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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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발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야기되어 7년간 지속된 전쟁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참전함으로써 국제전이 되었다. 규모면에서 7년간의 전쟁에 참여한 일본, 명나라 군사는 7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세계사적인 대 전쟁이었다. 히데요시는 분열되어 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조선을 대마도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착각하여 대마도주에게 조선국왕의 내조(來朝)를 요구했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적 관행을 잘 알고 있는 대마도주는 중간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줄타기 외교를 벌였다. 대마도주는 임의로 1587년 국왕사를 파견하여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후 계속 두 차례나 통신사 파견을 간청하였다.

1590년 조선 정부는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파견되었고, 통신사가 함께 온 현소등은 1개월 후에 입경하여 가도입명(假道入明)즉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친다는 통고를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방어준비를 명하였으나 민심의 동요를 이유로 이를 곧 중지시켰다. 이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대처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의 정세파악에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명을 치겠다는 소식을 명나라에 알리는 것을 놓고 고민했다. 그 이유는 조선이 일본과 내통한다는 의혹을 명으로부터 살까하는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1591년 10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에 명하여 나고야에 출정성을 쌓고 징집령을 내려 9개부대 15만 8000명을 조선 침략에 동원하였다. 전쟁의 명분은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지만 이는 단지 구실에 불과했다.

1592년 음력 4월 14일(양력 5월 23일) 부산진이 함락되면서 일본은 조선을 빠르게 수도 한양까지 점령한 사건이 임진왜란이다.

의병장

곽재우(홍의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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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는 현풍의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 삼가, 합천, 창녕, 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경상남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에서 차단하여 호남에 가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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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은 1592년 옥천에서 문인 이우, 김경백, 전승업등과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의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적은수로 많은수를 당해낼 수 없었고 끝내 모두 전사하였다.

김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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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문신, 의병장.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에게 점령된 한양을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군대를 도왔다. 그리고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결 하였다.

고경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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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인이자 의병장.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수군의 활약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 수는 모두 250여척 정도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 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는 원균,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원균의 함대는 거의 전멸 직전까지 갔고,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배와 무기를 모두 버려 단지 4척의 배만 남게 되었다. 결국 조선 수군은 전라좌, 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배가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1592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이순신 함대는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다.

5월 29일에서 6월 10일 사천과 당포, 당항포, 율포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켰다.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고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이 사용되었다.

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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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및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의 주력대를 박살낸 해전.

내용

왜군이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등지에서 연전연패 한 뒤 왜의 수군의 유능한 장수인 와키자카는 정예 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를 침범하였다. 그 뒤 구키라는 수군장수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이들은 7월 8일 한산섬 앞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이순신은 견내량(현 거제대교의 아래쪽에 위치한 해협)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한다. 그리고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인진을 짜서 공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대승을 거둔다.

학익진 전법

학익진.jpg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학익진이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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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원병

1592년 7월 15일에 1차 원병이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한다. 이후 명은 이여송을 보내 2차 원병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여송도 일본진영에서 고바야가와등이 벽제관 남쪽 여석령에 매복한 정예병에게 급습 당한다. 그 이후로 이여송은 일본에게 기세가 꺾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

화의

명군은 심유경을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으나 결렬되는 것이 정유재란의 시작이다.

출처

참고문헌: 한국민족대백과사전:(임진왜란) http://encykorea.aks.ac.kr/

참고문헌: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壬辰倭亂에 對한 韓·日 兩國의 歷史認識(전쟁의 발발) 저자: 정구복

사진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부산진 순절도)http://encykorea.aks.ac.kr/

사진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산도 대첩)http://encykorea.aks.ac.kr/

사진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학익진 전법)http://encykorea.aks.ac.kr/

관련 동영상

관련 동영상
일본에 있던 사야가라는 장수가 조선으로 귀화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저작권은 EBS에 있다.)
임진왜란을 게임에 담아 패러디 한 것으로 단순 재미용이다.(저작권은 tvn에 있다.)
학익진 전법을 설명하는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