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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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이상화는 1901년 5월 22일 대구 서문로에서 출생하였다.

이장가는 대구 근현대 역사의 중심에 앞장섰던 이상화의 집안이다. 이러한 그의 가풍은 저항정신과 관계된다.

민족성이 짙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가슴 속에 저항의 불꽃을 자연스레 피우며 자라 왔다.

1919년 3·1운동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일본 유학 중 관동대지진, 일본의 무참한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였고 이후 계급주의, 저항적 민족주의 시를 썼다.

1925년 김기진 등과 ‘파스큘라’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 70호에 발표했다.

1925~1926년 2년동안 생애 가장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의열단 이종암 사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간사, ㄱ당사건, 노동야학원 한글교육, 교남학교 후진 양성 등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가 실천적인 문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4월 25일 그토록 염원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고택에서 눈을 감았다.

주요 연보

1900~1910년대

년도 내용
1901년 5월 22일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부친 이시우(李時雨), 모친 김신자(金愼子)의 차남으로 출생
1923년 3월 부친 이시우 사망, 상정 12세, 상화 8세, 상백 6세, 상오 4세
1914년 한문수학을 마친 후 1년간 신학문(일어, 산술, 박물 등 초등학교 과정)을 배움
1915년 서울 계동 32번지에서 하숙하면서 정규교육기관인 경성 중앙학교 입학
1917년 경성 중앙학교 3년 수료, 7월 강원도 일대 방랑
1919년 백기만 등과 대구 3 · 1운동거사 당시 학생운동 배후조종, 선전문 등 사 · 배포 등으로 활동함. 사전에 주요 인물이 검속되어 서울 서대문구 냉동 92번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10월 공주 출신 서순애(徐順愛)와 혼인

1920년대

년도 내용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 홍사용, 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 도일하여 동경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 입학

1923년 3월 '아테네 프랑세' 수료, 「나의 침실로」(«백조» 3호) 발표,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학살에 분노, 이듬해 3월 귀국.

서울 가회동 소재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작(詩作)에 전념. 고향 친구 박태원의 죽음을 두고 쓴 시 「이중의 사망」(«백조» 3호) 발표.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 결성

1925년 "파스큘라"가 개최한 천도교기념관에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 낭독. 8월 박영희, 김기진 등과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
1926년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70호) 발표.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 주간.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을 발표. 장남 용희(龍熙) 출생

1928년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당시 상화는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에 있었다). 상화는 이 시기에 자기 집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하였으며, 수많은 항일 인사들이 출입

1930년대

년도 내용
1930년 대구행진곡」(«별건곤(別乾坤)» 10월호) 발표
1932년 담교장이라 칭하던 서문로 집을 처분하고 대구시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전
1933년 8월 경북지사로부터 교남학교 강사 인가(경북학비 제 449호)를 받고 근무. 담당은 조선어와 영어, 이듬해 사임. 「반딧불」, 「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신가정» 10월호) 발표
1934년 차남 충희(忠熙) 출생.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북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 대구시 중구 남성로 35번지로 이주
1935년 시 「역천」(«시원» 2호), 「나는 해를 먹다」(«조강» 2호) 발표, 백부 소남 이일우 사망
1936년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행.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3개월 유람한 후 귀국
1937년 귀국 후 경찰에 구금되어 20여 일 심한 고초를 겪음.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 작사. 대구시 중구 종로2가 72번지로 이주
1938년 태희(太熙) 출생
1939년 6월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로 이사.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와 보관 중이던 고월 유고까지 압수당함

1940년대

년도 내용
1940년 김소운 번역의 «조선시집»(河出書房)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됨
1941년 시 「서러운 해조」(«문장» 25호) 발표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 달성군 화원면 본리리 산 9번지 월성 이씨 가족묘지에 묻힘. 10월 백기만의 발의로 서동진·박명조 설계, 윤갑기 · 김준묵의 참여로 묘 앞에 ‘詩人白亞月城李公諱相和之墓’라는 비가 세워짐

[1]


작품

  • 이상화의 작품은 시기별로 1922년~1923년은 관능적, 낭만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고,

1924년~1926년까지는 경향파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이후는 저항적인 작품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관능적, 낭만적 작품

  • 1922~1923

가을의 풍경(1922), 단조(1922), 말세의 희탄(1922), To-,S.W.Lee.-(1922)

나의 침실로(1923), 이중(二中)의 사망(死亡)(1923), 독백(1923), 마음의 꽃(1923) 이 있다.


경향파적 작품

  • 1924~1926

지반(池畔) 정경(1924), 방문거절(訪問拒絶)(1924), 이해를 보내는 노래(1924), 허무교도(虛無敎徒)의 찬송가(1924),


이별(離別)을 하느니……(1925), 구루마꾼, 엿장수, 거러지(1925), 조소(嘲笑)(1925), 선구자(先驅者)의 노래(1925), 몽환병(1925), 비음(緋音)(1925),

초혼(1925),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1925), 청량세계(1925), 오늘의 노래(1925), 바다의 노래(1925), 금강송가(金剛頌歌)(1925), 통곡(慟哭)(192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조선병(1926), 비 갠 아침(1926), 도쿄에서(1926), 파란비(1926), 달밤, 도회(都會)(1926), 시인에게(1926),

본능의 노래(1926), 지구흑점의 노래(1926), 머-ㄴ 기대(企待)(1926), 병적 계절(病的季節)(1926), 원시적 읍울(悒o鬱)(1926), 달아(1926), 설어운 조화(調和)(1926), 겨울마음(1926) 이 있다.


저항적 작품

  • 1926년 이후

저무는 놀 안에서(1928), 비를 다오(1928), 곡자사(哭子詞)(1929),

대구(大邱)행진곡(1930), 예지(叡智)(1932), 반딧불(1933), 농촌의 집(1933),

역천(1935), 나는 해를 먹다(1935), 서러운 해조(1941) 가 있다.


연도 미상

눈이 오시네, 제목미상, 새 세계(世界), 교남학교(嶠南學校) 교가(校歌), 머나먼 곳에 있는 님에게(번역시),

만주벌, 그날이 그립다, 어머니의 웃음,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청년, 빈촌(貧村)의 밤,

극단(極端), 무제(無題), 쓰러져 가는 미술관(美術館) 이 있다.


동인지

백조에는 이상화의 대표시 '말세의 희탄', '나의 침실로', '가을의 풍경'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개벽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상' 등이 수록되었다.


평가 및 문학사적 의의

  • 퇴폐적인 낭만주의와 계몽주의를 노래하다.
    •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었다.[2]
  • 문화적, 정신사적 전환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다.
    • 이상화가 살다 간 1920년대는 이 땅의 봉건적 유교적 가치 질서에 기반을 둔 전통문화가 와해되고 근대적인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문화적, 정신사적 전환기이다.
    • 따라서 민중은 물론 지식인들에게 삶의 딜레마를 한층 가중시킨 궁핍한 시기라 할 수 있으며, 3·1운동의 실패로 이 땅의 지식인들은 절망과 비애 속에서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 상태에 놓였다.
    •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하며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 하지만, 이상화가 다른 시인들과 달리 민족저항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3]
  • 이상화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다.
    • 1920년대 시단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자생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전통 철학의 토대 위에 그 나름의 시세계를 구축하였다.[4]


연구 자료

단행본 및 학술논문 등의 이상화 관련 연구 자료이다.


관련 자료

매체

축제

공연


문화공간

  • 이상화 고택에서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릴 수 있다.


네트워크 그래프

RDF

주어 목적어 서술어
이일우 이상화 백부이다
김신자 이상화 낳았다
이상정 이상화 형이다
이상백 이상화 동생이다
이상오 이상화 동생이다
이일우 국채보상운동 주도했다
이일우 대구광학회 설립하였다
이일우 우현서루 개관하였다
김신자 애국부인회 이끌었다
김신자 달서여학교 운영하였다
이상정 독립운동 참여하였다
이상백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역임하였다
이상오 '한국야생동물기' 저술했다
이상화 대구 학생봉기 주도하였다
이상화 백조 등단하였다
이상화 말세의 희탄 집필하였다
이상화 단조 집필하였다
이상화 가을의 풍경 집필하였다
이상화 간토대지진 겪었다
이상화 파스큘라 가담하였다
이상화 카프 참여하였다
이상화 개벽 발표하였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집필하였다
이상화 의열단 이종암 사건 참여하였다
이상화 노동야학원 한글교육 참여하였다
이상화 교남학교 후진 양성 참여하였다

온톨로지


출처

  1. 이상화기념사업회 sanghwa.org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상화(李相和))]
  3. 송화영. "이상화 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남대학교, 2007. 대전
  4. 유신지 and 여상임. (2017). 이상화 문학에 나타난 시적 상상력의 근원 연구. 어문론총, 74, 30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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