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제주 4·3 항쟁

개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학살 사건 중 하나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확인 사망자는 10,715명, 추정 사망자는 6만 ~ 8만명이다.

사건의 발단

배경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만 5천~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기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를 타던 말의 말굽에 아이가 채었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로 하여금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3월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더불어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사건의 시작

제주 4.3 항쟁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 등 350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동시에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양측의 대립은 급속도록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학살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그후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경과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토벌대에 체포된 사람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하였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때 진압 및 학살 행위가 무척이나 야만적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 마을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학살당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결말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령이 해제되며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사후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이 세워졌다. 제주4·3평화공원은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 평화 공원 조성 사업이 이루어 졌다. 2001년 6월 기본 계획안이 확정되고 2002년 부지 매입 및 실시 설계를 완료한 뒤 2003년 4월 3일 기공식을 가졌다.

201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주관행사로 치뤄진다. 기념일의 명칭은 '4.3희생자 추념일' 이다.


관련 작품

함세덕 - 산사람들

김석범 - 까마귀의 죽음

현길언 - 우리들의 조부님

이산화 - 한라산

현기영 - 순이삼촌


영화

오멸 - 지슬

임흥순 - 비념

구자환 - 레드 툼

이상우 - 작은 연못

관련영상

  • 제주 4.3 항쟁 요약영상


외부링크

제주4.3평화공원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제주 4·3 항쟁 이승만 제주 4·3 항쟁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시행됐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유튜브, 나무위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문성철

기여자: 조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