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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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임규

생애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다. 

출생

 익산 중인 출신으로, 14세에 사서를 통달하는 등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기억력도 매우 좋아 후에 시집을 외워서 집필하고, 독립 선언서 역시 외운 후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일본 유학

 14세부터 익산 군수의 통인(수령(守令)의 잔심부름을 하던 구실아치)으로 지냈다. 군수로 부터 큰 신임을 받던 그는 쌀 700석을 서울로 전달하는 명을 받았는데, 그 쌀이 부패한 관리에세 간다는 것을 안 그는 이 쌀이 팔아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일본에서 게이오의숙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생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쌀 700석을 판 돈 역시 유학생을들 위해 쓰여졌다고 한다) 유학생들을 위해 직접 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어를 가르치고, 대한유학생협회에서 발간한 잡지에 후원도 한다. 경제학을 배운 그가 일본어를 가르친 이유는 그 당시 유학생들은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태극학보 14호 '교수와 교육에 개하여' 참조) 즉,유학생들을 위해 일본어를 가르친 것이다.

최문선과의 만남과 조선광문회

 임규는 유학 도중 최남선(崔南善)과 만난다. 그는 임규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신문관을 열어 잡지 '소년'지를 간행하는 등 여러 서적들을 편찬하였다. 그 때 임규는 그와 함께 '일문역법' 등의 일본어 교재를 만들었다. 
 동시에 최남선조선광문회를 새로운 문화산업도 시작한다. 조선광문회는 국내 지식인들의 집결지였다. 많은 이들이 모여 민족의 장래를 의논하고 토의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임규도 지속적으로 신문관에 드나들면서 여러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戊午元月十二夜 會于新文館) 또한 소실되고 있는 한국의 문헌을 보존하는데 노력하였으며 다른 서적들도 간행하였고, 그 중 하나가 월간지 '청춘'이다. 임규 역시 여러 글을 집필한다.

3.1운동

 3.1운동 전까지 임규는 여러 사립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3.1운동 당시에는 3.1운동을 알리기 위해 일본과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문, 청원서를 돌리는 일을 자청하였다. 조선광문회 사람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였고 일본어에 능통한 임규에게 적격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임규는 선언서 및 청원서를 외워 일본에 건너가 필사하고, 국무총리 집을 방문하여 전달하였다. 곧바로 그는 연행되었고 재판에서도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독립운동과 관련된 여러 외부 소식들을 들으면서 많은 시를 썼다. 그리고 일본의 융화정책으로 인하여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편찬을 위하여

 석방되고 몇 년 후, 임규는 조선의 문화 증진을 위해 설립된 계명구락부라는 조직의 편집부원으로 지낸다. 그곳에서 조선어사전편찬 사업을 하였다.(월간지 '구명' 23호 '조선어사전 편찬의 여섯돌을 마지하면서' 참조) 당시 국어학계는 두개의 학설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어학회이고 다른 하나는 박승빈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어학연구회이다. 임규는 후자를 지지하였는데 주시경의 학설이 채택되어 별 소득없이 사업을 마치게 되었다.

말년

 최규동의 권유로 시 24편으로 구성된 시집 북산산고를 집필한다.
 미륵암이라는 암자에서 한용운, 오세창, 정인보 등과 모여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사후 수상

 1977년 건국포장 추서(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주는 것)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규 한용운, 오세창, 정인보 A는 B와 말년에 미륵암에서 놀았다.
임규 조선광문회, 계명구락부 A는 B에 속해있었다,
임규 북산산고 A는 B를 집필하였다
임규 옛 미륵암 터 A는 B에서 말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한성대 정후수 교수의 偶丁_林圭의_近代文化史的_役割(1993)

생가(집터)

임규 선생은 성북동 미륵당 현재는, 성북로 28길 60이라는 곳에서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북산산고 지필을 미쳤다. 임규 선생은 미륵당에서 한용운을 포함한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류를 논하기도 했다.주거지[1]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김주현 기여:노채환,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