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연극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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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40년에 국민연극을 위해 만들었던 조선연극협회가 1942년 7월 26일 조선연예협회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단체로 일제가 조선의 연극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통제기관이다.

상세 소개

연원 및 변천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국가총동원법안(國家總動員法案)을 만들어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의 표어를 내걸고서 이른바 신체제운동(新體制運動)을 전개하였다.

연극의 경우 ‘국민연극(國民演劇)’이라는 국책극(國策劇)을 강요하고, 그 추진모체로 1940년 12월 22일에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를 만들었다. 국책극을 시행하려면 우선 연극인들을 하나로 묶는 조직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연극협회 초대회장은 극작가 이서구(李瑞求)가 맡았고, 상무이사는 김관수(金寬洙), 이사는 박진(朴珍)·유치진(柳致眞)·최상덕(崔象德), 그리고 감사는 심영(沈影) 등이었다. 이 협회는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극단들을 산하에 끌어들였는데, 중앙에 있던 극단 중 아랑(阿娘)·고협(高協)·청춘좌(靑春座) 등 17개, 평양에 있던 극단 중 국민좌(國民座) 등 3개, 신의주의 신생좌(新生座), 강계의 만월무대(滿月舞臺), 그리고 신천의 대륙좌(大陸座) 등 23개의 극단이 가입하였다.

이러한 조선연극협회는 1942년 7월 26일에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조선연예협회를 흡수하고, ‘극문화의 새로운 출발과 연극·연예 양 단체의 병합’을 내세워 조선연극문화협회로 재탄생되었다.

초대 회장은 일본인 가라시마[辛島驍]가 맡고, 이사에 서항석(徐恒錫) 외 몇 명, 상임평의원에 유치진 외 몇 명이 선출되었다.

1942년 9월에 조선총독부와 매일신보사 등의 후원을 받아 개최한 제1회 국민극경연대회에서 아랑·성군(星群)·현대극장(現代劇場)·고협·청춘좌 등 유수한 극단들이 국책극을 가지고 참가하였고, 제2·3회 대회도 비슷한 규모였다.

한편, 이 협회는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서 해체되었다.

조선연극문화협회가 한 일

조선연극문화협회는 조선에 있던 모든 연극 단체를 흡수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제가 이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연극단체에게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한 이유로 이 단체에 따르지 않는 극단들은 사라지거나 극단활동을 접게 되었고 이 단체를 따르기로 한 단체들은 일제가 원하는대로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는 국책극 또는 번안극을 공연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연극문화협회는 전 연극인의 연성회, 연극문화전람회 개최, 연극전문지 간행, 조선연극사 편찬, 연극경연대회 등을 계속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직속으로 이동극단을 두어 농촌·산촌·어촌 등의 지방순회공연도 가졌다. 협회가 애초 내세운 여러 가지 거창한 계획을 모두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연극경연대회만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연극인들을 통제한 방법

조선연극문화협회의 회원은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되어있었고 그외의 연기나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기예증을 발급하여 관리하였는데 이 정회원증과 기예증은 당시에 일제가 했던 만행중 하나인 강제징용과 정신대 차출을 일정기간 당하지 않게 해주는 일종의 징표같은 역할을 했다. 일단 이 회원증과 기예증을 받으면 일정기간동안 영장이 날아오지 않았다가 기간이 지나면 총독부로부터 영장이 날라오게되어있는데 이때 이를 막기 위해서는 회원증을 들고 재심을 받아야 했다. 이때 재심과정에서 총독부가 재심청구자의 그동안의 행적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 의심쩍은 상황이 있거나 일제에 저항한 것이 드러나면 가차없이 징용이나 정신대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연극인들은 일제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함세덕과 같은 실력있는 작가들은 형식적인 서류 심사만으로도 징용보류가 되었다.

참고문헌

극작가총서 3 함세덕편 저자:한국극예술학회 총서발간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최성훈
기여자: 문성철
기여자: 조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