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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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복(1927~2017)

개요

이병복(1927년 3월 25일 - 2017년 12월 29일)은 대한민국의 1세대 무대미술가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연극 카페 '까페떼아뜨르'를 설립하여 소극장 연극을 활성화시킨 인물이다.

생애

1927년생으로 1947년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기념 공연인 오스카 와일드의 <윈더미아 부인의 부채>에서 처음으로 무대를 밟았고, 졸업 후 1948년 12월 오화섭과 박노경 부부가 창단한 여인소극장의 창단 멤버로 동참했다. 여인소극장의 첫 작품은 입센의 <인형의 집>으로 오화섭이 번역하고 박노경의 연출로 1948년 12월에 공연되었다. 이병복은 그때 남편인 헬머 역을 맡았는데 그것이 성인극단의 첫 경험이 되었다. 6·25때 박노경이 타계하고 동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극단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부산 피난지에서 함흥에서 월남한 화가 권옥연과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1957년에 시어머니에게 두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부부가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파리에 간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조각연구소에 가서 조각을 공부하고 또 의상연구소에 가서 패션을 배우고 분주히 뛰어다닌 결과 의상에 대한 학위(디플로마)를 받는다. 귀국 후 옛날 여인소극장 동인들을 수소문했으나 허사로 돌아가자 유학시절에 알게 된 김정옥과 만나 극단을 조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단 자유와 무대미술가 이병복의 제2의 삶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무려 100편에 가까운 작업에 참여하는 동안 극단 자유의 연극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이후 본격적으로 무대미술에 뛰어들어 1세대 무대미술가로 활동했다. 작품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무대의상을 직접 만들고, 특히 한국적인 요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남편인 권옥연 화백과 사라져가는 전통 가옥들을 복원한 무의자 박물관을 짓고 40여 년간 만든 무대의상들을 보관하며 평생을 연극무대에 헌신한 인물이다.

이병복 사진


작품세계

이병복의 창작원리는 집단창작 이외에도 몽타주 사상, 제3의 연극, 총체극, 생과 죽음, 서사극 방식의 활용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자유의 연극은 실제로 삶과 죽음을 내용으로 하면서 여러 광대들이 자유롭게 변신하여 극중 역할을 맡고, 한국적이고도 인간적인 보편성이 있는 행위를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무대로서 관객들에게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이 있기까지 이병복의 무대예술이 보여준 기여도는 실로 창조적이고 전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형과 가면을 연극의 표현매체로 크게 활용한 것, 다양한 종이의상을 개발하고 한국의 전통의상과 전통색상을 변화시켜 무대의상으로 새롭게 정립시킨 것, 각종 소도구들을 무대미술의 개념으로 확장시킨 것, 종래의 장치미술의 개념으로부터 개방적인 개념으로, 연극적 이미지의 개념으로, 나아가서는 전환이 빠른 기동성을 갖는 무대로 새롭게 바꾸어 놓은 것, 전체적으로 과감한 생략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채감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느낌, 즉 인간의 원형성을 발견하도록 해준 것 등이 이병복이 이룩한 무대예술적 성과로 높이 평가된다.

인터뷰

아흔살 "열정소녀" 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

이병복 [李秉福] - 한평생을 연극무대 뒷바라지로 살아온 무대미술가 (인생스토리)

Q. 색깔이 없는 모시나 하얀 종이, 아니면 여러 가지 재료들을 사용해서 무대 의상을 만드셨습니다. 특이한 재료로 만드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없었나요?

A. 저는 색이 있는 것보다 무색이 좋아요. 무색은 색이 없다는 뜻이지만, 저는 거기에 색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극장의 무대장치에서도 배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보다는 깜깜한 그 공간, 거기에 더 얘기가 많아요. 그래서 무색으로, 종이로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전부가 시행착오였어요. 그렇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로소 제가 생각했던 제 색깔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옷감 살 돈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싸게 만들어 볼까 하고 종이를 가지고 덤벼들었어요. 복잡한 작품일 때는 그 많은 의상을 다 만들 재간이 없으니까요. 그랬는데 그게 큰 오산이었던 게, 연기자들이 움직이면 종이가 찢어지잖아요? 그럼 난리가 나죠. 참 당황스럽고 많이 혼났죠. 그렇게 종이를 쓰다 보니 찢어지고, 그만큼 여벌을 많이 만들어야 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종이하고 인연이 맺어져서 그 뒤부터는 상식적인 재료가 아닌 지푸라기, 종이 뭐 기타 등등 저만의 어떤 소재를 가지고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무대에서 조명이 켜졌을 때 종이에 비춰지는 그 결과를 보는 것, 그런 것은 교실에서 선생님을 통해서는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건 현장에서 경험을 통해서 어느 순간에 오는 것이죠. 그런 게 축적이 되니까 아 이거구나! 배운다는 게 바로 이거구나! 하고 깨달았고, 그렇게 비상식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다 보니까 저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게 생긴 것 같아요.

Q.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살아오셨으니 인생이 무척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무대 뒤에서 몇년을 살아오신 건가요?

A. 아, 재미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필사적인 전쟁이에요. 아유, 재미요? 남이 보면 재미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제 딴에는 필사적으로 치러 낸 전쟁이었어요. 우선, 내가 만든 걸 내가 입고 움직이면 몰라도 남이 입고 움직여야 하니 편해야 되죠. 또 관객한테 보여주는 건데 소름 끼치는 어떤 감동이 있어야 되죠. 그리고 작품하고 전체적으로 톤이 맞아야 하죠. 아유, 그거는 전쟁도 그야말로 특공대 전쟁이라고요……. 45년을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무대미술도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새로운 작품을 해보고 싶어서 무대장치 담당하는 분들하고 얘기를 해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됐어요. 그런데 막은 올려야 되겠고, 기존의 상식적인 장치는 작품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러다가 그냥 급한 마음에 덤벼들어서 무대장치랑 데코(장식)를 직접 하다 보니까 그냥 계속해서 하게 된 것이에요. 물론 제가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것은 극단이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죠. 제가 결혼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65년도부터 옛날 식구들 모두 더듬어서 다시 모아 연극을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일부는 이북에 갔거나 가다가 죽었고, 또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친구들은 한국전쟁 때 부역하고 서울에 있기 미안하니까 지방으로 가버리고, 그래서 안 만나지더라고요……. 그래서 새롭게 시작한 게 자유극장이에요. 그런데 그걸 만들어 제가 대표로 있으니까 모든 책임을 제가 져야 하잖아요? 모두를 모아 엮어 나가야 되는, 그런 절실한 책임 때문에 하다가 보니까 북도 치고 나팔도 불고 뒤에서 오만일 가리지 않고 하게 되더라고요.

Q. 한국 연극계에서 무대미술가로서는 산증인과도 같으십니다. 무대미술이나 무대미술가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게 된 건가요?

A. 예전에는 ‘무대미술’이라는 말이 한국에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무대장치, 조명, 의상, 효과, 음향이 아니라 효과였죠. ‘무대미술가’라는 말도 외국에서 수입이 된 언어에요. 거기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자면 길어요. 4년에 한 번씩 프라하에서 전 세계 무대미술가 경연대회가 있어요. 그걸 피큐(PQ)라 그래요.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였던 1990년에 신선희 씨와 둘이서 PQ에 가입을 해보자 해서 그야말로 더듬고 더듬어서 고생을 많이 했죠. 저는 정치적인 건 싫어서 협회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신선희 씨가 우리의 권익을 찾아야 하니까 우선 발기인으로 도장을 찍으라고 해서 찍었고, 그게 동기가 되어 무대미술협회라는 게 생겼죠. 그 뒤 우리도 PQ에 정식 회원국으로 들어갔어요. 그것도 당시 체코가 공산국가이다 보니 갈 수가 없어서 일본을 거쳐 영국에서 연극하는 친구들을 통해서 신청을 했고, 그야말로 턱걸이로 회원국이 됐어요. 그렇게 해서 90년도에 폴란드에서 세계대회가 있을 때 참석을 했죠. 그리고 91년도에 PQ세계 경연대회가 프라하에 있을 적에 제가 작품을 냈는데 거기서 상을 탔어요. 그 바람에 한국에 돌아오면서 무대미술이라는 말이 처음 신문에 나오게 된 거예요. 그렇게 역수입이 된 거였죠. 무대미술이라는 용어가 요새는 일반화되었지만, 그때는 다 장치였어요. 무대장치!

활동내역

작품

  • 1966년 <따라지의 향연>(스칼페타 작, 김정옥 연출) / <신의 대리인>(롤프 호크후드 작, 김정옥 연출)
  • 1967년 <해녀 뭍에 오르다>(오영진 작, 김정옥 연출) / <한꺼번에 두 주인을>(까를로 콜도니 작, 김정옥 연출)
  • 1968년 <피크닉 작전>(죠르주 떼르봐뉴 작, 김정옥 연출) / <살인환상곡>(로베르 토마 작, 유길촌 연출)
  • 1969년 <마리우스>(마르셀 빠뇰 작, 김정옥 연출) /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윌리엄 포크너 원작, 알베르 까뮈 각색, 김정옥 연출)
  • 1970년 <사자(死者)의 훈장>(김지현 작, 김정옥 연출)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
  • 1971년 <아가씨 길들이기>(몰리에르 작, 김정옥 연출) / <그물 안의 여인들>(박양원 작) / <슬픈 카페의 노래>(카를 멕클러스 작, 에드워드 올비 각색, 김정옥 연출) / <푸로랑스는 어디에>(로베르 토마 작, 최치림 연출)
  • 1972년 <세빌리아의 이발사>(보마르세 작, 김정옥 연출) / <따르띠프>(몰리에르 작, 김정옥 연출) / <따라지의 향연>(스칼페타 작, 김정옥 연출)
  • 1973년 <도적들의 무도회>(장 아누이 작, 김정옥 연출)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
  • 1974년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테네시 윌리암스 작, 최치림 연출) / <동리자전>(김용락 작, 김정옥 연출)
  • 1975년 <흐르지 않는 강의 전설>(이기영 작, 이윤영 연출) / <파우스트>(괴테 작, 이윤영 연출) / <여인과 수인>(솔제니친 작, 최치림 연출)
  • 1976년 <대머리 여가수>(이오네스코 작, 김정옥 연출) / <밀란도리나의 여인들>(까를로 골도니 작, 최치림 연출)
  • 1977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드워드 올비 작, 이윤영 연출) / <환도와 리스>(페르난도 아라발 작, 이윤영 연출)
  • 1978년 <그 여자 사람잡네>(로베르 토마 작, 김영렬 연출) / <무엇이 될고하니>(박우춘 작, 김정옥 연출)
  • 1980년 <백양섬의 욕망>(유고 베티 작, 김정옥 연출)
  • 1981년 <엘레펀트맨>(에슈리 몬떼규 원작, 버너드 포메란스 각색, 김정옥 연출)
  • 1982년 <달맞이꽃>(김병종 작, 김정옥 연출)
  • 1983년 <피의 결혼>(페데리코 가르샤 로르카 작, 김정옥 연출)
  • 1984년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김정옥 작·연출)
  • 1987년 <손오공>(조동희 작, 주요철 연출)
  • 1988년 <수탉이 안울면 암탉이라도>(김정옥 작·연출) /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페데리코 가르샤 로르카 작, 김정옥 연출)
  • 1989년 <그리고 그들은 죽어갔다>(김정옥 구성)
  • 1991년 <기도>(페르난도 아라발 작, 김정옥 연출)
  • 1992년 <노을을 나르는 새들>(김정옥 작·연출)
  • 1993년 <햄릿>(셰익스피어 작, 김정옥 연출)
  • 1997년 <그 여자 억척어멈>(김정옥 작·연출)
  • 1999년 <페드라>(라신느 작, 김정옥 연출) / <옷굿-살>
  • 2001년 <화수목나루>(김정옥 작, 김승미 연출)

저서

  • 이병복 무대미술 30년 (한국무대미술가협회 편, 한국무대미술가협회, 1997)

경력사항

  • 1962년 덕성여자대학교 의상미술과 과장
  • 1966년 극단 자유 대표
  • 1966년 한불문화협회 회장
  • 1965년 한불문화협회 사무국장
  • 1976년 까페떼아뜨르 설립
  • 1976년 세계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
  • 1987년 한국무대예술가협회 회장
  • 1987년 한국무대미술가협회 회장
  •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상내역

  • 1965년 동아연극상 수상
  • 1970년 서울문화예술상 수상, 한국연극영화상 특별상 수상
  • 1971년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
  • 1973년 동아연극상 수상
  • 1983년 중앙일보 예술상 수상
  • 1987년 화관문화훈장 수상
  • 1989년 한국일보 백상예술대상 무대미술상 수상, 프라하 콰드리날레(PQ)에서 무대미술상 수상, 사랑의 연극제에서 미술상 수상
  • 1992년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수상
  • 1993년 동랑연극상 수상,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수상
  • 1999년 프라하 콰드리날레(PQ)에서 테마섹션 은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병복 까페떼아뜨르 A는 B를 설립했다.
이병복 극단 자유 A는 B를 만들었다.
이병복 무대미술 A는 B를 한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