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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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개요

1925년에 결성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카프(KAPF)'라고도 한다. 이것은 에스페란토식 표기인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머리글자를 딴 약칭이다.

3.1운동 이후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을 민족해방운동의 본 문인들이 문학도 프롤레타리아 해방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문예운동단체이며 소련의 라프(RAPP), 중국의 중국좌익작가연맹, 일본의 나프(NAPF)와 뜻을 함께하는 단체이다.

상세소개

성립과정

1921~22년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민중문예·생활문예 등의 필요성과 러시아의 새로운 문학론을 소개하는 글이 많이 발표되었는데, 이 글들은 이전의 낭만적·퇴폐적 문학에 대한 비판과 문학의 계급성에 대한 소박한 인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1992년 9월경에 조직된 염군사에 의해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염군사는 '무산계급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을 강령으로 내세웠고, 중심인물로 당시 사회주의의 정치운동에 깊이 관여하던 이호·김두수 외에도 이적효·송영·최승일·박용대·김영팔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염군사는 진보적 사회운동에 뿌리를 둔 소규모적·초보적인 단체로서 미발간 잡지 <염군>을 제2호까지 편집한 것 외에는 뚜렷한 활동이 없었다. 1923년 문학의 계급성을 인식하게 된 중견 문인들은 염군사의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에 영향을 받아 파스큘라(PASKYULA)라는 새로운 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의 중심인물로 김기진·박영희·김복진·이상화·김형원·이익상 등이 참여했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이라는 취지를 내세웠다. 이 두 단체에 참가한 문인들과 이와 비슷한 경향의 작품활동을 하던 이기영·조영희·한설야·최서해 등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계의 조직 통합을 계기로하여 1925년 8월경 카프를 결성하게 된다.

활동

카프는 "우리는 단결로서 여명기에 있는 무산계급 문화의 수립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내세웠으나 이는 염군사의 강령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단지 두 단체의 통합이 이루어졌을 뿐 문예운동단체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펴지 못하고 임시총회를 열거나 준기관지 <문예운동>을 발행하는 정도였다. 이 시기에는 구체적인 작품보다는 문예운동의 이념과 방법에 대한 논의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김기진과 박영희가 벌인 '내용형식논쟁'은 카프조직 내의 최초의 논쟁이다. 그외 <염군>에 발표된 몇 편의 작품부터 1927년 이전까지 발표된 작품을 '신경향파 문학'이라 하는데, 김기진·박영희·이상화·김창술·박팔양 등의 시, 최서해·조명희 등의 소설, 김영팔·김우진 등의 희곡이 여기에 속한다.

1920년대 중반까지 여러단체로 분리되어 있던 사회주의운동단체는 1926년 11월 '정우회선언'을 기점으로 방향전환론이 전개되고 문예운동에서도 1927년초 방향전환이 논의되게 시작했다. 1927년 9월 총회에서 "우리는 무산계급운동의 일부분인 무산계급 예술운동으로써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 관념의 철저한 배격, 전제적 세력과의 항쟁, 의식적 조성운동의 수행을 기한다"라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했는데, 이는 과거의 막연한 민중주의로부터 벗어나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중앙위원회 아래 서무부·조직부·교양부·출판부·조사부 등을 두는 조직을 결성하고, 김복진·박영희·조명희·한설야·최서해·윤기정·이북만·조중곤·한식·홍효민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이와 같은 조직편성은 예술조직의 특수성보다 정치조직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며 예술에 관심 없는 청년들도 대다수 가입시켜 정치적 대중조직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서울에 있는 본부 외에 도쿄·개성·수원·해주·평양·간도·임실·남원 등에 지부를 두었는데 이러한 조직개편에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핵심 지도자인 박영희는 "조직과 예술을 일원론적으로 통일시켜 예술가의 운동단체를 건설한 것"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도쿄에서 활동하던 '제3전선파'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즉 홍효민·한식·이북만 등의 소장파 문인들은 박영희의 주장은 사회주의운동 전과정에 대한 몰이해와 예술 전체가 아닌 문학영역에만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박영희는 회의를 느껴 1933년 카프를 탈퇴했다.

1927년 목적의식적 방향전환을 겪으면서 카프에 주어진 과제는 문학운동의 구체적 실천이었으며, 이는 문학운동의 민중연대성과 창작방법에 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전자는 예술대중화론으로 후자는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으로 제기되어 문인들간에 논쟁을 벌였다. 방향전환 이후 카프에 의해 전개된 문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 문학)이라 하는데, 이는 신경향파문학을 발전시킨 형태이다. 특히 이 시기에 발표된 조명희의 <낙동강>은 학자에 따라 신경향파 문학이나 프로 문학에 포함시키거나 양자의 중간에 두기도 한다. 이어 발표된 이기영의 <원보>·<제지공장촌>, 송영의 <석공조합대표>, 한설야의 <과도기>등의 소설은 농민소설과 노동자소설이 경향문학의 중심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문학 외에 연극·영화 부문의 활동도 두드러져 극단 '백의극단'과, 영화운동단체 '신흥영화동맹'이 창립되었다. 1929년경부터 사실상 카프의 주도권은 도쿄에서 귀국한 임화·김남천 등의 소장파에게 넘어갔으며, 이들은 김기진의 대중화론에 맞서 문학의 볼셰비키화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큰 성과가 없자 1930년 4월 중앙위원회를 열어 조직개편을 단행했는데, 중앙위원회 아래 서기국·조직부·출판부·교양부 외에 기술부를 두고 기술부 아래 문학·영화·연극·미술·음악 등의 분야별 분과를 두었다. 이는 문학분야에 치중한 활동을 전 예술분야로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중앙위원도 박영희·임화·윤기정·송영·김기진·이기영·한설야·권환·안막·엄흥섭 등, 연극분야에 김기진·신석초·안막 등, 미술분야에 강호·정하선·이상대·안석주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맹원들의 활동이 겸임·중복됨에 따라 1931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단체협의회로 개편, 그 아래 조선프로 작가동맹·조선프로극장동맹·조선프로영화동맹·조선프로미술가동맹·조선프로음악가동맹과 서기국을 두자는 재조직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1931년 영화 <지하촌> 사건으로 인한 제1차 검거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재조직안은 중지되었다. 이 시기에 카프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즉 초기의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입각한 문화운동은 부분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주의적 편향과 도식성을 드러냈는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을 계기로 문학을 단순한 계급의식의 반영으로만 보지 않고 미적 반영론을 수용하게 되어 문학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직 내에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러한 전환을 잘 보여준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이기영의 소설 <서화>이다. 카프에 참여한 문인들은 <서화>를 평가하면서 과거의 카프를 반성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전환을 준비했고, 이는 이기영의 <고향>과 한설야의 <황혼>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 외에 농민문학과 프로 문학의 관계를 둘러싼 안함과 백철의 논쟁, 카프조직과 동반자작가의 관계를 둘러싼 동반자문학논쟁이 진행되었다.

해체

일제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진보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해 카프의 연극단체인 신건설의 전단을 가진 학생이 전라북도 금산에서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1934년 제2차 검거를 벌였다. 2차 검거는 1차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대대적이었으며 이에 몇몇 카프 맹원들이 맞섰으나 대다수가 검거되어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카프 내에서는 해체에 찬성하는 '해소파'와 반대하는 '비해소파'간의 심한 대립이 일어났고, 마침내 1935년 5월 주도세력인 임화·김남천이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10년에 걸친 카프의 활동은 마감되었다. 프로 문학은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지 못했고, 이론적 한계를 드러내 동요되었으나, 프로 문학의 계승·발전을 모색하는 노력으로 해방직후 좌익문인들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해체 이후

카프 해체 이후 대부분 전향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고발문학론, 풍자문학론, 휴머니즘론 등 다양한 사조와 이론이 소개되고 전개되었다. 하지만 1940년대를 지나면서 전향한 작가들의 대부분은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친일문학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라는 사회주의계열 예술단체를 결성한다. 그리고 미군정의 탄압이 심화되자 대부분 월북한다.

의의

10년간 지속된 카프는 비록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으나 한국문학사에서 문화예술의 민중성,계급성,당파성에 역점을 두고 노동자계급 문예의 필연성을 선포했으며, 변혁운동에의 의식적 복무를 선언하고 수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연혁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하에서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적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의 파고를 배경으로 조선에서도 공산주의운동이 발흥하였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고양 속에서 카프는 소련의 라프와 일본의 나프에 영향을 받아 프롤레타리아계급운동의 일환으로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초 일본에서 신사상의 세례를 받은 유학생 김기진을 비롯한 박영희·이상화 등에 의하여 예술지상주의를 반대하는 ‘생활을 위한 예술’이 소박하게 주장되었으나, 아직 관념적이고 심정적인 감정토로에 지나지 않았다.

1922년 9월경에 조직된 염군사와 문학가단체 ‘파스큘라’(PASKYULA : 김기진·박영희·김복진·김형원·안석영·이익상·조택원·이상화 등의 두음자를 따서 명명)가 당시 국내 사회주의운동단체와 관련하여, 그리고 일본 프로문학의 영향 아래 카프로 통합된 것은 1925년 8월경이었다.

관련 인물

성명 설명
김기진.JPG 김기진 1903년 충북 청주 출생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카프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박영희.jpg 박영희 일제강점기 조선의 친일 사회주의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이다. 1920년대 대표적인 카프 문학가로 활동했지만 1933년 카프에서 탈퇴, 이후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임화.JPG 임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이며 문학평론가, 정치가이다. 카프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남조선로동당 창당 활동등에 참여했다.
조명희.jpg 조명희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신경향파 작가로 두각을 나타냈고 카프의 결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작가로 활약하였으며, 단편집 낙동강을 남겼다.
송영.jpg 송영 1922년 조직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연극단체 염군사에 가담하였고, 이후 대표적인 카프 계열의 연극인으로 꾸준히 활동했다.

김기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영희 출처[위키백과] 임화 출처[위키백과] 조명희 출처[위키백과] 송영 출처[교보문고]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카프 사회주의 혁명 A는 B를 위한거다
카프 프롤레탈리아 해방 A는 B를 위한거다
카프 라프 A는 B와 비슷하다
카프 나프 A는 B와 비슷하다
카프 중국좌익작가연맹 A는 B과 비슷하다
카프 김기진 A는 B가 이끌었다
카프 염군사 A는 B의 영향을 받았다
카프 파스큘라 A는 B의 영향을 받았다

네트워크 그래프

네트워크 그래프 카프.png

참고문헌

[Daum 블로그]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