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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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만(趙容萬, 1909년 3월 10일 ~ 1995년 2월 6일)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기자, 문학가다. 호는 아능(雅能)이다.

소설가 겸 영문학자. 문단 데뷔 이후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매일신보》기자, 《코리아 타임스》주필을 거쳐 고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문필활동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초종기(初終記)》 등이 있다.


약력

학력사항

  • 학력사항
  •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 경성제국대학교 - 영어영문학


경력사항

  • 경력사항
  • 국도신문주필
  • 코리아타임즈 주필


생애 및 활동사항

생애초기

1909년 서울 출생. 1918년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 후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학부에서는 법문학부 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1931년 본과 2학년 때 선배 유진오의 주선으로 『비판』에 「사랑과 행랑」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방황」을 『코리아타임스』에 게재했다. 이 작품은 모든 것에 회의적인 ‘나’의 두서없는 정신적 방황과 이에 개입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그 여자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친구의 누이로 오빠가 죽은 뒤 마르크스 걸로서 지하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형사에게 잡혀가면서도 태연하고 당당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방황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용만은 이 작품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두 청년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자본주의 모순을 고발하는 「사랑과 행랑」 등과 같은 작품으로 당시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었다. 1932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12월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1933년 2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으며, 4월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영어 강사를 겸직했다. 8월 문학동인 구인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5월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2월 물러났으며, 그 뒤 4개월 만에 재입사했다. 1942년 11월 논설위원, 1943년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 1944년 논설부 차장(참사)을 지냈다. 그는 1940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했고, 1941년 3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새학년부터 고쳐지는 국민학교」에서부터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노골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국민문학』에 「배 안에서」와 「모리군 부처와 나」, 1944년에는 희곡 「광산의 밤」을 일본어로 발표하는 등 친일 국책문학에 앞장섰다. 『매일신보』 기자로 지낼 때 친일문학인들이 결성한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도 참가했다.



해방 이후

해방 후에는 코리아 타임스의 주필로서 영자신문과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1953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영미의 작품 번역에 전념했다. 1974년 그의 최초의 단편집 「고향에 돌아와서」와 1982년 단편 「구인회를 만들 무렵」, 1986년 「영결식」을 발표하며 정년 후에도 의욕적인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희곡 「가보세」(1931)와 단편소설 「초종기(初終記)」(1940) 「북경의 기억」(1941), 「불국사의 여관」(1943) 등이 있고, 소설집은 『고향에 돌아와도』(1974), 수필집은 『밤의 숙명』(1962), 『청빈의 서』(1969), 『세월의 너울을 벗고』(1982), 연구저서로는『육당 최남선』(1964), 『일제하 한국신문화운동사』(1974) 등을 간행했다. 1995년 2월 16일 사망했다.



사후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됐다. 2002년까지 밝혀진 친일 작품 수는 소설 3편과 기타 기고문 5편, 총 8편이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들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조용만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5∼4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의의와 평가

그가 우리나라 문학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주지주의 시의 도입과 그 창작,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시학(詩學)의 정립을 위한 노력, 자연발생적인 시를 거부하고 의식적인 방법에 의한 제작의 강조, 음악이나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지성의 강조, 민족 및 사회현실의 수용과 모더니즘의 극복, 그리고 전체시의 주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저서(작품)

이 두 사람

단편소설. 1972년 《현대문학(現代文學)》 6월호에 발표.

1947년 광복후의 어느날 주인공 오재는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죄인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 반민특위 위원장이 자기의 둘도 없는 옛 친구 시당이다. 이야기는 오재와 시당의 일을 말하기 위해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재는 손병희 ·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등, 당시의 민중으로부터 영웅적인 존재가 되었다. 바로 그 무렵 시당은 시골에 파묻힌 재사로서 결국 오재의 성의 있는 알선으로 연희전문의 한문(漢文) 선생으로 취직을 하게 되면서 서울의 우국지사들과 교유를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오재는 우국지사 성화에 못이겨 신문사를 경영하게 되는데, 불과 몇 개월 못가 망하여 알거지가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서재에 은거하면서 저술업으로 간신히 연명해가나, 워낙 많이 걸머진 빚 때문에 끼니가 막연해진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조건에 있으면서도 오재는 실직(失職)한 시당을 정성껏 돌보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오재가 총독부의 관리가 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나돌게 된다. 이에 격분한 것은 시당뿐 아니라, 그밖에 오재를 아끼던 모든 친구들이 흥분하여 오재의 빈 집으로 찾아가 침을 뱉는 등, 이로써 오재는 그들 우국지사들의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시당은 무사히 광복을 맞는다. 결국 시당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오재는 죄인이 되었으나, 오재의 꾸준한 인간애에 감동된 시당은 그를 반민특위의 재판에서 빼돌리려고 하나, 오재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거절하고 끝내는 마음으로 재판장으로 나간다는 줄거리다.



전기(轉機)

대표적 단편. 1973년 《현대문학》 4월호 발표.

1905년 있었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치른 날의 궁중(宮中)이 그려지면서 춘곡(春曲) 고희동(高羲東)이 등장한다.

고희동은 당시,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이다. 그는 천하무도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총칼을 들고 궁중에 침입하는 것을 직접 목도했으며, 한규설(韓圭卨)의 처절한 반항과 이완용(李完用)의 매국, 일진회의 정체, 민영환(閔泳煥)의 분사 등 이 모든 것을 목도한 증인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사태에 관리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한 춘곡은 당시 궁중의 외국인 관리의 한 사람이었던, 에밀 마텔을 찾아가서 나라의 장래와 자기의 신상에 대해 상담하고자 한다. 물론 마텔은 춘곡의 법어(法語)학교 시절의 선생이기도 한다.

처음 춘곡은 마텔에게 나라가 망하였으니 자기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텔은, 그러한 태도가 동양인의 소극적인 행동양식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때일수록 자기의 일에 대해서 성심껏 하여 힘을 키워야 된다고 역설한다. 여기에서 춘곡은 일단 중이 될 생각은 버렸으나,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짓지 못한다. 이때에 마텔 부인이 옆에서 춘곡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권한다. 물론 이런 말이 불쑥 튀어 나오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미 마텔 부인은 춘곡에게 그림의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춘곡은 이에 자극되어 이윽고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이 소설의 앞의 〈이 두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재를 1900년대에 국란(國亂)에서 취함으로써 결국 그의 이전의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을 보여 준다. 즉 국란 속에서의 지식인의 행동에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개인(個人)과 사회(社會)라는 이원적(二元的)인 현상의 갈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이 두 작품을 쓴 시대적 배경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이로써 그의 작품경향은 다소의 수정이 있는 것인 것 같다.



작품 목록

조용만의 작품목록
  • 배추이삭
  • 가보세
  • 사랑과 행랑
  • 방황
  • 희희
  • 연말의 구직자
  • 문예시평
  • 나마의 제 일야
  • 배신자의 편지
  • 신춘소설총평
  • 청엽의 우울
  • 윤석중씨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와

김태오씨의 ‘설강동화집’

  • 신숙주와 그 부인
  • 선배에게
  • 이태준씨 단편집 ‘달밤’을 읽고
  • 기술의 문제
  • 문사와 교양
  • 문장브터
  • 번역문학시비
  • 상극과 수상자
  • 자연과 작위
  • 피란델로의 언
  • 고급문예잡지대망
  • 비평의 재건
  • 작가 장혁우
  • 조선의 문단논객을
  • 한개의 고언
  • 문학과지성 독후감
  • 이효석씨의 작품집 ‘벽서’
  • 초종기
  • 별장
  • 매부
  • 북경의 기억
  • 여정
  • 만찬
  • 船の中
  • 桑君夫妻と僕と
  • 동전
  • 역사창조의 와중에서
  • 문학개론
  • 고우사-작가 효석의 풍모
  • 비오는 밤
  • 문화의 재건
  • 한국문학의 세계성
  • 지옥의 한 계절
  • 삼막사
  • 카나리아
  • 서정가
  • 바보 !
  • 문예사조의 의의와 분류
  • 잠재의식‧성(性)신앙의 문학
  • 단층
  • 사회의식과 종교의 문학
  • 표정
  • 속초행
  • 의식의 흐름의 문학
  • 복녀
  • 육당 최남선
  • 서귀포 괴담
  • 삼청공원에 나타난 두보
  • 초복날
  • 고향에 돌아와도
  • 노담
  • 이 두 사람
  • 문학개론
  • 전기
  • 약수터
  • 묘비
  • 고향에 돌아와도
  • 일제하 한국신문운동사
  • 암야
  • 아버지의 재혼
  • 빈대떡
  • 언덕길에서
  • 최악의 무리
  • 영결식
  • 어느 죽음
  • 스피노자의 제자
  • 신문인 베델
  • 88올림픽
  • 구인회 만들 무렵
  • 이상과 김유정의 문학과 우정



친일작품목록

<친일작품 목록>

  • 1941.7 <만찬>(소설.춘추)
  • 1941.12 <근로봉사일지>(조광)
  • 1942.7 <배 안에서>(소설.국민문학)
  • 1942.7 <차중에서 생긴 일>(동양지광)
  • 1942.12 <삼군 부처와 나와>(소설.국민문학)
  • 1944.1 <전국 현단계와 국민의 결의>(국민문학)
  • 1944.3 <도시 소개와 그 의의>(신시대)
  • 1944.6 <흑령탄갱의 감상>(신시대)



구인회

1930년대 초반 문단에서 맹위를 떨치던 리얼리즘 문학만주사변과 경제 공황 그리고 카프 맹원 검거 등으로 침체기에 빠져들자, 모더니즘은 한국 문단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다. ‘구인회’는 국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모더니즘 중심의 문학 모임이다. 그러나 구인회는 발족 당시 문인들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한 이종명과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감독을 겸하고 있던 김유영이 순수 예술에 뜻을 같이하는 이태준, 이무영, 이효석, 유치진,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을 모아 구인회를 꾸린 것이다.

영화감독과 극작가 등의 가담으로 알 수 있듯이, 구인회는 문학만이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친 관심을 내포한 채 출발한다. 구인회의 아홉 회원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정치성이나 목적성에 회의를 품고 있던 만큼 조직의 경직성에서 탈피, 강령과 규약 없이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모임을 이끌어간다.

구인회는 이후 몇 차례 회원 교체를 거치면서 점차 시인과 소설가, 비평가들로 이루어진 문학 모임으로 성격이 바뀐다. 결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족 당시의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 세 사람이 나가고 박팔양, 이상, 박태원이 들어오며, 조금 지나서 다시 유치진, 조용만이 나가고 김유정, 김환태가 들어와 비로소 회원이 확정된다.

구인회는 다달이 한두 번 시 낭독이나 문학 강연회를 하는 정도로 모임을 꾸리고, 기관지 《시와 소설》도 단 한 번밖에 펴내지 못한다. 지난날 잡지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던 유파들에 비하면 구인회는 이념적 구심점도 없고 활동도 미미해 지리멸렬한 단체로 비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나머지 의견 불일치로 몇 번의 회원 교체가 있었을망정, 이상과 김유정의 죽음으로 불가피한 결원이 생길 때까지 이 모임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예고하는 역량을 드러내며 아홉 명의 정원을 철저하게 지켜나간다.

박승극이 <동아일보> 1934년 6월 5일 자에 기고한 「문예와 정치」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의 결성의 근거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명확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말하자면 회원을 얽어매는 이념과 목표가 따로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정신적 부담을 덜어줘 아홉 명의 민감한 예술가로 하여금 제 빛깔을 잃지 않고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만든 측면도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해체 이후까지 구인회 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행적이 한국 문단사에 여러 갈래로 자취를 남긴 것으로도 입증된다.

구인회는 초기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구심점 구실을 한다. 그러나 구인회 회원 모두를 모더니스트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구인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수법은 회원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해 “주지주의,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심리주의, 신감각파 등 잡다한 경향”을 포괄한다. 구인회는 이런 여러 경향에 그치지 않고 때로 전통적 소재와 모더니즘 기법을 접목시켜 갖가지 형태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펼치며 모더니즘 문학의 경계를 한껏 넓히는 한편, 어찌 보면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인회
창립 회원 김기림 · 이효석 · 이종명 · 김유영 · 유치진 · 조용만 · 이태준 · 정지용 · 이무영
대체 회원 박태원 · 이상 · 박팔양 · 김유정 · 김환태



관련자료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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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문인단체 구인회, 상상력 더해져 뮤지컬로 탄생


관련 서적

조용만. (1992).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 조용만 소설집. 窓.

황인용. (2012). 조용만의 ‘멋이라는 것’. 5. 문예운동사.

조용만. (2010). 조용만 작품집. 지식을만드는지식.

趙容萬 著. (1986). (趙容萬.회고수필집)세월의 너울을 벗고. 敎文社



관련 학술자료

오태호. (2010). 조용만 소설에 나타난 1930 년대 지식인의 자의식 연구. 국어국문학, (155), 303-328.

박제홍, & 김순전. (2009). 조용만의 문학과 삶. 한국일본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230-235.

윤상현. (2014). 조용만의 [배 안에서] 에 나타난 근대적 남성상 희구와 좌절: 역사적 인물인 김옥균의 시대적 변용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34, 207-228.

김미지. (2009). 한국 근대문학사와 ‘문학인’ 조용만의 자리 - 해방 이전 작품들을 중심으로 -. 겨레어문학, 43, 5-33.



관련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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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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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조용만 문학가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소설가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소설 A는 B을 집필한다
조용만 초종기 A는 B를 저작하였다
조용만 구인회 만들 무렵 A는 B을 저작하였다
조용만 문학연구 A는 B를 수행하였다
조용만 이상 A는 B과 친밀하다
조용만 구인회 A는 B의 소속이다
조용만 영문학 A는 B을 전공하였다
조용만 영문학자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박태원 A는 B과 친밀하다
조용만 심리주의 A는 B의 경향이 있다
조용만 고려대학교 A는 B의 교수이다
조용만 기자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매일신보 A는 B의 소속이다
조용만 김기림 A는 B와 친밀하다
조용만 친일문학인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친일문학인 42인 명단 A는 B에 포함된다
조용만 조선문인협회 A는 B의 소속이다
조용만 논설위원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교수 A는 B에 속한다
조용만 영문학 A는 B을 강의한다



네트워크 그래프

조용만시각화.PNG


  • 조용만에 관련된 개체들을 네트워크 그래프로 시각화한 이미지 파일이다.

“Network graphs in this work were created using Vis.js Network Library (Copyright (C) 2010-2017 Almende B.V. )

and MakeGraph Simple Ontology Script Converter (Copyright (C) 2017-2018 Center for Digital Humanities, AKS).”



작성자 및 기여자


참고문헌 및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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