다. 그때는 주6일 근무였기 때문에 토요일까지 일하고, 데이트할 수 있는 시간은 일요일이어서 일요일까지 만나고 정말 363번은 만났다.

원래는 26살, 27살쯤에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24살에 결혼하게 됐다. 내 친구들은 23살에 결혼한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 26살, 27살에 했다. 결혼할 때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집에서 결혼에 대해 정한 나이가 없었고, 둘 다 농협에 다니다 보니 조건도 좋았기 때문에 서로 집에서 반갑게 맞아줬다. 연애 전에 회사 행사에서 부모님이 남편을 직접 만났던 적이 있기도 했고. 그때도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기회로 다가온 외환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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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때는 사람들이 다 어렵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대출 금리가 23프로, 예금 금리가 16프로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결혼하고 나서 대출이 없었고 둘이 벌어서 매달 몇백만 원을 저축했기 때문에 목돈 마련에 상대적으로 유리했고, 재산을 증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른 형제들도 빚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집안에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없었다,

큰딸이 태어났을 때,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려고 백일반지와 돌반지를 하나씩만 남겨놓고 모두 팔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금을 샀을 당시가 42000원이었고 팔 때가 58000원이었는데 16000원 불어났다고 굉장히 좋아했었다.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나의 가정 경제에도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땐 그랬지. 지금은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다. 나중에 그 돈이 다른 용도로 쓰였다는 걸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굉장히 분개했다.


애는 둘은 낳아야 하니까

쉽지 않았던 기억들, 엄마가 된 내가 포기한 것.

첫째 딸 조현진

큰딸을 임신했을 때는 입덧을 안 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었고, 둘째 딸을 가졌을 때는 입덧을 많이 해서 고생했었다. 큰딸이 10월생이라서 만삭 때가 여름이었다. 지금 큰딸이 추위, 더위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것처럼, 나도 알레르기가 올라왔었다. 빨갛게 전신으로 퍼지고 하루종일 간지러워서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둘째를 낳을 때는 계획을 세워서 가을에 임신하고 봄에 낳았다.

첫째와 둘째는 네 살 터울이다. 둘째를 대신 키워 줄 사람이 없어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당시 직장 내 육아휴직은 최대 100일까지였는데, 우리는 근무 여건상 80일까지 가능했다. 휴일 미포함이니까 출산 후 100일 정도까지 육아휴직이 가능했다. 그때는 다들 애는 둘은 낳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였기 때문에, 결국 둘째를 낳고 나서는 직장을 그만뒀다.

큰딸을 낳았을 때는 직장을 다니기 위해 고향에 계시는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겼다. 주말마다 아이를 데려와서 보고, 주중에 수요일에 시간을 내서 얼굴 보고 오고. 아이를 데려다주고 남편이랑 다시 돌아올 때는,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우리가 갈 때쯤 되면 아이가 눈치가 빨라서 다 알았다. 엄마가 아이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만 2년 정도 아이를 맡긴 후에는, 친가로 데려와서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시아버지가 큰딸을 굉장히 예뻐해서, 퇴근하고 오면 아이 입에 초콜릿이 잔뜩 묻어있곤 했다. 요즘은 시부모님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뵙고, 친정엄마랑은 2~3주에 한 번 정도 교류하고 있다.

응답하라 2020, 47세의 박선주

일상과 취향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석호필)

한 십 년 전부터 취미로 운동을 해왔다.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넷플릭스를 즐겨 보고 있다. 본 것 중에 재미있었던 건 아웃랜더, 프리즌 브레이크, 슈츠 등등. 흥미진진한 걸 좋아한다. 좋아하는 배우는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 배역을 좋아하기 때문에 배우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배역의 이름만 기억한다. 드라마가 끝나면 잊어버린다.

하루 일과는 단순하다,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는 실내자전거 조금 타고, 집안일하고, 넷플릭스 보고. 집안일은 가끔 딸들이 도와주는 것 외에는 거의 전담해서 하고 있다.

예전에는 옷 스타일에 신경 썼는데, 요즘은 예쁜 것보다는 옷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아하는 음식은 면요리를 좋아하고, 바다 음식보다는 익힌 음식, 고기, 야채, 빵,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스턴트 음식도 좋아한다. 최애 음식은 칼국수.


현재, 과거, 미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십 대의 감성인 것 같다. 해가 바뀔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데 나의 생각은 아직도 똑같다. 내가 이십 대일 때는 사십 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했는데 내가 사십 대가 되어보니 이십 대의 생각이랑 똑같더라. 다만 좀 다른 건, 포기해야 할 거, 안되는 거에 대한 태도다. 이십 대에는 될까 망설였지만 사십 대에는 안 되는 걸 당연히 알기 때문에 포기가 빨라졌다.

‘아, 이거 해볼걸.’하고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공부. 지금도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어떤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내가 써먹을 수가 없으니 굳이 하려고 마음먹지 않는다. 만약 대학교에 다시 간다면 교육 쪽을 전공하고 싶다. 교대도 좋고 사대도 좋고. 누구한테 뭔가를 알려주는 게 좋다. 앞으로의 계획은, 노후 준비를 잘해서 안정된 노후를 가지는 거다. 대출금 등이 어느 정도 정리됐기 때문에, 계획대로 차곡차곡 해나갈 거다. 원래 계획이 애들 학교를 보내고 사십 대 후반부터 노후 준비를 하는 거였다. 애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돈이 분명히 들어가니까. 생각한 대로 됐으니, 지금부터는 노후 준비를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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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원하는 삶은 다들 똑같을 것 같다. 돈 걱정 안 하고,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건강하고. 여행은,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 여행을 다니는 게 우리 부부의 계획이고, 그 목표를 실천하려고 하고 있다. 앞으로도 직장 다니는 동안은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같이, 또는 각자라도 다니고 싶다. 지금 열심히 돈 벌어서 60대 이후에 여행을 가려고 하면 돈과 시간은 돼도 건강이 안 될 수도 있으니, 지금 열심히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년의 직업은 계획해두지 않았는데, 뭔가를 배운 후에 내 능력이 된다면, 봉사활동 같은 걸 하고 싶다. 체질적으로 집에 있는 걸 싫어한다. 더 나이 든 후에도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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