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김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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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성삼문(37세)
성삼문 아내(30세)
신숙주(38세)
신숙주 아내(30세)
수양대군(38세)
한명회(39세)
임운(35세)
문종의 영상(35세)
나 졸(20세)

개요

第二回大韓民國演劇祭參如作品(제2회대한민국연극제참여작품)
金 相 烈 作 (김 상 열 작) 
吉 明 一 演出(길 명 일 연출)
劇團作業制26回公演作品(극단작업제26회공연작품)

대본

막이 오르면서 천둥과 바람이 몰아 친다. 성삼문의 집과 신숙주의 집이 동시에 보인다. 양쪽으로 번갈아 조명의 강도를 나누어 주어서 피차 방해를 받지 않게 한다. 한쪽에 성삼문과 그의 아내 그리고 반대쪽에 신숙주와 그의 아내가 위치하고 있다. [성,아내]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어디를 그렇게 일찍 다녀오세요? [성삼문] 약수터에 다녀오는 길이라오. [성,아내] 이런 날은 쉬셔두 될텐데,전 천둥 소리에 [페이지] 086 놀라 깨어 보니 자리에 안계시더군요. 약수터에 나가신 줄은 몰랐죠. [성삼문] 그래도 사람들이 꽤 많이 올라오던데, 노인네 어린애 할 것없이 말야. 역시 새벽 산책은 상쾌해서 좋거든. [성,아내] 바람에 나뭇잎들이 많이 떨어졌겠죠, 바깥은? [성삼문] 골자기마다 발목이 빠질 정도로 수북하게 쌓였더군. 이제 완연히 가을색이 짙어가고 있어, 마른 풀잎 냄새가 여간 향기롭지 않더군. [성,아내] 전, 뜰에 피어난 국화가 적어지면 어떡하나 하고 밤새 조바심을 쳤지 뭐예요. 일어나자 마자 뜰로 뛰어내려가 봤더니 어제 저녁 그대로 피어 있더군요. 그걸 보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우. [성삼문] 그깐 국화를 가지구 그렇게 조바심을 쳐셔야--- [성, 아내] 아니 당신두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친정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하게 싸가지고 오신거라구요. 손수 호미로 땅을 파신다, 거름을 주신다 하시면서 정성스레 심어 주신게 아녜요. 아마 그게 작년 봄이였죠? [성삼문] 그 어른이 다녀가신 지가 벌써 그렇게 됐나--- [성, 아내] 얼마나 극성스런 성미시던지, 행여 뿌리가 상할까봐 짚으로 둥글게 싸고는 또 그 위를 가는 새끼줄로 칭칭 동여서--- [성삼문] 그런 건 꼭 당신을 닮아서 그래. [성, 아내] 어머, 어떻게 어머니가 저를 닮아요. 제가 어머니를 닮았겠죠. [성삼문] 하여튼 그쪽 성깔들은 너무 깐깐해서 탈이야. [성, 아내] 전 어머니 따라 갈려면 아직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요. [성삼문] 사람들이 둥글한데가 없이 그렇게들 모가 나서야--- [성, 아내] 괜히 처가집 흉을 보시는군요? [성삼문] 흥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너무들 유난스러워서 하는 말이지. [성, 아내] 그 유난스러운 것두 다 당신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애들을 위해서죠. 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고은 흙을 뿌리 위에 덮으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이 국화꽃이 필 때면 넌 아마 해산달이 될게다. 또 아들이겠지.] 그때 전 임신중이었거든요. [성삼문] 그랬었나? 참 그놈들은 아직 자나? [성, 아내] 코까지 골아가면서 자고 있어요. 둘쨋놈하구 막내놈하군 어제 글방에서 돌아오자 마자 연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지 뭐예요. 저녁 때가 다 되두 돌아오질 않길래, 하두 궁금해서 대문을 나서 뒷산엘 올라가봤더니(웃음) 글쎄 연 두 개가 서로 엉켜서 어쩌질 못하곤 울고서 있지 뭐예요.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건 꼭 당신을 닮은것 같애요. [페이지] 087 [성삼문] 나쁜 건 전부 나구려. 당신은 기껏 아이들에게 연이나 만들어 주구 말이야. [성, 아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 하는데요. 연을 보면 고향 생각이 나요. 고향에서는 단오날이나 추석 무렵이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극성스럽게 몰려 다니며 연을 날리죠. 담넘에선 동네 처녀들이 널을 뛰고, 그네를 타고 하면, 전 조바심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려 발돋음하고 바깥에 나가고 싶어서 안달을 했죠. 그 때마다 어머니는 미닫이 문을 열어 제치고 불호령을 하시죠, [양반집 다 큰 처녀가 상놈들 놀이에 혼이 빠졌다]구요. [성삼문] 그때부터 당신은 종아리를 맞았어야 했어. [성, 아내] 그래서 늙어두 고향을 잊지 못하는가 보죠. [연]이며[그네],널, 그리고 고향의 친구들--- [성삼문] 오늘따라 당신 어린애가 된 것 같구려. [성, 아내] 전 언제나 그랬으면 해요. 언제까지 어린애 같은 모습, 어린애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괜히 늙는다는 게 무서워요. [성삼문] 흐르는 세월을 당신 혼자서만 꽁꽁 묶어 둘 수두 없는 노릇이구---허지만, 당신 아직 처녀 때처럼 예쁘니까 염려할 건 없어. [성, 아내] 여자들은 누구나 처녀 때를 그리워 하고 잊지 못한다구 그러죠? 나이가 들어두 처녀 때 그대로의 자기인줄 착각하고 있대요. 그러다 어느날 문득 거울 앞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노라면, 눈 밑에 잔주름이 간 걸 발견하게 되구, 손 마디에 굳은 살이 박힌걸 알게 된대요. 그때 여자들은 제일 슬프다구 그래요. [성삼문] 그래서 여자들은 욕심이 많다구 그러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자기만 머물러 있길 원하니 말야. [성, 아내] (새삼스레) 여보. [성삼문] 왜 그래 당신? [성, 아내] 요즘, 가끔 무서운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어요. (신숙주 집 쪽으로 조명이 바뀐다. 신숙주 아내 차를 들고 들어온다.) [신, 아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기침을 하셨어요. [신숙주] 잠이 오질 않아서--- [신,아내] 茶(차)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밖은 비바람이 아주 세차게 부는군요. [신숙주]---. [신,아내] 한의가 그러잖었어요. 불면하시면 심기에 해로우시다구요. 요즘은 환절기라 더 몸보신을 잘 하셔야 돼요. [신숙주] ------ [신, 아내] 왜 통 말씀이 없으시죠? 뭐 언짢은 일이라두 있었나요? [신숙주] 아니요, 아무것두--- [페이지] 088 [신,아내] 안색이 아주 창백해지셨어요. 근자에 식욕이 없으셔서 진지도 변변히 들지 못하시면서 새벽잠까지 설치시니 더 수척해지셨어요 [신숙주] 괜챦다는 대두 그래. [신, 아내] 아니예요. 요즘은 모든게 전과 같지 않으셔요.일체 말씀도 삼가시고 매일 수심에만 잠겨 계시니 [신숙주] 계절 탓이겠지.당신 너무 상심하지 마우. [신, 아내] 밤이 깊었는 데두 통 잠을 못이루시고 뒤척이시더니 겨우 자정이 넘어서 잠이 드셨나 싶엇는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깨어나곤 하셨어요.분명 무슨 근심이 계신 모양이예요. 온몸에 땀을 비오듯 적시우고--- [신숙주] 꿈자리가 뒤숭숭해. 요즘은 더욱 그렇거든. [신, 아내] 뭔가 괴로운 응어리를 속에다 꾹 안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제게 말씀하실 수 없어요. [신숙주] 괴로울게 뭐 있겠오. 시간이 흐르면 다 낫겠지. [신,아내]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자리에 인 게시더군요. 이상도 하다 생각해서 문을 열고 내다보니 당신은 대청에 멍청히 서서 뜨락을 내려다보시구 계시더군요. 한참동안, 아주 한참동안 그렇게 서 계셨어요. 전 뭘 그렇게 물끄러미 내려다 보시나 했더니 빗물에 떨어진 국화 꽃잎을 보고 계셨어요. 두 어깨에 힘이 빠져 땅 속으로라도 갈아 앉듯이 늘어진 모습으로 서 게셨어요. 여보! 말씀해 주세요. 무슨 근심이 있으세요. [신숙주] 밤마다, 밤마다 돌아가신 선왕의 모습이 나타나는구려. [신, 아내] 문종 전하 말씀인가요? [신숙주] 그렇소.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 내게 무어라고 자꾸 말슴하시는데 통 그 말이 들리질 않아. [신, 아내] 악몽이로군요! (성삼문 집으로 조명이 바뀐다.) [성, 아내] 아침에 당신이 총총히 대궐로 등청하신 후에 전 아이들에게 새옷으로 갈아 입혀서, 서당으로 전부 보내고 나면, 텅빈 큰 집안에 저 혼자만 남게 되죠. 화단에 내려가 제일 탐스럽게 핀 백일홍이며, 국화며, 박꽃을 꺽어다 화병에 곱게 꽂은 뒤, 당신의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죠. 그리곤 옷장이며 문갑이며 경대, 옥합을 마른 걸레로 윤이 나게 닦는 거예요. 해가 동창을 비쳐 들어와 콩기름으로 윤이 나는 사랑방 장판 위에 퍼져오면, 전 당신의 침구를 저내놓고, 옥처럼 희게 다듬이질한 옥양목으로 새홋청을 바꾸어 꿰매죠. 당신의 땀내가 밴 침구를 매만지면서, 저는 뿌듯하게 젓어들어 오는 아내의, 그리고 어머니의 행복에 빠져들어 가요. 아시겠어요? 여보. [페이지] 089 [성삼문] 오늘따라 유난히 수다스럽구려 당신- [성, 아내] 아니들이 가지고 노는 공기돌모양 내 손 안에 꼭 쥐어진 행복의 알맹이 하나 하나를 음미하게 되죠. 해가 서쪽으로 넌지시 넘어갈 때면 뜰에 널었던 당신과 아이들의 옷을 걷어다 풀을 먹여요. 고의 적삼, 바지, 두루마기, 쾌자 댓님에 이르기까지 곱게 곱게 다듬어서 접어두죠. 이내 개구장이 아이들이 서당에서 우르르 몰려오면, 큰 놈부터 막내까지 넓직한 함지박에 물을 떠다 세수를 시키거든요.저녁을 먹은 후 아이들은 도련 도련 둘러앉아 천자문을 읽어대고 저는 와룡촛대에 불밝히고 그 곁에 앉아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수틀을 꺼내들고 오색실 총총이 사군자를 곱게 뜨죠. 아시겠어요 여보.아이들이 잠자리에 전부 들면 이리 저리 이불깃을 여며주고, 당신이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인두질 해가면서 자주 갑사 저고리에 새 동정을 달거든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창밖에 귀를 기울이면 자정이 가까와서 당신을 태운 승교꾼들의 거친 발걸음 소리가 돌담길을 끼고 오죠. 저는 일감을 내던지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대문의 빗장을 열면, 술기운에 붉으렇게 상기된 당신이 거기에 서 있어요. 그리곤 당신은 내 어깨에 손을 얹지며 이렇게 말씀하시죠 「집현전에서 오는 길에 주막에서 한 잔 했지.」그 때가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당신은 아시겠어요? 저는 어린애처럼 와락 눈물이 돌거든요. [성삼문] 당신 정말 어린애 같애 오늘- [성, 아내] 그 때마다 저는 속으로 몇번이고 같은 말로 기원하죠.「저는 성삼문의 아내입니다. 제발 이 행복을 뺏어가지 말아 주세요. 이 작은 나의 행복을요! (조명 신숙주의 집으로 바뀐다.) [신숙주] 그때마다 나는 소리를 치지. 「대왕전하, 소인은 신숙주입니다. 전하께서 생전에 그토록 사랑하시던 신숙주입니다.」그러나 또 대왕전하께옵서 말씀하시는 듯하나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질 않아. 그리곤 자꾸만 손짓으를 자기 무릎 위에 않은 어린 세자를 가르키시더군. [신, 아내] 단종 전하 말씀입니까? [신숙주] 자세히 보니 분명 단종전하인데 단종께서도 온몸이 피투성이 되어 앉아 있더란 말이요. 심지어 어의에까지 검붉은 피가 배여--- [신, 아내] 심기가 매우 허탈하셔서 아마 그런 악몽에 시달리시는 거예요. 단종 전하로 말할 것 같으면 12살의 어린 나이에 엄연히 선왕의 옥쇄를 이어받아 옥좌에 않아 계신 지 3년이나 되지 않았어요. 괜히 태평한 시국에 불길한 꿈을 꾸시니 지레 액운이 닥칠까 걱정이에요. 고정하시고 차나 드세요. [신숙주] 차는 그만 두겠오. 어서 의관이나 꺼내 주구려. [페이지] 090 [신, 아내] 벌써 등청하시게요. 아직 이른 새벽인데요. 웬만하시면 오늘 결청하시는게 좋겠어요 [신숙주] 수양대군 어른께서 집현전 학자들을 일찍 초치하셨오. [신, 아내] 수양대군 나리께서요? [신숙주]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일찍 등청하라는 전갈이 왔오. (조명, 성삼문 집으로 바뀐다.) [성삼문] 당신은 언제 봐도 시집올 때 그대로야. 말씨며 몸매 얼굴까지도 말야. 그래서 그런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군 그래.당신 손에 든 그 행복을 꼭 쥐면 되는 거야. 아무도 그것을뺏거나 흩어 버릴 사람은 없어. 어제는 글쎄 단종전하께옵서 내게 이런 농담을 하시더군.「성삼문 대감의 내자께서는 현모양처에 뛰어난 미색이라고 소문이 났더군.」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더군 [성, 아내] 황송하신 말씀을--- [성삼문] 당신은 괜히 불안해 하고 있어.(웃음) 아직 철이 덜 들었나? [성, 아내] 제가 본래 겁이 많은 모양이죠. [성삼문] 첫날밤 당신 울던 일 생각 나? [성, 아내] 또 그 얘기---. [성삼문] 막무가내로 눈을 딱 감고 쪽두리랑 혼례 의장을 벗으려 들지 않았지. [성, 아내] 삼촌이 장난으로 한 말을 정말로 믿었거든요.「네 신랑은 눈이 한짝 없으니 그리 알고, 행여 첫날 밤에 마주 올려다 보면 안된다.」전, 정말 눈이 한짝 없는 신랑에게 시집온 줄 알고 밤새 울었죠. [성삼문] 그것봐, 그 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어린애 같다니까.(두 사람 웃는다.) (조명 양쪽을 같이 보여준다.) [신숙주] (의관을 정제한 뒤) 칼을 주구려! [신, 아내] 전에는 칼을 안차시더니--- 왜 오늘은---? [신숙주] 칼을 소지하라는 전갈이였오. [성삼문] 등청할 시간이오. [성,아내] 다른 날보다 이른 시간인데요. [성삼문] 단종전하께서 일찍 등청하라는 분부였오. [신숙주] (한참 망설이다) 오늘밤 늦으면 못들어 올 테니 기다리지 말구려. (황망히 나간다.) [성삼문] (서서히 나서며) 아이들이 깨거든 내 먼저 나갔다구 전해 주구려. (무대 암전) [페이지]091 [장] 제 2장 궁궐 비바람 몰아치는 가운데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서로 만난다. [수양] 혹시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는 게 아닐까 한대감. [한명회] 대감께서는 너무 진중하신 게 탈입니다. 만사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시기상조라 너무 일러두 해가 되지만 또한 너무 늦어두 화를 입게 됩니다. 거사에는 적시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의 힘과 조직이 가장 팽창되어 있읍니다. 무려 삼년 동안이나 꾸려온 거사가 아니겠읍니까? 무예에 능한 무사와 장군들은 이미 우리 수중에 들어와 있읍니다. 이제 남은 집현전의 학자들이란 건 조금두 두려울 게 없읍니다. 글방에서 책이나 읽던 생원들이야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입니다. 그저 시퍼런 칼날만 번쩍하고 비치기만 해도 오금을 못쓰고 안으로 기어그는 약질들입니다. [수양] 허나 우리의 뜻과 임무가 한낱 역적들의 모의가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을 위힘이라는 참 뜻이 있는 바, 부득이하다고는 하지만 반대 세력을 거세하는 일, 필연코 살생이 따르기 마련인데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게 몹시 걸리는구려. [한명회] 대감의 진의는 백번 이해를 하겠읍니다만, 대혁신을 이루는데 무수한 장애물이 따르는 법입니다. 인정에 쏠리고 사정에 얽매여 근본 뿌리를 뽑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면 오히려 그 뿌리에 걸려 이 쪽이 넘어지게 됩니다. 깊은 뿌리를 캐내어 영영 다시 살아 나지 못하게 생명을 잘라야 합니다. 잘 되면 충신, 못되면 역적이라는 말이 있읍니다. 아무리 대의 명분이 확실한 혁신이라도 그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대 역적이 됩니다. 그 때의 보복을 상상해 보셨읍니까? 하찮은 인정이나 윤리에 쏠려 살려줬던 그 작은 뿌리가 오히려 우리의 온 몸을 휘감고 덤벼든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잔인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발뿌리에 걸리는 나무 뿌리가 있으면 가차없이 잘라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의 첩경입니다. [수양] 피를 본다는 것, 그것이 괴로운 일이오. [한명회] 수술을 하려면 피를 보는 법, 곪아 터진 상처에서는 으례 피가 흐르는 법, 피를 흘리지 않고는 고름을 짜낼 수가 없읍니다. 환자의 고통을 감안하여 우유부단한 처방을 하게 되면 병은 재발하거나, 아니면 환자는 영영 죽어버립니다. 목적에 이르는 길은 철두철미 완벽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칼집에서 혁신의 칼날을 뽑아들었읍니다. 이제 우리가 [페이지]092 해야 할 일은 베고, 자르고, 찌르는 일 밖에 없읍니다. [수양] 피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현재의 사태와 그 사태에 뛰어들어야 하는 내 운명이 원망스러운 거요. [한명회] 그래서 거사에는 아무나 끼어들지 못하는 겁니다. 혁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도량을 가진 인격들이 덤벼드는 힘겨운 일입니다. 바로 대감께서 지금 그 사태 앞에 피할 수 없는 사명감으로 서 있읍니다. 주저하거나 회의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손을 걷어 올리고 뛰어들어 오십시오. [수양] 간밤에는 한잠도 이루지 못했오. 어린 조카를 왕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괴로움이 오리무중에 빠진 국정을 쇄신해아 한다는 사명감보다 더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 핏속에 천륜을 저버리지 못하는 싸구려 인정 같은 것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한명회] 아직도 대감의 가슴 속에는 고리타분한 선비들의 외고집이 도사리고 있읍니다. 무사는 그것을 떼어버려야 합니다. 달고 다녀야 무게만 느끼고 거추장스러워 오히려 행동을 하는데 방해를 줍니다. 잘라버리십시오. 그 귀챦은 혹을 미련없이 잘라 버리셔야 합니다. [수양] 한 대감의 논리 정연한 그 결단이 한없이 부럽소. [한명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자라났읍니다. 동네 아이들은 내게 돌을 던지며 회롱을 했읍니다. 심지어는 집안에서까지 멸시와 조롱을 받고 살았읍니다. 서당의 아이들은 내 등에다 검은 먹물로 「얼치기 칠삭동이」라고 써 붙이곤 고삐를 해서 동네마다 주리를 돌리곤 했읍니다. 모래를 던지는 아이, 작대기로 내 머리통을 후려 갈기는 아이, 저는 그런 수모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읍니다. 전 그 때마다 속으로 수천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읍니다. 「이 치욕을 너희들에게 꼭 갚으리라, 꼭 갚으리라.」 그뒤 전 모든 길을 지름길로 달렸읍니다. 남이 안전한 길로 돌아서 가더라도 나는 발목을 적시면서 줄곧 지름길만 걸어 왔읍니다. 내 앞에 걸어가는 자가 있으면 멱살을 나꿔 채서라도 앞질러 갔읍니다. 나보다 힘센 자가 앞가 서면 그의 목줄기를 물어 뜯고 나보다 지혜로운 자가 앞서 가면 그의 지혜에 계략으로 뒤엎어서 앞지르곤 했읍니다. 그 때마다 제가 느끼게 된 것은 나에게 뒤쳐지기 시작 자들은 나에게 항의하거나, 도전해 오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내게 추파를 던지고, 우의를 다짐도 하며 심지어는 아첨하는 자까지 있었읍니다. 난 많은 교훈을 얻으며 살았읍니다. 그래서 결국 송도 경덕궁의 문 [페이지] 093 지기라는 비천한 신분에서 일약 수양대감의 혁신 참모의 자리에까지 올라 왔읍니다. 왜 대감께서는 수많은 인재 중에서 보잘 것없는 저를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요직에 임명하게 됐는가를 알고 있읍니다. [수양] 대감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지. 내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를 거쳐 개성을 경유할 때 당시 경덕궁 문지기인 한대감을 만나게 됐지. 그때 남달리 눈에서 안광이 번쩍거리는 한대감을 주시할게 됐었오. 창백하고 마치 해골 같은 얼굴에 두 개의 불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때 난 뭐가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어. 저 얼굴은 분명 한패공의 장자방과 같다고 생각을 하게 됐지. [한명회] 그후 늘 대감께서는 저를 주시하셨죠. 전 언제나 대감의 눈초리를 느끼면서 지내왔읍니다. 그 눈초리에서는 무언가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읍니다. [수양] 내 꿈과 내 야망에 불씨를 던져 줬지. 그 불길이 서서히 타올라 구체적인 세밀한 계획까지 작성하게 되고 한대감의 노련한 조직력으로 대왕대비인 후궁혜빈양씨와 내시 엄자치, 내금위까지 매수하는 데 성공을 했지. [한명회] 대감께서 저를 비천한 신분으로부터 대감의 측근으로까지 이끌어 주신 보답을 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모든 능력 내의 권모술수를 전부 발휘하여 대감의 정치 혁신에 이바지할 것을 굳게 맹세하게 됐읍니다. [수양] 우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이 끝태 협조를 거부했오. 특히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김종서는 선왕 문종의 유언을 받았다는 이유로 죽어두 단종을 보필하겠다는 거야. [한명회] 날자만 결정하십시오. 김종서와 황보인인 우리가 손수 없애버립시다. [수양] (돌아서서) 김종서는 이미 60이 넘은 노정승이야. [한명회] 또 그 하챦은 감정에 젖으십니까? 학자들이란 그저 붓이나 들고 산수 경치나 읊던 버릇이라서 언제나 눈꺼플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니까! 한 살 먹은 갓난아이 죽이는 거나 60넘은 노인 죽이는 거나 죽이는 건 매일반 조금도 개의치 마시고 명령만 내리십시오. (수양 돌아서서 무언가 얘기하려 할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오, 신숙주 나리께서 행차하시는군요. [신숙주] (들어오며 수양대군에게 ) 밤새 평안하셨읍니까, 대감 [수양] 어서 오우! 한대감께 얘기는 들었겠지? [수양] 어서 오우! 한대감께 얘기는 들었겠지? [페이지] 094 [신숙주] ---? [한명회] 어제두 내가 말씀드렸지만 무관들이나 문관들 할 것없이 전부 수양대감 거사에 지지 서명을 했오. 만약 서명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따로 여기(두루말이)에 적어두었소. 물론 신대감께서두 찬성하는 걸루 믿구 어제 내가 말씀드린 겁니다. [신숙주] --- [수양] (애원하듯) 나와 오랫동안 동거 동락한 신대감만은 내 맘을 잘 알아 줄 거요. 추호도 내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혹은 명예욕에서 거사를 꾀하는 게 아니요. 부패하고 문란한 내정을 쇄신하고 궁안에 만연하고 있는 부조리한 윤리기강을 바로잡아 다음의 후손들에게 복된 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함이오. 부득이 나서지 않으면 안될 나를 동정해 주구려, 신대감! [신숙주] --- [수양] 나이 어린 왕이 옥좌에 앉은 틈을 타 사방에서 왕권을 다투며, 무능한 대신들 사이에서 오가는 매관 매직, 탐관오리들의 주색잡기, 가렴주구.... [한명회] 빨리 결정을 내리시오. 신대감, 이번 거사에 가담하겠오? 만약 못하겠다면 부득불 여기에 (두루마리) 이름을 올리는 수 밖에 없소! [신숙주] (옷가락 속에서 천천히 칼을 보이며 힘없이) 이미 작정을 하고 나온 몸이요. [수양] 고맙소 신대감. (손을 잡으며) 이제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소.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행동합시다. [한명회] 신대감께서는 성삼문과 그 일파들을 설득해 주시구려. [신숙주] 해 보겠오. [한명회] (자신감에 차서) 자, 이제 모든 것은 끝났오. 오직 행동만이 남아 있읍니다. 대정혁신의 날자를 언제로 하시겠읍니까. 대감 주저하지 마시고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수양] (결단을 내리듯) 내일이 10월 10일 거사일을 내일로 정합시다. [한명회] 좋습니다 대감. [수양] 내일 밤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를 제거하고 나머지 6조의 판서와 이에 속하는 관속들을 차례로 제거합시다. [한명회] (밖에 대고)거기 있느냐? [임운] (절도 있게 절을 하며) 예, 대령했읍니다. [한명회]내일부터 시작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도록! 알겠느냐. [임운] 네, 알겠읍니다. [한명회] 매사에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너무 서두르거나 긴장해서 일이 낭패가 되면 그 때는 네가 그꼴을 당한다. 알겠느냐? [임운] 명심하여 신중하게 처리하겠읍니다. [한명회] 처음에는 칼을 쓰지 마라. 쇠뭉치를 쓰도록 해. [페이지] 095 칼을 쓰면 피가 너무 많이 나와 지저분해져. 철퇴가 좋다, 뒷통수나 정수리를 후려 쳐야 돼. 너무 여러번 때리지 말고 한두 번에 끝내도록 세게 치란 말야,알겠느냐? [임운] 말씀대로 하겠읍니다. (절한다. 이때 암전) (절한다. 이때 암전) [장] 3 장 [장] 3 장 밤, 푸른하늘을 배경으로 김종서, 황보인, 조극찬, 이양, 민신, 윤처공 등의 대신들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인형들이 그로테스크하게 줄에 매달려 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맨먼저 김종서를 상징하는 인형이 보이면 한쪽에서 수양, 한명회, 임운(궁노)이 등장한다. 임운은 철퇴를 들고 있다. [한명회] 우의정 김종서의 집입니다, 대감. [수양] (하늘을 우러러 보며) 아직 밤이군 그래. [한명회] 조금 전에 자정을 알리는 인경소리가 들렸읍니다. 아주 좋은 시간입니다. 밤이란 것을 모든 것을 감싸주거든요. 그래서 음모와 살인과 염탐은 밤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신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밤이란 걸 주신 모양이죠. [수양] 은하수가 길게 뻗쳐 있구나. 저게 북극성인가, 유난히도 반짝거리는군! [한명회] 밤은 추한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어둠의 구석구석에서 음모가 싹트고 살기가 번뜩거려도 묘하게도 밤은 그것들을 은닉시켜 주거든요. 밤은 감사한 것, 긴긴밤동안 벌어졌던 검은 음모와 그로 인해서 쏟아지는 수많은 핏자욱은 새벽의 밝은 태양이 솟아오르면 말끔히 쓸어가니까요. 태양이 하늘 위에 걸려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면 아무도 밤에 일어 났던 음모와 핏자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핏자욱 위를 멋모르고 밟고 다니죠. 밤은 참으로 감사한 것--- [수양] 모두가 잠들었는가? 사방은 암흑으로 뒤덮이고 인적이 괴괴한데 돈의문의 초롱불만이 아물거리며 홀로 빛나고 있구나. [한명회] 해가 솟아오르면 어둠 속에서 찡그렸던 가슴과 얼굴을 활짝 펴고 상냥하게 웃으면 되는 것이죠. 「밤새 안녕히 주무셨읍니까?」 「간밤에 별일 없으셨나요?」 상쾌하게 아침인사를 주고 받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 되죠. 부끄러움 위에 상쾌한 재를 뿌리면 되는 거죠. [수양] 삼대째 선왕들을 모셔온 노대신들은 지금 깊은 잠속에 빠져 있겠지. 10월의 청명한 가을 밤, 은하수가 뚜렷이 뻗쳐 있고, 북극성이 유난히 반짝이는 10월10일의 이 시간이, 그들의 기록 긴 인생의 마지막 밤을 [페이지] 096 알 리가 없겠지. [한명회] 밤은 인간들의 가장 안락한 휴식처, 낮의 잡념과 노여움은 달콤한 잠자리 속에서 다 녹아 없어지고 따뜻함이, 그리고 포근함이 김처럼 서려서 온몸을 뿌듯하게 감싸주는 쾌감 속에서 낮의 새로운 일을 설계하며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죠. 그래서 밤은 참으로 유익한 시간. [수양] 자, 이 밤이 새기 전에 우리의 할 일을 빨리 행하자. [한명회] (수양과 임운에게) 우선 대문을 열고 들어가십시오. 저는 여기서 망을 보겠읍니다. 문지기 녀석은 졸린 눈을 비비며 왠일이냐고 물을 겁니다. 그러면 대감의 신분을 밝히시고 김종서대감께 급한 용무가 있다고 말하고서 태연히 안채로 들어 가십시오. ( 수양과 임운, 한명회 설명대로 마임을 하며 김종서 인형쪽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마당에서 큰 기침을 두어번 하면---) [수양] (기침소리) 허음! [한명회]김종서 대감이 침소에서 일어나 아닌밤중에 대감께서 왠일이시냐고 묻겠죠. 그럼 대감께서는 급히 상감이 서신을 전할 일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수양] (인형에게) 상감의 서신을 전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밤늦게 왔소이다! [한명회] 그럼 김종서대감은 방안으로 들어 오라고 재촉을 할 테죠. 그러나 절대로 방으로 들어서서는 안됩니다. [수양] 시간이 없어서 여기서 급히 전하고 떠나겠소이다! [한명회] 그리고는 옷소매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서 김종서 대감께 건네 줍니다. 이때 임운, 너는 너무 긴장하지 말고, 서신을 읽고 있는 김종서 대감의 뒤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옷자락 속에 감췄던 철퇴를 살며시 꺼내들고 김종서 대감의 뒷머리통을 힘껏 후려 친다. (철퇴의 충격으로 人形(인형) 크게 그내처럼 움직이며 비명소리 효과음으로 압도되어 들려온다.) [한명회] 너무 서두르거나 또는 주저해서는 안된다. 한번에 결판이 나지 않으며 계속 내리쳐야 한다! 두번! 세번,네번! (人形(인형) 은 그내처럼 크게 움직이며 계속 임운이 내리치는 철퇴에 충격을 받으며 그 움직임의 반경이 더 커진다. 비명 계속되며 호리죤트에 핏방울이 점점이 맺히는데, 수양은 이것을 배경으로 돌아서 있다.) 다음은 똑같은 방법으로 영의정 황보인 대감을 처치해야 한다. [페이지] 097 (임운, 다른 인형을 똑같은 방법으로 난타한다. 또 하나의 비명소리 가미된다. ) 다음은 이조판서 조극관! (임운, 또다른 인형을 같은 방법으로 난타한다. 또 하나의 비명소리 가미된다. ) 다음은 찬성 이양! (임운, 또다른 인형을 난타, 또하나의 비명이 가미된다. ) 다음은 병조판서 민신! (임운, 또다른 인형을 난타, 가미되는 또하나의 비명.) 다음은 윤처공! 이명민! 조번!--- (임운, 미친듯이 나머지 인형을 난타, 무대 위에는 비명을 지르는 여러개의 인형들의 그네놀음이 현란하게 이루어진다. 마치 시계방의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여러개의 시계추 모양 인형들이 움직일 때 무대 암전)

[장] 4장

성삼문의 집, 신숙주와 성삼문. [성삼문] (노해서) 알다가도 모를 일, 내 두뇌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오. 뻔히 알면서도 침묵을 지켰다니 대감의 뜻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신숙주] 성대감 좀 진정하시구려. 이미 일은 벌어졌오. [성삼문] 난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참극이오. 하루 아침에 온 궁궐이 피바다를 이루다니 끔찍한 일이오. 이건 사람들이 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소름 끼치는 사건이오. 더군다가 사전에 음모의 전모를 전부 알고 있었다면서 속수 무책 방관하고 있었다는 신대감의 의도를 더욱 알 길이 없구려. [신숙주] 불가 항력이었오. 음모의 전부를 내가 알았을때는 도화선에 이미 불이 붙고 있던 시기였소. 너무 늦었던 거요. [성삼문] 그렇다면 적어도 가장 친한 사이인 나에게라도 알려줘야 했오. [신숙주] 성대감의 성격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실정인데 만약 그때 성대감에게 음모의 전부를 알려 줬더라면 분명, 미약한 힘으로 그 불을 끄려고 덤벼들었을 꺼요. 난 작은 우정으로나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오, 성대감! [성삼문] 우정? 신대감은 우정을 핑계로 상감을 배반했다는 거요? 충성보다 우정이 앞섰다니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요. 우정때문에 살륙을 했단 말이지? [신숙주] 몇 번 말했지만 직접 살륙에는 참가하지 않았소. [페이지]098 [성삼문] 내가 신대감에게 묻고자하는 게 바로 그거요. 참가는 하지 않았지만 방관은 했다 이런 말이 아니겠오. 온지 않은 일인지 뻔히 알면서 방관했단 말이요. 역적모의인 줄 뻔히 알면서 침묵을 지켰단 말이지요. 그래서 신대감은 살륙극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그 핑계로서 이 엄청난 범죄 앞에서 스스로 위로를 받고 있는 거요? [신숙주] 더 큰 범죄를 막기 위해서 더 많은 살륙을 방지하기 위해서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않됐던 거요. 이미 궁안의 모든 무관들과 문관들은 이 참극에 참여의 뜻을 비쳤거나 적어도 지지하는 서명을 했었오, [성삼문] 그러나 난 모르고 있었오. [신숙주] 가장 타협하기 힘든 집현전의 학자들만이 보류상태에 있었오. 수양대감과 한명회가 내게 집현전 학자들을 설득하라는 임무를 부여했오. 그러나 나는 학자들을 설득하라는 임무를 부여했오. 그러나 나는 굳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오. 권문세가의 문전과 굳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오. 권문세가의 문전과 골목 골목에 수많은 염탐꾼들이 몰려 다니고 있었으며 궁궐의 구석 구석에 자객들과 반도의 친위대들이 칼날을 번쩍이며 완전히 점령을 하고 있었오. 만약 내가 그 때에 성대감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다고 합시다. 성대감은 어떻게 했겠오. 아무것도 모르고 겨우 측근의 여섯명의 미약한 선비들만의 힘으로서 이 역적모의에 대항하려 했겠죠. 결과는 뻔한 일, 인명의 피해만 더 늘어났을 뿐이오. [성삼문] 그러나, 그것으로서 신대감이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오. 불가항력, 중과부적으로 인하여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로서 당연히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신대감은 용서받을 수가 없소. 침묵이 무기라고 생각하고, 방관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면 시대감은 더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거나 다름 없소.상대의 힘이 너무나 거대해서 겨루어 봤자 지거나 아니면 오히려 잡혀먹게 된다는 핑계로서 상대의 부당한 힘을 인정해서는 안되오. [신숙주] 결코 정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성삼문] 정의라고 생각치는 않으나,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것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한 거요. 바둑이나 장기놀음과는 틀린 것이라서,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해서 두 손을 털고 일어서야 할 그러한 입장도 아닌 것이오. 신대감은 방관하므로서 스스로의 비겁함을 보여준 셈이오. [신숙주] 차라리 내 한사람의 목숨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였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생각해 봤소. 나 한사말의 저항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잘 짜여진 조직에 붙들려 이름도 모를 어느 산골짜기에서 아무도 모르게 도륙을 당해 바다속이나 강물 속에 던져질 것이라 [페이지]099 고--- 그렇다면 나의 항거가 그리고 나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얘기하겠지, 신숙주가 자살을 했다! 아니면 행방불명이 됐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오. [성삼문] 신대감이 찾는 그 의미란 무엇이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거요? 아니면 목숨을 던져 그것으로서 백성들이나 후세에 자극을 주자는 거요? 내가 말하는 저항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나 자신 안에 있는 의무를 말하는 것이요. 산속에서 죽든 개천속에 빠져죽건 또는 죽은 후 바다속에 던져지든, 강물 속에 던져지든 그 결과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시체를 거두는 일은 장의인이나 아니면 하늘에서 하는 일이오. 불의 앞에서 안된다고 말해야 하는 신하로서의 의무를 말하는 거요. [신숙주]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살아 남아서 그 불의한 세력과 대결해야 하오. 짓밟히면서라도 살아남는 길이야말로 승리의 길이요, 정의의 길인 것이요. 살기 위해서 타협하는 게 아니고, 두려워서 침묵을 지키는게 아니오. 정의를 갈구하는 작은 세력이 어느 한 구석엔가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작은 세포가 차차 분열되고 확장돼서 하나의 거대한 힘을 이룰 때까지 벌레처럼이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거요. 이것이 악을 제거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인 것이오. [성삼문] 비참하게도 살아 남았기 때문에 그런 대안을 생각하게 된거요, 신대감! 용기없이 살아 남았기 때문에 그런 근사한 핑게가 마련된 거요. 승리는 내 안에 있는 거요. 그들의 칼날 앞에서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하는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오. 그것은 스스로가 인간임을 증명하기 때문이오. 대답하시오. 살아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요? 그들이 장타령에 옆에서 북으로 반주를 넣어 주겠다는 거요? 적절히 안배되는 감투를 쓰겠다는 거요? 아니면 갈수록 무력해지고 갈수록 나약해지는 육체와 의지를 한탄하며 서글픈 한시나 읊겠다는 거요? 보시요 신대감, 신대감은 이미 죽었오. 그들의 두루마리에 방관자로서의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 신대감은 죽은거요? 육체는 살아 났지만 혼이 죽어 간 거요. 두려움 때문에 무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켜온 그 고리타분한 그 지위 때문에 안락함, 무난함, 그리고 놓치기 싫은 세상의 잔 재미를 얻기 위해서 신대감의 혼을 팔게 된거요. 이제 감각으로만 살아야며, 피부로만 살아야 되오. 혼이 없는 육체를 지탱하기 위하여 더 논리정연한 핑계를 만들게 되고, 자기가 파논 도피의 웅덩이 속에서 남은 여생을 헤엄쳐야 되오, 신대감. [신숙주] 나요? 성대감과는 오래 전부터 허물없이 친교 [페이지]100 를 맺어 온 막역한 사이오. 세종 임금께서 집현전에 우리들를 불러들인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동거동락한 깊은 우정을 서로 간직하고 있오.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논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나라의 문헌을 정리해 오면서 언제나 서로 뜻이 맞고 통하여 한번도 다투어 본 적이 없었오. 이제 우리의 나이가 중년에 접어 들어 우리의 지혜가 깊어지고, 우리의 능력이 왕성해져 바야흐로 남은 생애의 모든 정력을 기울여 국사와 학문에 이바지할 때가 온 것이라오. 20代(대)의 미숙함도 50代(대)의 무력함도 아닌, 일하고 땀흘리기에 가장 좋은 때에 접어들었오. 성대감, 언제나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전쟁은 무사들에게 맡기면 그만이오.누가 다스리든, 누가 정승의 자리에 오르건, 조금도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단 말이요. 권력도 한 시대 명예로 한 시대 무상한 것이 그것인데 거기에 휩쓸릴 필요가 뭐 있겠오. 우리는 우리의 할 일만 꾸준히 하면 그것으로서 얼마든지 인생의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이오. [성삼문] 학자는 학문에 전념하고, 예인은 창조에 몰두하며, 정치가는 정치에 집념하는 것이 그 본 뜻임을 나도 잘 알고 있오. 백성은 농사를 지어 세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맘껏 쓰고 먹으면 그 뿐이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좋은 시대에 할 수 있는 얘기라오. 각기 서로가 잘 맞물고 돌아가는 시대에는 당연한 얘기오. 허지만 누군가가 이 잘 돌아가는 질서 속에 흙탕물을 끼얹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어 살륙을 범하고 정권 다툼에 앞서간다면, 우선 가만히 글만 읽어야 되겠오. 언제부터인지 얼빠진 학자란 자들이 신라때의 처용가를 들먹이기 시작했오. 처용이란 머저리같은 녀석이 밤새껏 줄을 퍼먹다 새벽녘에 집에 들어와서 이불을 들치고 봤더니, 다리가 네개더라나. 둘은 제 마누라 껀데 두개는 누구것일까하다가 에헤라, 나머지 두개가 내것이 아니면 어떠냐 하고 춤을 추며 나갔다더군. 그래서 역신이 도망쳤다는 고사를 꺼내들고 아량과 통을, 그리고 여유를 떠벌여 왔지. 무력한것에 대한 미화를 낙으로 삼던 시절의 얘기지.우리들에게는 따지고 저항하려 드는 그런 버릇이 언제부터인가 없어졌어. 제 마누라를 엉뚱한 녀석이 끼고 동침을 해도, 누구냐고 한 번 물어보지도 못하고 물러서는 그런 얼치기 녀석을 찬양하고 있으니 말이오. 아마 그 놈의 처용가라는 것이 나온 이후부터인가? [신숙주] 역신에게 따지고 들었다면 아마 처용은 죽었을 테지. [성삼문] 그래서 비굴하다는 거요. 무력함을 아량으로 자위하는 그런 자들과 함께 말이오. [신숙주] 성대감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오? [페이지] 101 [성삼문] 내게 묻지 말고 신대감 먼저 대답해 보구려. 이제부터 신대감은 어떻게 하시겠오? [신숙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살아 남아야 하겠오. [성삼문] 나는 나의 혼을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겠오. [신숙주] 성대감! [성삼문] 나의 뜻을 같이 하기에는 이미 신대감은 너무 먼곳에 가 있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일에 전혀 간여 하지 마시구려.지금부터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오. 우선 나 자신과 얘기를 먼저 해야겠오. 안녕히 가시구려, 신대감! [신숙주] 뜻은 같으나 길이 다를 뿐이오, 성대감. [성삼문] (허탈하게) 며칠전 어전에서 어린 전하를 뵈온 적이 있었지. 귀엽고 작은 입으로 곶감을 잡수시고 계시더군. 평화스런 눈빛, 따스한 봄볕같은 미소를 띄우고 어린 전하는 햇곶감을 오물 오물 잡수고 계셨어.「맛이 어떻습니까 전하?」하고 물었더니 「감보다 훨씬 맛이 있오.」하시더군.「감을 말린것이 곶감이라는 것입니다 전하.」하고 아룅더니 「그래서 맛이 있었구나 신대감, 나는 아직 어리니까 감 임금이지, 곶감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그렇지.」(웃음)「전하 그래도 곶감보다 감이 싱싱하잖읍니까」했더니, 어찌나 좋아하시든지 어깨를 들먹거리며 웃으시더니 이내 왕비마마 무릎을 베더니 스스르 잠이 드시더군. [신숙주] (괴로운 듯) 성대감! [성삼문] 그 선녀보다 고은 얼굴에 핏방울을 투기게 하다니--- [성삼문] 그 선녀보다 고은 얼굴에 핏방울을 투기게 하다니--- [성삼문] 그 선녀보다 고은 얼굴에 핏방울을 투기게 하다니--- (성삼문 아내 장난기 어린 자세로 길게 실을 단 연을 들고 들어오다 신숙주를 발견하고는 연을 뒤로 감춘다.)

[성, 아내] 전 혼자 계신지 알고 그만--- [신숙주] 아닙니다. 막 떠나려든 참이었읍니다.(성삼문에게) 대감, 안녕히 계시구려.(성삼문 아내에게) 안넝히 계십시오. [성삼문] (의미있게) 안녕히 가시구려, 신대감. [성, 아내] 안녕히 가십시오. [성, 아내] 안녕히 가십시오. (신숙주 무거운 걸음으로 퇴장) (신숙주 무거운 걸음으로 퇴장) 여보, 아이들이 여간 극성을 부려야지요. 연을 띄우겠다고 저 야단이지 뭐예요. 그러나 애들이 집안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얼마나 좋아요.글쎄 막내놈은 연줄을 붙잡고 산비탈을 막 뜀박질을 한다니까요. 당신이 이쪽좀 붙잡고 계세요. 붙잡고 산비탈을 막 뜀박질을 한다니까요. 당신이 이쪽좀 붙잡고 계세요. (성삼문 연을 붙들고 있다.성삼문 아내 실을 얼래기서 푼다.) (성삼문 연을 붙들고 있다.성삼문 아내 실을 얼래기서 푼다.) 참 당신 국화나무 보셨어요? [성삼문] 아니. [페이지] 102 [성, 아내] 조그만 봉우리가 또 하나 생겨났어요 피어 있는 것까지 합치면 이제 여섯 송아리예요. 애들이 장난을 치다가 꺾지나 않을까 아주 걱정이예요. 날씨가 쌀쌀해지면 화분에 옮겨 담어 방안에 들여놔야겠어요. 줄기만 잘 쳐주면 내년엔 제법 꽃송이가 늘어날 테죠. 물론 거름도 줘야죠. 아마 친정 어머니가 보시면 깜짝 놀라시겠죠.벌써 이렇게 자랐나 하고 말예요. [성삼문] 곧 겨울이 닥쳐 오겠지--- 눈발이 날리고, 강물이 얼어 붙고--- [성,아내] 눈니 쌓이면 또 애들이 극성을 부리겠죠. 눈사람을 만든다, 눈 쌈을 한다 하고 온통 눈을 뒤집어 쓰고 마루며 방안으로 들락거리겠죠. 겨울에는 아이들 뒤치닥거리 하다가 하루 해가 진다니까요. 그러나 새해가 되면 애들이 한 살씩 더 먹으니 얼마나 대견스러워요. [성삼문] 줄이 끊어지면 연은 어디로 날아갈까? 하늘 높이 올라갈까? 끝까지--- [성, 아내] 애들은 연이 바람에 날려 실이 끊어지면 하늘 높이 날아서 부처님한테 간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극락의 부처님한테 전한다고 연에다 편지를 쓰겠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염려없어요. 줄이 그렇게 튼튼하니까요.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아마 그떡하지도 않을 거예요.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아마 그떡하지도 않을 거예요. (사라진다. 성삼문 멍하니 서 있다.) (사라진다. 성삼문 멍하니 서 있다.) [장] 5장 [장] 5장 밤, 성삼문의 집, 등불아래 무릎을 꿇고 성삼문 앉아 있다. 바람소리 들린다. [성삼문] 나가야 합니까? 나가야 합니까? 이대로 나가야 합니까? (先王(선왕) 문종의 영상 나타난다.) [문종] 나가야 한다! [성삼문] 허나 망설여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토록 사지가 떨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문종] 누구나 처음에는 망설여지고 떨리는 법, 허나 그것은 짧은 시간, 나가야 할 시간이 닥쳐오면 네 몸 구석구석에서 환히의 물결이 퍼져올 것이다. [성삼문] 내가 지금부터 가야할 길이 정당한 길이옵니까? [문종] 그렇다. 정당한 길이다. [성삼문] 헌데 왜 이다지도 외롭습니까? [문종] 정당한 길을 걷는 자는 언제나 외로운 거란다. 그러나 네 의지의 밑바닥을 네려다 보아라. 검은 심연 속에서 네게 살며시 미소로 띄우는 얼굴이 보일 [페이지] 103 것이다. [성삼문] 그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얼굴입니까? [문종] 하늘의 얼굴이다. 여지껏 네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이 밝은 태양처럼 네 가슴속에 떠오르고 있다. 그것이 하늘의 얼굴이다.언제나 네 곁에 있던 얼굴이다. [성삼문] 이제부터 저는 그 얼굴과만 대화를 해야 합니까? [문종] 그렇다. 그 얼굴은 네 물음에 무엇이든지 대답해 줄 것이다. 그의 말대로 네가 행동하거라! [성삼문] 내가 받아야 할 가장 큰 고통은 무엇입니까? [문종] 너를 주축으로 하여 맺어진주위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야 하는 것이다.이제부터 너는 외계에 홀로 떨어져 나간 유성과 같은 몸이다. 네 사랑하는 아내, 네 사랑하는 아이들, 즐겨 나누던 친우들, 호젓이 약수를 마시러 다니던 동산의 오솔길은 이제 너를 벗어난 타계의 꿈들이다. 그것이 괴로운 일이다. [성삼문] 그래도 나가야 합니까? [문종] 나가야 한다! [성삼문] 누구십니까? [문종] 너를 가장 사랑하던 선왕 문종이다. [성삼문] 문종전하! (암전) (암전) [장] 6장 [장] 6장 낮, 궁궐,수양대군과 신숙주가 서 있고 한 쪽에는 나졸들이 시립하고 있다.수양의 의복은 화려한 어의로 바뀌어져 있다. [수양] 대감,이번거사에 대감의 공이 많았소.이번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으로 역사에 기리 대감의 이름이 남을 것이오. [신숙주] 전하, 황공하옵니다. [수양]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번에 내각을 대폭 개정하여 영의정에 정인지, 좌의정에 정창손, 그리고 특히 이번 정난에 공이 지대한 한명회에게는 이조판서를, 그리고 대감에게는 좌찬성의 중요한 자리를 하사하게 된 것이요. [신숙주] 무눙한 소인에겐 과분한 직책이옵니다. [수양] 내 대감의 뛰어난 재질은 평소부터 잘 알고 있던 터이요. 벌써 오래된 얘기지. 대감과 내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선왕 문종전하 시절에 명나라 사신으로 내가 선발이 돼서 떠나게 될때, 그 때 선왕은 굳이 부마(사위)를 동행시키려 했으나, 내가 극구 진언을 하여 당시 집현전의 교리 자리에 있던 대감을 종사관으로 추천해서 나와 동행하도록 했었지. 기억나오? [페이지] 104 [신숙주] 기억납니다 전하! [수양] 그 때부터 나는 대감의 재능이 비범함을 알고 있었오. 대강의 뛰어난 시재(詩才)와 능통하게 구사하는 중국어에는 따를 자가 없었지. (웃음) [신숙주] 과분한 칭찬의 말씀을--- [수양] (회심에 잠겨) 세상은 돌고 도는것, 이제 한사람은 왕의 신분으로, 그리고 또 한사람은 좌찬성의 신분으로서 지난날의 회포에 젖어 있으니 감개 무량하구려. 안그렀오, 대감? [신숙주] 전하의 말씀대로 감개무량합니다. [수양] 보시요 대감, 난 그래도 의리에 밝은 사람이오. 의리를 저버리거나 공적을 외면하는 그런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란 말이요. 알겠오? 이제 피의 숙청도 끝났오. 우리들 앞에는 이제 해결되고 시정되어야 할 막대한 국사만이 남아 있오. 이제, 오직 대감들의 솔직한 견해와 허심 탄회한 협조만이 남아 있오이다. [신숙주] 능력껏 전하를 보필하겠읍니다. [신숙주] 능력껏 전하를 보필하겠읍니다. (이때 요란한 웃음소리를 나며 한명회가 득의 양양하게 들어온다.) (이때 요란한 웃음소리를 나며 한명회가 득의 양양하게 들어온다.) [한명회] 전하! 옥체 만강하옵십니까? (읍한다.) [수양] 너무 그렇게 존대치 마오. 아직 왕의 체모가 몸에 배지 않아서 어색하외다, 대감. [한명회] 전하께 소인이 마지막 선물을 진상할까 하옵니다. [수양] 선물은 갑자기 무슨 선물이오? [한명회]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전하. 전하께 반역을 꾀하는 일당들을 체포하였읍니다. [수양] 반역이라구? [한명회] 이것으로서 아마 거추장스런 방해물이 모두 없어진 줄 압니다. [수양] 그게 무슨 말이요, 대감. [한명회] 지난번 창덕궁 광연전에서 있었던 명나라 사신 환영 초대연에서 반정을 거사하려던 성삼문과 유응부 일당들이 체포되었읍니다. [수양] 성삼문? [한명회] 성삼문이-? [수양] 어느 미친개들이 또다시 피를 흘리기 위해서 발광을 했단 말이냐? 어느 누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참신한 세력에게 찬물을 끼얹으려 했단 말이냐? 감히 누가 이 세조에게 반기를 들었단 말이냐. 누가 더 피를 보기를 원하느냐? [한명회] 김질이라는 한패를 매수했읍니다. 약한 녀석은 칼 앞에 굴복하거나 돈 앞에서 매수되지 않고 못배기는 법입니다. 김질이라는 녀석이 자초지종을 전부 고백했읍니다. [[수양] 그래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페이지] 105 [한명회] 광연전 축하연 때 전하의 신변을 보호라기 위하여 무장을 하고 시립하려 했던 유응부가 전하의 목을 베기로 하고 동부승지 성삼문은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합니다. [수양] 자기집 개에게 뒤꿈치를 물린 격이로구나! [한명회] 이미 정보가 내 손아귀에 접수된 후라서,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당일의 의전 절차를 변경했읍니다. [수양] 대감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더라면 미친 개들의 칼에 황천객이 될 뻔 했구려. [한명회] 구사일생, 하늘의 도움으로 전하의 옥체가 건재하게 된 것입니다. [수양] 나는 그래도 학자들에게는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더군다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선왕代(대)의 공적을 감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번의 숙청에서 제외시켜 회유의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었다. 헌데, 살아 남은 은덕은 생각지 않고 이미 왕으로 옹립이 된 나를 축출시키려 음모를 했다니. [한명회] 거지에게 동냥주고 뺨얻어 맞은 셈이죠. [수양] 성삼문, 난 누구보다 그를 아껴왔다. 젊고 패기에 넘치며 호탕하고 검소한 그를 많은 학자들 중에서두 나는 제일 그를 아껴왔다.선왕 세종전하 시절에는 나의 유일한 술친구였었지.언제나 나와 허심탄회하게 농을 주고 받았다.그래서 이번 피비린내 나는 참극의 와중에서 은근히 그를 제외시켰다. 그런데 이제 그가, 나에게 비수를 내밀어? 도대체 어떤 배은망덕한 인간의 소견에서 그런 망발이 나왔단 말인가? 그놈의 얼굴을 보구 싶다.살아서 움직이는 그놈의 상판을 보구 싶다.어서 이곳으로 대령시켜라, 내가 아무리 일국의 상감의 신분이지만 친히 내 손으로 그놈의 진의를 타진해 보겠다. 어서,내 앞에 끌고 들어와 봐라! 들어와 봐라! (한명회 밖을 향해 날렵하게 손짓한다. 하수인 임운이 포승에 포박된 성삼문과 유응부를 끌고 들어온다. 신숙주와 성삼문 오래도록 마주 보고 서 있다.) 유응부를 끌고 들어온다. 신숙주와 성삼문 오래도록 마주 보고 서 있다.) 너희들은 지금 왕앞에 나와 있다. 무릎을 꿇어라. 너희들은 지금 왕앞에 나와 있다. 무릎을 꿇어라. (두사람 움직이지 않는다.) (두사람 움직이지 않는다.) 무릎을 끓어라, 너희들 앞에 지금 아니꼽겠지만 왕이 서 있다. 무릎을 꿇어라. [성삼문] 충신은 두 사람의 임금을 모시지 않소이다. [수양] 그럼 네게는 누가 임금이냐? [성삼문] 선왕의 유청으로 계승된 단종전하가 있읍니다. [수양] (차분히) 단종은 지금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수강궁에 유폐되어 있다. 지금의 왕은 나다! 단종 [페이지] 106 으로부터 엄연히 선양받은 세조가 네 앞에 서 있다. [성삼문] 선양이 아니라 강탈이었소, 나으리. [수양] 나으리? (웃음) 나보구 나으리라구 불렀다! [성삼문] 엄연히 수양나으리요, 단종전하의 삼촌이시오. [수양] 다시 말한다. 국왕이 네 앞에 서 있다. 합법적으로 옥쇄를 하사받은 세조가 서 있다. 어서 엎드려라. 자, 무릎을 꿇어야지.동부승지에까지 오른 학자가 그만한 예의를 몰라서 되나. 자, 어서 엎드려라. [성삼문] 나으리, 나보구 두 임금을 모시라고 강요하는구려. [수양] (크게 웃르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무언가 억제하려는 듯이) 하,하, 나는 이럴때가 제일 난처해. 나의 말을 상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때, 그 때가 제일 난처해진다니까.어렸을 때는 내시들의 등줄기를 때리며 엉엉 울어댔는데- 지금은 울 수도 없구. [한명회] 지금도 때리거나 두둘기시면 쉽게 풀리게 될텐데요. 전하, 왜 있지 않읍니까? 여러가지--- 예를 들면 이런거 말씀입니다. 않읍니까? 여러가지--- 예를 들면 이런거 말씀입니다. (들고 있던 칼집으로 성삼문과 유응부의 정강이를 내리쳐서 앉게 만든다.) (들고 있던 칼집으로 성삼문과 유응부의 정강이를 내리쳐서 앉게 만든다.) 얼마나 편리하고 쉽습니까, 전하. [수양] (더 크게 웃으며) 그걸 몰랐구먼, 그걸 몰랐어! 예나 지금이나 두둘겨야 해결이 되는구먼. 해결이 되는구먼.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주위를 매처럼 빙글 빙글 돌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주위를 매처럼 빙글 빙글 돌며) 왜 나를 죽이려 했나? 그것이 가장 궁금한데- [유응부] 간사한 모사들과 규합하여 선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좌에 앉은 역적이기 때문에 죽이려 했오. [수양] 어떻게 나를 죽이려 했지. [유응부] 광연전 연횟날 내가 대감의 목을 베어서 죽이려 했오. [수양] 이 놈은, 말하는 걸 보니 뛰어난 천재가 아니면 미친놈이다. 둘 중에 하나야. 허나, 내가 보기에는 미친쪽에 가까운 것 같애. 이 놈은 우선 끌고 나가 나중에 심문하겠다. 나중에 심문하겠다. (임운, 유응부를 끌고 나간다. 수양, 성삼문에게) (임운, 유응부를 끌고 나간다. 수양, 성삼문에게) 이번 음모의 주모자는 누구냐? [성삼문] (침착히) 나, 성삼문이오. [수양] 나머지 동조자들은? [성삼문] 이미 체포된 이개,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이상이오. [페이지] 107 [수양] 불과 여섯명으로 대사를 음모했다고 믿어지지가 않아. 나머지 동조자나 연고자를 대봐. [성삼문] 백번 죽어두 그 이상은 없소이다. [수양] 자, 이럴 때 또 난처해진단 말이야. 쥐꼬리만한 자신의 의지를 신주처럼 믿고 이렇게 버티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난처해진다니까. [한명회] (수양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전하, 그래서 자고로 고문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수양] 고문? [한명회] 고문은 아무리 두터운 의지의 철판도 뚫습니다. 그리고 고문은 숭고한 정신력의 억센 표피를 파괴 시켜 줍니다. 전하, 그래서 고문은 편리한 것입니다.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지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지요. (한명회 야무지게 밖을 향해 손벽을 두번 친다. 임운이 인두가 가득 꽂힌 청동화로를 들고 들어온다.청동화로에서는 파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청동화로를 들고 들어온다.청동화로에서는 파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 불꽃이 곱기두 하구나. 참, 불꽃이 곱기두 하구나. (수양 어의를 벗어던지고 소매를 천천히 걷으며 앞으로 나온다.) (수양 어의를 벗어던지고 소매를 천천히 걷으며 앞으로 나온다.) [수양] 부득불 나도 지름길을 택할 수 밖에 없구나. 자, 다시 묻는다. 동조자와 연고자를 말해라. [성삼문] 없소! [성삼문] 없소! (수양, 인두를 하나 집어들고, 임운에게 눈짓하면 임운 성삼문의 상의를 벗긴다. 수양 인두로 성삼문의 등을 지진다. 연기가 꿈틀거리며 피어오른다.) 벗긴다. 수양 인두로 성삼문의 등을 지진다. 연기가 꿈틀거리며 피어오른다.) [수양] 다시 묻는다. 동조자와 연고자를 말해라. [성삼문] 없소. [성삼문] 없소. (수양, 다시 더 큰 인두를 꺼내서 성삼문의 등을 지진다. 연기가 오른다.) (수양, 다시 더 큰 인두를 꺼내서 성삼문의 등을 지진다. 연기가 오른다.) [한명회] 고문은 의지와 정신력을 파괴시킨다. 감각기관이나 신경계통을 통하여 육신의 구석까지 파고들어가 고통과 자극으로 인간과 동물의 사이에 놓인 엷은 막을 찢어버린다. 막을 찢어버린다. (한명회의 주문과도 같은 설교 속에서 호리죤트는 여러가지 색으로 변형된다. 수양, 점점 광인의 몸짓으로 속도와 힘을 가하여 고문의 마임을 계속한다.) 수양, 점점 광인의 몸짓으로 속도와 힘을 가하여 고문의 마임을 계속한다.) 고문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잠을 재우지 않거나, 밝은 불빛속에 오래 세워두는 경우도 있고,요 [페이지] 108 란한 소음속에 가두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육체에 직접 자극을 준다. 예리한 바늘로 전신을 찌르는 수도 있고 찝개로 손톱이나 발톱을 빼는 수도 종종 있다. 간혹 뜨거운 촛농을 손등 위에 장시간 떨어트리는 때도 있으나 코나 입속에 뜨거운 물을 붙는 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뜨거운 물을 붙는 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성삼문 기절한다.) (성삼문 기절한다.) 육체의 고통이 한계를 넘으면 정신력이 분열되고 감각이 마비되어 체내의 모든 기능이 제구실을 정지하기 때문에 의식을 잃고 졸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쉽게 죽지는 않는다. 천천히 一幕(일막)의 막이 내린다. 천천히 一幕(일막)의 막이 내린다. [막] 2막 [장] 1장 [장] 1장 밤, 감옥, 성삼문이 신숙주와 창살을 사이에 두고 대좌하고 있다. 중천에 떠있는 달. [성삼문] 날 비웃으러 왔오. 대감이 전에 말한대로 피투성이가 됐으니 비웃어 마땅하겠지. [신숙주] 성대감! [성삼문] 허나 나는 아직 혼을 팔지 않았오. 육신은 멍이 들고, 피부의 껍질이 검붉게 타올라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지만 내 혼만은 아직 푸르게 살아 있오이다. [신숙주] 성대감! 수양께서는 나를 보내서 대감을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라 하셨오. 이대로 가다가는 대감은 필경 고문에 지쳐서 죽게 될 것이오. 다시한번 생각해 보시구려. [성삼문] 생각을 해보라니, 내 혼을 팔아 넘기란 말이오. [신숙주] (두루마리를 꺼내며) 여기 집현전 학자들의 연명부가 작성되었오. 세조의 왕권을 인정하여 여기에 서명만 하면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하였오. [성삼문] 용서? 누가 나를 용서해 주겠다는 거요, 수양이 그럽디까? 당치도 않을 소리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수양이요. 용서를 비는 것은 으례 죄인이 하는 법, 내가 무엇때문에 용서를 구하고 그 비굴한 연명부에 서명을 해야 한단 말이요. 세조의 왕권을 인정하라구? 거듭 말하지만 하늘에 해가 둘이 없듯이 나라에도 왕은 둘이 있을 수 없오. 충신은 한 임금을 모시는 것이 옳은 마음가짐이거늘 어찌하여 역적이 되라 하시는 거요. 쓸데없는 헛수고 하지 말고 어서 수양에게 돌아가서 국사나 논하구려. [신숙주] 성대감, 내가 성대감의 절개를 유린하기 위하여 여기와 있는 게 아니오. 누구보다도 성대감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요. 변절을 시키거나 설득을 시키러 [페이지] 109 온 게 아니고 협조를 구하러 온 것 뿐이외다. 성대감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 줄 잘 알고 있오이다. 성대감의 온몸에 고문의 핏자욱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의 마음도 그와 못지 않게 괴롭기 한이 없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대감을 고통 속에서, 그리고 죽엄에서 구하는 것뿐이오. [성삼문] 동정을 하기 위하여 나를 찾아 왔다면 차라리 그만 두는 게 낫오. 이 철장에서는 오히려 맘이 편하고 속이 청결해지는 듯하오.오히려 창살 밖에서 서성대는 신대감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하게 느껴는구려. [신숙주] 얼마든지 비웃고 야유를 하구려. 내가 성대감만 구할 수 있다면 어떠한 모욕도 다 견디리다.그러나 부탁이요 단 한번만, 내 말을 들어 주구려. 성대감의 그토록 청결하고 곧게 살아 온 일생 중에 마지막으로 꼭 한번만「네」라구 대답해 주구려.그 작은 한마디로서 짧고 간단한 한마디로서 성대감은 이 치욕과 고통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오. 부탁이요. 한번만「네」라구 대답해 주구려. [성삼문] 한번? 한번이라구, 짧고 간단한 소리로 「네」라고 대답을 한다. 부끄러운 듯이, 그리고 아무도 듯지 못하게, 어물쩍「네」라고 대답만 하면 남은 여생을 안락하게 가족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그리고 약수터의 오솔길을 다시 걸으며 편안히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내의 국화꽃 얘기를 들으며, 천진나만한 아이들의 붉은 볼 위에 입을 맞추며, 산등성이 넘어로 훨훨 떠오르는 연을 바라보머, 그리고 아내의 사랑스런 손길로 다듬어진 싱그러운 비누냄새가 풍기는 흰두루마기를 걸치며 즐거움에 겨운 일상의 시간속에 나를 떠내려 보내 수 있단 말인가---? 「네」라고 짧고 간단하게 대답만 한다면---? [신숙주] 여기에 간략하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서명을 하면 되오. 성대감! [신숙주] 수양대감은 이미 상감으로 등극하였고, 그의 확고한 세력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세조임금의 당연한 시대를 맞이하는 거라오. 부정할 수도, 저항할 수도없이---우리의 속절없이 늙어가는 나이와 함께 같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야 할 뿐이오. 성대감! [성삼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그저 약삭빠르고 계교스럽게 살아 가는 생활의 비결을 귀띔해 주며 「적당히 살아야 한다.」「남에게 져서는 안된다.」「정의란 세상에 없단다.」「봐라, 네 아버지는 얼마나 능수능란 하냐?」 어른이 된 아이들은 도처에서 「네」「네」라는 대답으로 정의를 실현시키다 이 나라를 좀먹어 올 테지. [신숙주] 「네」라고 대답을 백번 해서라도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대답은 얼마든지 계속해야 되오. 생활 속에서 생명을 영위하는 현실속에서, 부정과 싸우며 [페이지] 110 정의를 차츰 실현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이오. [성삼문] 현명한 것과 진실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있오. 이세상의 모든 사람이 순교자가 될 수도 없으며 또 돼서는 안되오. 허나 죽엄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고매한 인격들이 가끔 태어나고 있오. 그들은 불의 앞에서 스스로의 작은 생명을 불태워 어둠을 잠시 밝히게 되오. 어둠속에서 방향을 잃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불빛으로 방향과 길을 가늠하고 자기들이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하게 되는 거요, 순교는 잠시동안 피어오르는 작은 불빛이오. 그리고 하나의 작은 충격이며, 단잠을 깨워주는 새벽의 인경의 소리와 같은 거요.때가 되면 누군가는 그것을 족해야만 되오. 그 사명을 계시받은 사람은 비굴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네」라는 구차스런 대답을 하지 않는 법이오.자라나는 아이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니오」라는 대답도 해야한다는 확실한 교훈을 얻게 되며, 어른이 된그들은 「아니오」라고 말하며 죽어가는 새로운 순교자가 되는 거요. 나라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왕위계승 원칙이 있오. 이것은 이태조가 이 나라를 건축한 이래 국법으로 내려온 원칙이오. 선왕은 왕자들중에서 유능한 아들을 골라 세자로 책봉을 하게 되며 세자로 책봉된 왕자는 선왕이 승하하거나 노쇠하여 차차 그 능력을 다할 수 없을 때 유명에 따라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왕위를 받게 되는 것이오. 이것은 법이고 원칙이며, 진리라고 말할 수 있오--- 그런데 이 진리를 부정하고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무력을 구사하여 왕위에 오른 자가 있오. 이유야 어떻든, 그 부정한 행위가 정의로서 이 나라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오.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부정을 정의로 받아들여 동조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이요. 이제 수많은 왕위의 지망생들이 언제 어디서 똑같은 방법으로 반기를 들고 궁궐로 몰려들어 올지 모르는 일이오. 앉은 자와 뺏으려는 자와 혈투는 밤낮없이 계속되고 백성은 법과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혼란 속에 빠지게 돼 서로 죽이고 약탈하는 수라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 명백한 일이오. 나는 마지막으로 「네」라고 대답하는 나의 행동이 이러한 비극을 초래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제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거요. [신숙주] 나는 성대감이 충신이나 순교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소. 다만 나의 친구로서 서로 벌거벗고 마주서서 우정을 깊이 나누는 친구로서 내 곁에 있기를 원하고 있오. 옛날의 아름다운 교분을 알뜰히 붙잡고 애걸하는 당신의 가련한 친구가 여기에 있오이다.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우. 생각나오? 성대감, 우리가 20代(대)의 약관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집현전에 등청하던 때를 --- [성삼문] (웃으며) 지나간 것은 늘 무지개처럼 곱게 느껴진다고 그러더군. [페이지] 111 [신숙주] 정음청이란걸 개설하셔서 우리를 글자 만드는 일에 전념시키셨지. 해가 경회루 처마너머로 살며시 스며들면 우리는 어둠이 땅에 깔리는 경복궁의 뜰을 지나 다정스럽게 퇴청을 하였지. 성대감은 늘 돈의문 밖 삼거리에서 「숙주, 우리 주막에 들러 한잔 하는 게 어때.」하고 유쾌하게 웃어대면서 주막집으로 갔었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선비의 신분도 다 잊어버리고 비분강개하며 국사를 논하고 술상을 주먹으로 쳐가면서 외교정책을 역설하곤 했지. 생각나오? 그 때가 우리가 하도 술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세종전하께서 들으시고 어느 날인가는 「자네들은 깨어있는 시간보다 취해 있는 시간이 더 많다니, 그러다가 한글이 꼬불꼬불하게 창안되면 어쩔텐가.」이렇게 농담을 하시며 인자하게 웃으시던 일이 있었지. 한글을 창제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날 거리의 주막집을 누비며 3차, 4차까지 술을 퍼마셨지. 언젠가 세종전하께서 신병의 치료를 위하여 온양으로 행차하시던 날 상감께서는 우리들을 특별히 동행을 명하셨오. 행렬이 천안에 이를 때 상감께서는 어가를 멈추게 하시고는 「자네들 얼굴을 보니 술생각이 꽤 나는 모양이군.」우리가 머리를 들지 못하고 황송해하자 상감께서는 나인들을 시켜 큰 술병을 내리게 하시더니 큰 잔으로 가득히 법주를 따라 주면서「내가 술을 하사하는 대신 자네들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올리게.」하셨지. 그때 성대감이 먼저 시를 지어 올려 드렸지. [성삼문]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고 살았으니 평생에 먹은 마음 변할 리가 있으리오 이 몸은 오직 충과 의를 위함이니 청산의 푸른 송백 꿈 속에 못잊혀라. 청산의 푸른 송백 꿈 속에 못잊혀라. (인경소리 요란한 중에 암전) (인경소리 요란한 중에 암전) [장] 2장 [장] 2장 밤, 어전 수양대군과 몹시 피곤해 보이는 성삼문, 한쪽에는 「保國安民」(보국안민)「泰平盛大」(태평성대)라는 깃발이 세워져 있고 많은 서적들이 쌓여 있다. 번개와 천둥. [수양] 좌찬성 신숙주를 통하여 보낸 연명부에 서명을 거절하였다면서? [성삼문] 그렇소! [수양] 나는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행여 구해낼 방법이 없나 하고 여러 대신을 감옥으로 보내어 최선을 다해 자네를 회절시키려고 노력을 해왔어. 그 때마다 자네는 일언지하게 거절하여 나의 한가닥 호의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찬물을 끼얹었지. [성삼문]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고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페이지] 112 하며 살았겠오. 어서 내 갈길로 보내 주시오. [수양] 지식? 학자라는 자네들은 그 지식이라는 괴물때문에 그토록 오만해지나? 도대체 지식이라는 게 뭔가? 반대하는 게 지식인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게 지식이야? 매사를 논리로 따지고 분석하며 난도질하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게 자네들 선비들이 하는 짓이야! 무조건「아니」라는 거야!왜 아니야고 물으면 동서고금을 통한 이론과 학문에서 당치도 않은 괴변들을 끌어들여 그럴듯하게 합리화를 시키고는 선비다운 행색을 하며 쾌재를 부르고 앉아 있는 것이 너희들 선비들이 하는 짓이야! 언제나 명분! 명분에만 사로잡혀 삼강오륜이 어떠니 공맹이 어떠니 하고 이미 남이 쌓아놓은 지식위에 올라 앉아서는 마치 자기가 신선이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반대만 내세우고 있는 샛님들이 바로 너희들 학자 놈들이야!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어! 백성들이 피땀을 흘려 농사를 지을 때 너희 선비란 놈들은 따뜻한 아랫목이나 정자에 앉아 돼먹지도 않은 산수나 음어대고 술이나 퍼마시고 기생방의 문전이나 들락거리는 게 고작 너희들 선바들이 하는 짓이야. [성삼문] 전부가 그렇지는 않소. 선비의 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오. 패륜적인 탕아들을 예로 들어 지식과 학문을 모독하는 것은 대감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오. [수양] 누구나 자기는 선량하고 유능한 학자라고 생각하지. 벽에다가 난초를 그려 붙여 놓고서 자기만은 청렴결백하다고 오만을 떨고 있어. 가소롭게도 충절을 소나무에 비교하며 마치 이 세상은 전부 역적, 탕아, 탕녀들만이 들끓는데 자기만이 청백하게 유아독존한다고 망상을 하고 있다. 그게 너희들 선비들 생각이야. 마치 소박한 듯이 도포자락을 펄럭거리며 짚신을 꿰여 신고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듯 상놈들이나 다니는 허술한 주막에 들러 위안 삼고, 그리고는 조정에서 하는 일에는 무조건 손을 내저으며 반대를 한다. 반대를 하기위한 반대, 반대를 하여 자기의 무능한 학식과 능력을 과시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하는 게 선비들이란 말이다. [성삼문] 선비는 나라의 양심, 학자는 나라의 기둥, 이제 대감은 마음대로 나라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기 위해서는 눈의 가시같은 ---신발속의 모래 같은 지식을 혐오하고 있는 거요. [수양] 네가 말한대로 난 지식과 학문은 뛰어나지 못했다 해도, 단호한 결단력과 모든 것을 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정열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부러지는 일은 있었어도 너희들처럼 애매모호하게 휘는 법은 없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세상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너희들보다는 훨씬 건전해. 너와 함께 모 [페이지] 113 의에 가담했던 유성원이라는 놈이 자살을 했다. [성삼문] 유성원이? [성삼문] 유성원이? (번개 천둥) (번개 천둥) [수양] 비겁하게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사당에다 절을 하고는 엉금엉금 방구석으로 기어가 자살을 했대. 왜 정정당당하게 나서지를 못해. 자기의 주장을 왜 떳떳하게 피력하지 못하고 이집 저집으로 숨어 다니다가 비굴하게 자살을 해. 그게 선비들이 하는 짓인가?일을 저질러 놓고 보니 겁이 났던 거야. 자기의 동지들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혼자서 살아보겠다고 버둥대다가 사면초가, 사방이 막히니까 겨우 자살하는 정도야. 대의명분은 좋았지. 불법으로 와위에 오른 수양을 몰아내자, 그럴싸한 명분아래 뭉친 겁쟁이 꽁생원들이 사태가 불리하니까 겁에 질려 자살하는 게 선비들의 최후란 말이다. 소외당한 감정 때문에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대정 혁신을 하려다 실패하니까, 아무 대안도 없는 자기들의 음모가 죄스러웠던 거지. 또 김질이란 놈은 어땠나? 자네들 음모의 참모 역할을 한 녀석이 우리가 던져주는 2백량에 매수가 돼서 자네들을 배반했어. 아주 훌륭한 선비들이지. 김질이란 녀석이 내게 와서 뭐라고 아양을 떨었는지 알어?「정이품 정도의 벼슬만 주신다면 분골쇄신 대감께 충성을 바치겠나이다.」하고 백번이나 절을 했어. [성삼문] 인간의 약함을 이용하여 매수하는 것은 더욱 악랄하고 비굴한 처사요. [수양] 아무 조직도 없이 아무 능력도 없이 그저 걸레쪽 같은 대의 명분만을 믿고 거사를 꾸몄든 거야. 어리석은 자들, 아마 거사가 성공을 했더라면 더욱 꼴불견이었을 걸. 우후죽순처럼 들고 일어나 감투 싸움에 재물 분배 싸움에 어지간히 소란을 피웠을 거야. 그게 선비들이란 거야. 나는 너희들처럼 고리타분한 학식도 없었지만,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거사를 성공 시켰으며, 감투와 재물도 분에 어울리게 안배했어! 어느 누구도 나에게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이것이 너희들 선비보다 훌륭한 능력이란 거야. [성삼문] 그러한 능수능란하고 완전무결한 힘으로서 선왕에게 충서하여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기를 들어 옥좌를 강탈했으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구려. [수양] 왕은 명예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중심 인물이야. 국책을 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실천자야. 헌데 단종한테는 그러한 능력이 없어. 대왕대비의 치맛자락에나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애에 불과해. 어느알 나는 백성들의 동태를 관찰하기 위해 평복으로 갈아 입고 경기도 광주에 내려가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려니까, 어느집 마당 앞에 사람들이 [페이지] 114 몰려 있길래, 내 그 연유를 물었더니 지금 젊은 아낙네가 고을의 포졸들에게 끌려가는 길이라고 하더군.왜 끌려가느냐고 물었더니, 먹고 살길이 하도 막막하여 어린 두 자식을 목을 졸라 죽였다는 거야. 나라에서 거둬가는 세금은 너무 많고 거듭되는 흉년에 살 길이 없었다는 거야. 결국 그 젊은 아낙네는 자식을 죽인 죄인으로 관가에 끌려가는 중이라는 얘기였어. 난 그때 동정보다는 분노가 끌어 올랐다. 백성들의 형편에는 아랑곳 없는 탐관오리들이 매관매직을 일삼는 궁궐의 신하들이, 죽이고 싶도록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는 이것을 꼭 해결해야 한다고. 그 아낙네 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후 나는 심한 고민 속에 빠지게 됐어. 밤마다 악몽을 꾸게 되고, 분노와 증오가 온 몸을 엄습해와, 온몸을 땀으로 적시거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이가 일쑤였다. 그 때만 해도 내가 왕좌에 앉고 싶다는 욕망은 전혀 없었다. [성삼문] 허지만 내가 해결해야겠다는 자만심이 싹 터 왔겠지. [수양] 그렇다, 나도 알 수 없는 힘들이 내 등을 떠밀어 피할 수 없는 사명감 앞으로 접근해 갔다. [성삼문] 그리고는 왕이 어리다는 타당한 이유를 발견하는데 성공을 했겠지. [수양] 북에서는 명나라와 야인들이 번갈아 손을 내밀어 위협적으로 조공을 뺏어가고 국경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끌고갔다. 애초에 버릇들을 잘 못들여, 잔뜩 입맛이 붙은 명나라와 야인들은 이러쿵 저러쿵 내정에까지 간섭을 하고 국교를 트자 무역을 확대하자 하며, 반 침략적으로 이 땅을 설치고 다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여기에 대해서 국론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왕에게 상소하는 자가 없었다. 왕에게 상소해봤자 소용이 없어서 그렇겠지. 어린왕이란 작자는 궁녀들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허구한 날을 어전의 뒷뜰에서 숨밖꼭질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손구락이나 빨며, 과일이나 찾고, 피곤하면 왕비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자는 게 일국의 상감이 하는 일과였으니까. 남쪽에서도 야단이 났었다. 일본 상선들이 무기를 잔뜩 싣고 와서는 거래를 하지 않으면 포구를 불지르겠다느니 하며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일본이란 나라가 지도상에 어느쪽에 붙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천방지축이었어. [성삼문] 그러나 왕을 보필하고 있는 삼정승 및 각조 판서와 대신이 얼마든지 있었오.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조정이였오. [수양] 그자들이 하는 짓이 뭣인지나 아나? 왕이 어리 [페이지] 115 다는 핑계로 자기들 멋대로 국론을 정하고 자기들 뜻대루 감투를 사구 팔며, 한강에다 유람선을 띄우고는 매일같이 선유가나 부르고 있었어. 술잔이며 촛대며 심지어는 타구와 요강까지 금으로 만들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았구 심산유곡에 별당들이나 지어놓고 비싼 돈을 들여 대리석 석계를 쌓아올리는가 하면, 이 나라에서는 나지도 않는 고급 물감을 중국에서 사 들여 호화찬란하게 단청을 그려 놓고 사군자 병풍을 사방에 둘러친 속에서 첩년들이 뜅겨주는 가야금 소리에 맞추어 회심가나 부르고 있었단 말일세. 얼빠진 군졸 놈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같은 칼이나 창을 잡히고 외상 술까지 퍼먹는 사태까지 이르게 됐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이 초근 목피로 연명을 하는데 조정의 관리라고 하는 자들은 주육지림 속에 파묻혀서 기껏 국사를 집무한다는 것이 백성에게 과중하게 세급이나 책정하는 일이고 팔도의 절제사나 그 휘하 고을의 원님들이라는 것들이 뇌물로 상납하는 물품의 품목이나 정리하고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단 말이야.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어야만 되나? 철면피들의 난장판을 모른 체하고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이야.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이야. (천둥 번개) (천둥 번개) 그 때부터 분노와 증오로 세월 보내던 가련한 젊은이는 애국 충정에 온 몸이 불타기 시작했으며 국난을 타개할 수 있는 계획과 방법을 연구하여 그 백서를 작성하게 됐지. 어느날 한명회가 나에게 찾아와서 무력 봉기할 것을 제의했다. 한명회라고 하면 물론 자네는 치를 떨 테지만 지략에는 능한 녀석이야. 나도 물론 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내가 갖지 못한 비상한 재주가 있음을 알개 됐고, 그 때부터 그의 재주와 능력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백배 이용하기로 결심을 했다. 비상도 적절하게 사용하면 훌륭한 약효를 발휘하는 법이다. 나는 한명회라는 비상을 나의 애국충정이라는 한 약속에 조금씩 섞어서 사용하기 시작했어. 그 약효는 놀라울 정도로 좋아 만병 통치의 약이 되었오. [성삼문] 극약은 언제나 극약의 성분으로서 어느 부분엔가 남아있게 되오. 대감은 과도하게 극약의 양을 사용했기 때문에, 너무 많은 피를 보게 된것이오. 앞으로 점점 극약의 함량이 많아져서 극약을 통채로 사용할 때가 분명히 닥쳐올 것이오. [수양] 나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왕이 돼야겠다고 그 무렵 작정을 했다. 무능하고 철딱서니 없는 왕은 이 나라의 병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삼문] 왕의 권위와 왕관에 대한 유혹을 받아 대감의 [페이지] 116 야망에 불이 붙게 된 거요. 세종전하께서 장남인 문종을 세자로 책봉하시던 날, 차남이었던 대감께서는 옆자리에 서 계셨소. 흥겨운 풍악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세자책봉의 의식이 화려하게 진행되는 동안 나는 대감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을 아직도 기억하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왕관을 바라보며 속으로 울고 있던 대감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오이다. [수양] 철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왕좌의 권위에 대한 매력과 동경을 하게 된다. 비록 서열로서는 차남이였지만 행여 내게 왕위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었다. 왕좌의 신분으로서 부왕의 옥쇄를 계승받기를 원치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허나 그것은 철없는 시절의 얘기다. [성삼문] 철이 들어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대감의 한구석에는 왕관에 대한 미련과 야망이 도사리고 있었오. 왕이 갖는 객관적인 특혜, 다시말해서 옥좌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한다든가, 문무백관의 배례를 받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훈시를 한다든가, 백말이 끄는 마차를 타다든가, 사랑을 받으려고 다투어 품으로 달려드는 수백의 궁녀들, 용무의 얼룩진 어의---황금으로 채색된 왕관, 이런 것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유혹을 괴롭도록 받아 왔던 것이오. 어느날 숨겨졌던 야망의 끄나불 끝쪽에 작은 불이 붙기 시작했던 거요. 그리고 부끄러운 양심에 대한 변명으로 부패를, 외세의 위협을, 왕의 어린 나이를 그럴 듯하게 색칠을 해서 내세우게 된 것이오. 거듭 말하지만 단종전하는 왕좌의 야망에 눈이 어둔 자기 삼촌에게 의하여 억울하게 폐출된 것이외다. 삼촌에게 의하여 억울하게 폐출된 것이외다. (천둥 번개) (천둥 번개) [수양] (크게 소리내어 웃은 뒤) 단종전하? 너는 네 전하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끌어내어 전하!전하! 하는구나.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이 된 지 이미 오래야. 헌데 나를 보구 대감이라구? 네가 신주 모시듯이 그렇게 부르짖는 단종이란 과연 어떠한 위인인 줄 아나? (웃음) 내가 칼을 번척 빼어들어옆에서 앉았던 「조번」의 복을 내리치니까, 「삼촌, 무서워, 날 살려줘 삼촌!」하고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고 있더군. 알겠나? 그게 네가 존경하는 상감의 모습이다. 서류에 결재도 제대로 할 줄 몰라 신하들이 노란 딱지를 붙여줘야 그 자리에 동그라미를 쳐서 결재랍시고 하던 위인이야 궁녀들의 방이나 들락거리며 열심히 꽂감이나 얻어먹고 내시들의 등에 엎혀 왔다 갔다하는 게 너희들의 상감이었어. 잠자리에서 오줌이나 싸고, 천둥 번개만 쳐도 왕비의 젖가슴을 파고 들어 훌쩍훌쩍 울던 철딱서니 없는 애녀석이 너희들 [페이지] 117 의 상감이었다.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내 밑으로 태어난 선왕의 정비와 후비의 소생들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옥좌를 넘보고 있었어. 어느 땐가 철딱서니 없는 어린 상감을 쫓아내야겠다고 동상이몽들을 하며, 칼들을 갈고 있었지. [성삼문] 그 중에 대감도 한 사람이었지. [수양] 변명은 하지 않겠어. 허나 안평대군을 제외하고는 덜돼먹은 머저리들이야. 기껏 낫다는 안평대군이라는 것도 마포강에서 정자나 지어 놓고 얼치기 선비 녀석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뱃놀이에 시국담 이론으로 소일하던 한량이었으니까. 내게 자신을 갖게 했던 것이 바로 안평대군이었어. 얼치기 한량손에 나라가 넘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써야겠다고 작정을 했으니까. 내 능력의 과신이라기 보다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미덕이라는 이름 아래 피한다는 것이 비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성삼문] 아직도 늦지 않았오, 대감. 선왕의 묘혈을 파는 반역의 깃발을 걷어 치우며 지금이라도 단종전하를 다시 옥좌에 복귀시키구려. 그 길만이 나라와 대감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오. [수양] (무겁게 배회하다가) 단종은 여기에 없다. [성삼문] (놀라) 여기에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수양] (차분히)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냈다. [성삼문] 유배를? [수양] 놀라지 마라.일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제 새벽 금부도사「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영월로 떠났다. 지금 쯤은 모든 것이 끝나, 침묵만이 흐를 것이다. (성삼문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왕방연이 떠날 때 특별 부탁을 해서 만약 눈치를 채고 사약을 마시지 않을 때는 목을 졸라 죽이라고 명령을 했다. 이것만이 백성들과 너희들의 뇌리 속에서 단종의 환상을 지우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 부득이 세조의 시대는 오고 말았다. 싫건, 좋건 나를 따르고 나를 보필해야 하며 나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 나를 너무 멸시하거나 원망하지 마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단지 수양이라는 인물이 기꺼이 나서서 한 것 뿐이다. 나를 동정하고 나를 이해하여 다오. 피를 보기 즐겨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수백명의 몸에서 흘러내린 늪속에 발을 담그고 서서 내일의 국사를 논하고 있는 가련한 임금의 고독을 이해하여 다오. [성삼문] 천벌을 받으리다! 천벌을 받으리다! [수양] 내일 아침 집으로 돌아가거라. 사랑스런 아내가 펴주는 보드라운 비단 이불 속에 들어가 편안한 마음으로 만사를 다시 생각해 보아라. 춥고, 배고픈곳 [페이지] 118 에서는 사고가 외곬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네가 입만 다물고 국사에 임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정승의 다리까지 하사 하겠다. 그저 입을 다물고 나를 따르면 되는 것이다. 고문의 상처가 아물때까지 명산 절경에 찾아가서 휴양을 해도 좋다. 모든 악몽을 일소하고, 차분히 정자에 앉아 곱게 벼루에 먹물을 갈아 놓고 흰 창호지 위에 송죽과 난을 치며 편안히 여생을 보내거라. 보내거라. (두루마리를 꺼내며) 여기 네 서명만이 빠졌다. 내 권위와 정당성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해서는 집현전 학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서명을 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나졸들에게 명령하여 사인교를 대기시켜 놓았다. [성삼문] (두루마리를 받는다. 한참 들여다 보다가 천천히 찢어 버린다.) 내가 할 일은 이제 다 끝났오! 할 일은 이제 다 끝났오! (두사람 사이에 오랜 침묵 번개 천둥) (두사람 사이에 오랜 침묵 번개 천둥) [수양] (차분하게) 우리들의 혁신이 성공하던 날, 우리들은 자축연을 베풀고 있었다. 한참 축배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데 「허후라는 대신이 음식을 먹지 않고 홀로 눈물을 흘리더군. 이상해서 내가 연유를」 물었더니 아무리 나라를 위하는 일이였지만 사람의 목숨을 무수히 죽이고 어떻게 즐겁게 고기와 술을 먹겠읍니까---하더군.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자리에서 허우의 목을 베여 죽였지. 왜 그랬는지 아나? 실은 그 자리에서 나도 똑같은 감회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속에서 나약하게 꿈틀거리는 죄책감이 무서웠기 때문에 허우의 목을 베어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잠자리에서 무서운 악몽들이 피어올라 나를 힐책하며 괴롭혀 왔다. 그럴수록 나는 악몽둘의 뿌리를 베어 버리고, 긍정적인 선정을 베풀기에 전념해 왔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 피의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며 일을 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이제 물러설 수는 없다. 허나 한가지 이것이 슬프다. 후세의 사가들은 너희들의 이름을 충신으로 기록할 것이며 나는 영원히 폭군의 이름으로 기록할 것이다. 이것이 슬프다.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 너는 앉아서 죽어만 주면 되는 것이다. 「아니」라고 외치며 죽어가는 너희들이 부럽다. 너희는 충신의 이름으로 이제 죽어지지만, 나는 역적으로 살아남아 일을 해야 한다. [페이지] 119 [성삼문] 누군가는 왕의 자리에 앉아야 하고, 그리고 왕의 할 일은 언제나 똑같은 것, 백성을 잘 살게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니, 근본 뜻만 알면 되는 것이오. 문제는 누가, 그것을 하느냐 하는 문제라오. 하늘을 어겨 다스림은 성군이 되지 못하는 법이외다. [수양] (꿈속을 헤매듯 몽롱하게 혼잣 소리로) 차라리--- 학식도 없고 무예도 모르며 신분도 평범한 농부의 자손으로 태어나--- 앞뜰에 꽃을 심고, 밭에는 씨를 뿌리고, 겨울에는 동네의 선 머슴들과 어울려 토끼 사냥이나 뛰어다니며, 평범하게 살 수가 있었다면--- 평범하게 살 수가 있었다면--- (한찹동안 침묵이 흐른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듯 번개 천둥) (한찹동안 침묵이 흐른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듯 번개 천둥) 거기 누가 없느냐? [임운] (뛰어 들어온다) 대령했읍니다. [임운] (뛰어 들어온다) 대령했읍니다. (암전) (암전) [장] 3장 [장] 3장 밤, 감옥과 신숙주 집을 동시에 보여준다. 1幕(막)1場(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조명의 강도를 조절하여 양쪽 모두 방해를 서로 주지 않게 연결시켜 준다. 감옥에는 성삼문과 그의 아내, 신숙주의 집은 신숙주와 그의 아내가 있다. [성삼문] 무엇하러 여기까지 찾아왔오. 밤도 깊었으니 어서 돌아가구려. [성,아내] 처음에는 당신이 원망스러웠어요. 나와 아이들을 전혀 생각하시지 않는 당신이 원망스러웠어요.아이들이 아버지는 어디 가셨냐고 잠을 자지 않으며 보챌 때마다 나는 거짓말을 해 주는 수밖에 없었어요.「아버지는 먼 여행을 떠나셨단다.」순진한 아이들은 그 말을 믿고 잠자리에 들어가곤 했어요. 허나 이제 당신을 내 눈으로 똑똑하게 바라보는 순간 그 원망은 사라졌어요. 모진 고문으로 피가 흐르는 당신의 몸을 본 순간 원망스러움이나 괴로움이 사라져너렸어요. 자랑스러움이, 떳떳함이 내 마음 속에 따뜻하게 서려 오고 있어요. 여보, 보셔요. 전, 당신의 아내예요. 떳떳한 성삼문의 아내란 말이예요. [성삼문] 날이 새면, 당신과 아이들도 모두 죽게 되오. 삼족을 멸하라는 명령이 내렸오. [페이지] 120 [성,아내] (웃으며) 알고 있어요. 여보, 나와 아이들이 모두 죽게 된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불안스런 마음 때문에 온몸이 떨려옴을 느꼈어요. 알뜰하게 내 손에 꼭 쥐고 있던 행복의 알맹이들이 와르르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무서운 절망감에 사로 잡혔어요. 내 눈앞에서 아이들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참경을 상상하며 미칠 것 같은 괴로움에 빠져 있었어요. 허나 당신의 모습을 본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얼음처럼 녹아 사라졌어요. 그리곤 새로운 행복감이 더 크고 따뜻한 해복의 햇덩어리가 얼어 붙었던 불행의 틈바구니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전에는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행복감이예요, 여보. 행복감이예요, 여보. (조명의 전환) (조명의 전환) [신,아내] 모두가 형장으로 글려 가는데 왜 당신만이 여기에 계세요? 나와 아이들을 위해선가요? 아니면 당신 자신의 영화를 위해선가요? 왜 당신은 내 앞에 서 계시죠? 모두가 형장으로 글려 가는데. [신숙주] 나 혼자만의 영화를 누리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오. 더구나 가정의 안락과 행복을 붙들고 늘어 지려는 생각도 없오. 살아 남아야겠다는 사명감이 나를 채찍질했기 때문이오. [신, 아내] 치욕과 불의 속에서 살아 남아 뭘 하시겠다는 거예요? 어떠한 사명감이 당신을 살아 남게 했나요? 거리거리에서 동네의 골목마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배반자 신숙주, 변절자 신숙주.」이런 수모를 받아가며 그저 살아 남겠다는 거예요? 이제 아이들이 자라고 철이 들면 무서운 눈들을 굴리며 이렇게 다그쳐 묻겠죠? 「 그때 아버지는 무얼 하셨죠? 그때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어요? 가만히 계셨나요? 아니면 타협을 하셨나요. 왜 아머지는 지금까지 살아 계시죠?」 [신숙주] 나는 이렇게 소리치며 말하겠오.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파멸하는 것만이 길이 아냐. 죽기는 쉽지만 살아 남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더 어려운 길을 택한 거야. 치욕과 불의를 질근질근 씹어 삼키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더 큰 사명이 나를 부른거다. 싸워야 할 자는 살아야 돼!」 [신,아내] 살아 남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아이들이예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때 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교훈만 남겨 주면 되는 거예요. 당신의 고귀한 교훈을 양분처럼 섭취하며 아이들은 자라게 될 거예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리고 동지들의 대열에 끼어 형장으로 가세요. 나는 이제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 당신의 상청을 마련하고 소복 단정히 앉아서 아이들 [페이지] 121 에게 상복을 입히며 당신의 충절을 들려 주겠어요. 자, 어서 떠나세요. 부끄러움 없이, 한치의 죄스러움이 없이 나와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당신은 죽어야만 돼요. 죽어야만 돼요. (조명 전환) (조명 전환) [성, 아내] 이별이 아니라 만남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앞뜰에 핀 국화꽃은 시들어 버리고 푸른 하늘 위에 훨훨 떠오르던 연은 끊어서 날아갔지만, 우리들은 더 행복하고 아늑한 곳에서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을 알았어요. 처음으로 생전 처음으로 아내의 기쁨을 갖게 됐어요. 당신이 그것들을 제 손에 쥐어 줬어요. 여보, 울지 않겠어요. 힘있게 타오르는 환희의 불길 속에서 기꺼이 웃으며 새벽을 맞이 하겠어요. [성삼문] 당신이 오늘처럼 아름답게 보인적은처음이요. 정말 아름답소. 언젠가 당신이 그런 말을 했었지. 늙어가는 것이 제일 슬픈 것이라고, 당신은 조금도 늙지 않았소. 처음 내게 시집왔을 때의 그 고움이 그리고 순결함이 그대로 남아 있소. 마치 내가 오늘 처음 당신과 만나는 것같소. 있소. 마치 내가 오늘 처음 당신과 만나는 것같소. (조명 전환) (조명 전환) [신숙주] 내가 할 일이 많이 있소. 신하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소. 국정에 참여하여 내 학문과 내 지혜를 구사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생명의 불꽃을 태워가며 나를 증명해야 하오. [신, 아내] 끝내 살아 남겠다고 하시는군요. 치욕스런 생명을 질질 끌면서 굳이 살아 남겠다고 하시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역적모의에 가담하여 왕을 폐출시키고 충신들을 배반하여 역적이 주는 감투를 쓰고 역적이 주는 록을 받아먹는 그런 사람은 제 남편이 될 수가 없어요.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추한 모습을 한 가련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을 뿐이예요. 전 그런 사람과 결혼한 적이 없어요. 제 남편은 충신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죽고 말았어요. 없어요. 제 남편은 충신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죽고 말았어요. (조명 전환) (조명 전환) [성,아내] 궁궐에서 보면 병정들의 발자욱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며 우리집에 당도 하겠죠.전 거울 앞에 여니 때와 마찬가지로 곱게 곱게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죠. 천천히 일어나 흰 소복으로 갈아입고 살며시 다락문을 열고 향로를 꺼내 가득히 향을 피워 아랫목에 놓아 두죠. 아이들은 조르르 몰려들어 묻겠죠.「엄마 왜 그래?」 저는 조용히 나의 손때가 묻은 [페이지] 122 장농을 열어 곱게 곱게 접어서 넣어 두었던 아이들의 때때옷을 꺼내 한놈씩 한놈씩 입히며 말하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단다.」비단 바지 저고리를 입히고 옷고리를 예쁘게 매어주며 무명 버선에 행전까지 쳐주고는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살며시 일어나죠. 칼을 든 병정들이 마당으로 몰려 들어와 가지고온 둥근 멍석을 펴 놓고는 어명을 알려 주겠죠.(천천히 일어선다.)「자 아버지를 만날 시간이 됐구나.」이렇게 말하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닫이문을 조용히 열고 천천히, 천천히(움직인다.) 마당으로 내려서죠. 하늘은 맑고 바람은 조용히 불어오며 새들이 지저기겠죠. 불어오며 새들이 지저기겠죠. (마치 그렇게 행동하듯 어둠속으로 퇴장하며) (마치 그렇게 행동하듯 어둠속으로 퇴장하며) 설날 친정댁으로 나들이 떠나듯이 부풀고 쾌적한 마음으로 버선발을 사뿐사뿐 옮겨 국화나무 곁까지 걸어 가겠죠. 옮겨 국화나무 곁까지 걸어 가겠죠. (성, 아내 완전히 퇴장. 성삼문 혼자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침묵, 그 어둠속에서 괴물처럼 밧줄을 든 임운이 들어온다.) 어둠속에서 괴물처럼 밧줄을 든 임운이 들어온다.) [성삼문] 벌써 시간이 됐나? [임운] 아닙니다. 날이 샐려면 더 있어야 합니다.대감. [성삼문] 그런데 뭣때문에 여길 들어왔오? [임운] (밧줄을 여러가닥으로 풀며)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죠. 대감, 일이라는건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 놔야 실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성삼문] 일? [임운] 얼마전에 병조판서 대감을 처형하는데, 너무 소홀히 일을 처리해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읍죠. [성삼문] 망신을 당해? [임운] 밧줄로 목을 매는데 매듭을 너무 헐겁게 해놓은 걸 모르고 그냥 목을 졸랐지 뭡니까. 나무 위에서 밧줄을 걸어 냅다 잡아당기니까 글쎄 줄이 풀어져 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밧줄을 단단히 묶어서 다시 목을 매어 죽었읍죠. 그 때의 창피한 건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읍니다. 망나니란 건 단 한번에 척하고 목이 매달려야 신이 나고 또 일한 것같이 기분이 거뜬하거든요. 실수한다는 건 저희들에겐 큰 수치로 생각되거든요, 대감. [성삼문] 아직 익숙치가 못한 게로군. [임운] 매사가 어디 한이 있읍니까. 이 분야도 늘 연구하고 개량을 해가며 습득을 해야 되는데 노력을 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자세로 일에 임하면 가끔 그런 낭패를 당하게 된답니다. 더구나 대감께서는 차열로 죽이게 되었거든요. [페이지] 123 [성삼문] 차열? [임운] 네 차열입죠. 이게 처형 중에서 가장 까다롭고 힘이 들거든요. 밧줄도 여러가닥이 필요하며, 말이 네필이나 동원되고 거기다 장소도 넓어야 되니 신경 써야 될 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생사람 목을 매는 거라든지 반월도로 목을 베는 거라면야 초보자들도 척척 해낼 수 있지만 이 차열이라는 건 진행과정이 어려워 숙련된 망나니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내죠. [성삼문] 그래 자네가 차출됐군 [임운] 어려운 대신 딴 처형보다 보수가 훨씬 좋죠.차열이다하면 나라 안에서 저를 따를 사람이 없읍니다. (성삼문의 양손과 다리에 밧줄을 재어보며) 경험이 중요하거든요.전 많은 경험을 통해서 비결을 알고 있거든요. [성사문] 비결을? [임운] 그러믄요. 우선 양손목에 밧줄을 가늘게 풀어 열두번쯤 감아서 단단히 묶거든요.그 다음은 굵은 밧줄로 양쪽 발목을 세번 감아서 묶죠. 묶은 다음이 가장 중요한데 각기 묶인 네가닥의 줄을 각각 말안장에다 묶는데, 이때 줄의 길이가 똑같으면 절대로 안되죠. 조금씩 줄의 길이를 틀리게 해야지 만약 줄이 똑같으면 으례 몸뚱아리가 두쪽으로 찢어지기 마련이거든요, 대감. 그러나 줄의 길이를 조금씩 다르게 하여 말을 사방으로 달리게 하면 정확하게 사지가 네쪽으로 찢어지죠. 찢어지죠. (밧줄을 풀어서 성삼문의 발목에 대본다.) (밧줄을 풀어서 성삼문의 발목에 대본다.) 그래서 이렇게 미리 미리 준비를 해놓으면 대개 실수란 게 있을 수 없죠. 생각해 보세요. 괜히 줄을 잘못 당겨처 형중에 줄이 풀어진다, 또는 끊어진다 해서 다시 밧줄을 묶어서 한다면--- 당하시는 대감인들 기분이 좋겠어요. 또 일을 하는 저희들인들 좋겠어요? 피차 언짢은 일입죠, 대감. [성삼문] 이 일을 한 지가 오래 됐소? [임운] 철이 들면서 이 분야에 종사해 왔으니까 한 20년은 되죠. 처음에는 좀도둑 볼기 치는데두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이 떨려서 곤장두 제대로 잡지를 못해서 선배들한테 무척 야단도 맞았죠. 그러나 경험이 쌓이고 익숙해지니까, 지금은 목을 베는 거에서부터 교수, 능지처참, 도륙, 차열에 이르기까지 차분한 마음으로 할수가 있게 됐죠. 역시 경험이라는 걸 무시 할 수 없죠. [성삼문] 보수는 얼마나 받고 있소? [임운] 궁궐의 대감님들에게 비하면 약소하지만 그래도 처자식 거느리고 먹고 살 만합죠. 목베는 거야 보통 20냥 정도 받지만 오늘과 같은 높은 양반의 차열정도라면 50냥은 족히 받게 되죠. 허지만 거기서 세금 떼 [페이지] 124 고 조합에 회비를 바치고 나면 집에 가지고 들어가는 거야 고작 30냥 정도는 되죠. [성삼문] 그러면 무엇때문에 이런 일을 하오? [임운] 직업이죠 뭐. 나라에 상감이 계시고, 정승,판서, 내시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가 하는 일이 먹구 살기 위한 직업이듯이 이것도 제 직업입죠.마누라는 늘 직업이 천하다고 딴 것으로 바꾸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직업의 귀천이 어디있읍니까요.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편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게 아닙니까요. 저희들이 있으니까, 나라의 도둑도 없어지고 역적도 없어지며 또 상감께서는 편히 국사에 임하실게 아니겠읍니까요. 소고기를 먹으려면 소를 때려 잡는 백정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두 세상인심은 고약해서 백정이나 저희들을 쌍놈이라고 멸시를 하거든요. 사실 저희들은 욕심이라는 게 없읍죠. 그저 정당한 보수를 받아서 작은 살림 꾸려나가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 가니까요.한가지 흠이 있기는 하지만입쇼. [성삼문] 흠? [임운] 언제나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거죠. 제 뜻대로 행동하는 적은 한번도 없읍니다요. 저희에게 보수를 주는 사람이 시키는 데로 해야 하거든요. 어느 대감의 뒤를 밟아봐라! 어느 정승의 하는 말을 엿듣고 와라, 어느 판서를 아무도 몰래 죽여서 묻어버려라. 아니면 고문을해라.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거든요. 개처럼 순종해야만 되는 게 그게 흠이라면 흠이죠. 그러나 내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러나 저희들은 충신과 역적은 분명히 구별을 할 줄 알죠.(사방을 살피고) 대감께서도 훌륭하신 충신이란 걸 저도 잘 압니다. 이런 일을 할 때가 제일 가슴이 아프죠. 아마 대감을 처형하고 나면 며칠이고 잠을 자지 못할 거예요. [성삼문] 추호도 자네를 원망하지 않을 테니, 괴로와 할 필요는 없네. 난 자네를 이해하고 있어. 실수하지 않도록 밧줄을 단단히 묶어 힘차게 말 등허리를 채찍질하게나. 절대로 실수를 해서 창피를 당해서는 안되지.일이 끝나거든 주막에 들려 술잔을 기울여 하루의 피곤이나 풀고 다정하게 처자에게 돌아가게나. [임운] 고맙습니다, 대감. 대개 죽을 때는 저의 얼굴에 침을 밴고 갖은 욕을 하며 저를 멸시하는데, 대감께서는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며 저를 멸시하는데, 대감께서는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북소리가 들려온다.) (북소리가 들려온다.) [임운] 대감, 시간이 됐읍니다. [성삼문] 울리는 북소리는 이 목숨을 재촉하네. 멀리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어 황천으로 가는 길, 주막집도 없으려니 오늘밤은 뉘집 찾아 쉬어서 갈 거나. [페이지] 125 (암전) (암전) [장] 4장 [장] 4장 어전, 수양, 신숙주, 한명회, 임운 북소리 요란한 중 서 있다. [수양] 피의 숙청은 끝났다. 이제 살아 남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만이 남아 있다. 선왕들의 훌륭한 업적을 이어받아 국가의 문물을 더욱 공고히 하고 국가의 위험을 내외에 과시하여 만고의 비난을 씻어버리고 우리의 능력껏 선정을 베풀어 역사의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명회] (임운에게) 백성들의 불만과 저항심이 아직 남아 있는 한, 너는 염탐과 미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 불평불만이란 가만히 놔두면 용수철모양 튀어나온다. 무거운 바윗돌로 지그시 눌러버려라.백성들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것, 제멋대로 방치하면 한없이 기어오른다. 흉년이 들어도 궁궐쪽을 향해 침을 밴고, 가믐이 들어도 임금에게 주먹질을한다.심지어는 배탈이 나거나 감기만 들어도 그 불평을 궁궐을 향해 하는게 백성들이다. 오만불손함과 백성들의 나태함이 영원히 매몰될 때까지 지그시 눌러둬야 한다. [임운] 대감의 분부대로 실행하겠읍니다. [수양] 누에를 치고 소를 길러 농본정책을 수립하여 부귀비천, 상하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나 노동에 참여케하여 생산 의욕을 고취시켜라. 왕실의 모든 사치와 허영을 배격하여 명실공히 내핍생활을 실천하라. 상평창을 실시하여 농민을 위한 곡가정책을 실시하고 팔방통보 화폐를 주조하여 사회 물물교환의 경제체제를 혁신하라. 선정록을 편찬하여 선왕들의 업적을 높이 찬양하며 천문지리를 연구케 하여 낙후된 역학을 계몽 선도하라. 좌의정에 임명된 신숙주는 북쪽의 야인을 정토하고 남족 일본의 마수를 무마시키시오. 이로써 안으로는 혁혁한 내치를, 밖으로는 강화하는 외치를 통하여 모름지기 인본정치의 이념을 구현하겠다. 이것이 살아 남은 우리들의 할 일이다. [신숙주] 상감의 현명하신 구국정책에 분골쇄신 따르겠나이다. [수양] 자, 삼정승, 육판서 및 모든 문무백관을 소집하여 어전회의를 실시하자. [수양] 자, 삼정승, 육판서 및 모든 문무백관을 소집하여 어전회의를 실시하자. (일동 움직이려 할 때 나졸 급히 들어온다.) (일동 움직이려 할 때 나졸 급히 들어온다.) [나졸] (엎드리며) 급한 전갈이옵니다. [한명회] 무슨 전갈인가 어서 아뢰어라. [나졸] 신숙주대감께 급한 전갈이옵니다. [신숙주] 어서 말해 보아라! [나졸] 만리재 신대감댁 하인의 전갈이온즉, 오늘 낮 정 [페이지] 126 오쯤에 신대감댁 안마나님께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하였다 하옵니다. [수양] 무슨 소리냐? 이건 또 무슨 소리냐? [나졸] 아무 유언도 유서도 남기지 않으시고 곱게 소복으로 단장하신후 대들보에 손수 목을 매어 자살을 하셨다 하옵니다. 비보를 가지고 온 하인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밖에서 흐느껴 울고 있아옵니다. 소인의 말을 믿지 못하시면 직접 하인을 불러 물어 보십시오. 못하시면 직접 하인을 불러 물어 보십시오. (一同(일동) 침묵 속에 빠진다. 신숙주 공허한 시선으로 허탈하게서 있다.) (一同(일동) 침묵 속에 빠진다. 신숙주 공허한 시선으로 허탈하게서 있다.) 신숙주대감님께서는 어서 퇴청하시어 가엾은 마나님의 시체를 거두옵소서. [신숙주] (차분하게) 비보를 가지고 온 하인에게 일러라. 하인들의 손으로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르게 하라고. 이미 내 손길은 필요치가 않다. 내게서 사라져간 사람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겠다. (소리 지른다.) 어서 나가라! 지른다.) 어서 나가라! (나졸 퇴장) (신숙주 독백하듯이) 이 겨울은- 이번 겨울은 이다지도 길기만 할까. 온몸이 얼어 붙고-모든 생물이 얼어붙어- 금년의 겨울은 길기만 하구나-하늘은 잿빛으로 뒤덮여-굵은 눈발이 쏟아져-메마른 땅위에 한파를 몰고 온다-간혹 누군가가 속삭이지, 봄이 오고 있어요. 봄이오고 있어요.-그런가 싶어-창문을 열어 제치고 밖을 내다보면 아직도 세상은 깊은 겨울에 빠져 있어-모두가 웅크리고 종종걸음으로 돌담길을-골목 어귀를 사라져 가고 있지- 어귀를 사라져 가고 있지- (호리죤트의 눈발이 나리기 시작한다.) (호리죤트의 눈발이 나리기 시작한다.) 또 눈이 오고-쌓이고 쌓이고-땅속의 생명들은 웅크린 채 봄을 기다리겠지-그러나 봄을 믿는 사람들은 -눈을 쓸고-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서- 봄을 약속하는 씨앗을 뿌려- 이 추위를 견뎌야만 하겠지. (一同(일동) 서서히 눈발속으로 사라져간다.) (一同(일동) 서서히 눈발속으로 사라져간다.) 막이 내린다. 막이 내린다.

줄거리

출판 및 공연 정보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상열 A는 B의 작품이다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기여자 : 정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