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루벤스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며 역동성, 강한 색감, 관능미를 추구하는 바로크 스타일 대표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로 유명하다.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기사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생애

유년 시절 (1577-1599)

독일 베스트팔렌 지겐에서 그의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지겐으로 피해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음 이후 10세에 가족과 함께 고향인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3년 뒤 14세에 랄랭 백작부인의 시동이 되어 귀족사회의 관습을 익혔고, 화가가 되고 결심했다. 15세 때 A.노르트(1562∼1641), O.베니우스(1556∼1629) 등에게 그림을 배운 뒤 21세 때인 1598년 안트베르펜화가조합에 등록했다. 23세 때인 1600년에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서의 삶

그는 23세 때인 1600년,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8년 동안 베네치아·로마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인 M.카라바조카라치파의 영향을 받아 명성을 얻는 한편, 만토바공(公)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가지고 에스파냐로 여행하였다.

안트베르펜에서의 삶 (1609-1621)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가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 뒤로는 날로 높아가는 명성으로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루벤스 특유의 화려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와 외교관 임무 (1621-1630)

역사화·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제재를 작품화하였다. 그 중 파리의 뤽상부르궁전의 21면으로 이루어진 연작 대벽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루벤스 예술의 모든 특징을 담고 있으며 바로크회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현란한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원만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노년기 (1630-1640)

1626년 아내 이사벨라가 죽은 후, 1630년 16세의 엘레나 푸르망과 재혼하였다. 1640년 팔의 통풍이 심장에까지 번져 안트베르펜에서 사망하였다.


예술 양식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

-형태의 유연성

-동적인 구성

-호화롭고 방탕한 신화의 장면들

-그리스도의 수난과 같은 종교상 극적인 사건


대표 작품

마리드메디시스의 생애.jpg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전쟁의 신으로부터 평화를 보호하는 미네르바.jpg 전쟁의 신으로부터 평화를 보호하는 미네르바

전쟁의 공포.jpg 전쟁의 공포

성모로부터 아기 예수를 건네받는 성 프란체스코.jpg 성모로부터 아기 예수를 건네받는 성 프란체스코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노영서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캐스트-루벤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페테르 루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