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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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영(18??~192?)

생애

최사영 인물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사진이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대한제국시기와 일제강점기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부를 축적하여 지역 주지로서 많은 단체를 후원하였고 지역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최사영은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최사영고택의 건립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최사영고택 건립 외에도 많은 부를 축적한 재력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고택 건립 이전부터 삼개(현재의 마포동 236번지)에 거주하면서 지역유지 또는 신사로서1920년대 후반까지 생존, 활동하였다. 경제적 활동도 활발히 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고 일제 초기인 1911년에는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권 상실 전에는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도 했고 국권 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유지로서 수해를 당한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

최사영이야 말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단체를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백성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인다.

활동내역

경제적 활동

  1. 대한제국 시기에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陳田)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다.
  2.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에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사회적 활동

  1. 대한제국 시기의 품계가 정3품까지 올랐다.
  2.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추원의 의관을 지냈다.
  3. 국권상실 직전인 1910년 8월 26일에 6등(六等)으로 서훈(敍勳)되어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4. 국권상실 전에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였다.
  5. 국권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 유지로서 수해를 당하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하였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사영 노블리스 오블리주 최사영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마포 최사영 고택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