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파울 루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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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죽음 화가.



소개

독일의 화가. 루벤스는 생전에 화가 겸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1620년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고향인 안트베르펜에서 대규모의 공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말년에 그린 풍경화는 인상주의 화가를 비롯한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생애

  • 유년시절(1577-1599)

루벤스는 독일의 베스트팔렌이라 불리는 지방의 지겐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루벤스는 어린 시절에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스물두 살의 나이에 독립 화가가 되었다.

아버지인 장 루벤스가 불륜이 들통나 감옥에 갇히게 된 후 1577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태어났다. 루벤스의 가족은 1년 후 쾰른으로 옮기게 되었다. 1589년, 아버지가 죽은 지 2년이 지나고 루벤스는 형과 어머니와 함께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했으며 라틴어를 가르치는 가톨릭학교를 다녔다. 종교는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그는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형식의 미술 분야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안트베르펜에서 루벤스는 인문학과 라틴어, 그리고 고전 문학을 배웠다. 14살이 되던 해에 그는 Tobias Verhaeght의 지도 하에 미술 실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루벤스는 1598년 공부를 마치고 '성 루크 화가조합(Guild of St. Luke)' 에서 조합장 및 교사직을 맡게 된다.
  • 그 이후 이탈리아에서(1600-1608)

2년 후인 1600년에 그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는 국제무대에서 명성을 쌓기 위한 화가들의 필수 코스였다. 이탈리아에 머물며 베로니스와 틴토레토의 색감과 구도는 루벤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성숙기의 스타일은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곳에서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작품과 이탈리아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공부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과 그의 아들(Laocoon and His Sons)이 특히나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와 함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로마에서 머물 무렵, 루벤스는 처음으로 그의 세 폭 제단화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St. Helena with the True Cross로, 로마의 교회 예루살렘의 산타 크로스를 위해 그려졌다. 루벤스는 1603년, 외교 임무를 맡아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스페인에 머물며 그는 펠리페 2세가 모았던 수많은 라파엘로와 티티안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여행은 그가 예술과 외교술의 재능을 함께 발휘했던 첫 번째 여행이었다. 루벤스는 1604년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4년간은 만투아와 로마의 제노바에서 지냈다. 루벤스는 제노바에서 도시의 성들을 삽화 형식으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606년에서 1608년,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는 당시 도시에 새로 지어진 가장 세련되고 유명했던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 교회(Santa Maria in Vallicella or, Chiesa Nuova)를 위해 제단화를 그리게 된다. 이탈리아에 미친 루벤스의 영향은 굉장히 거대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Pietro Paolo Rubens"라는 서명을 한 편지와 서신을 여러 장 썼다. 편지에서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쓰고 있으나, 그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 그 이후 안트베르펜에서(1608-1621)

1608년 루벤스는 그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안트베르펜으로 급히 달려갔다. 이 때부터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계속 머무르려고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610년, 루벤스는 그가 직접 설계한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이 즈음, 루벤스는 수많은 제자들, 실습생들과 함께 새로운 화실을 지었다. 당시 그의 제자 중에서는 오늘날 가장 유명한 바로크 시대의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인 플랑드르의 안토니 반 다이크가 있었다. 루벤스가 그렸던 세 폭 제단화인 "The Raising of the Cross(1610)"와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1-1614)"는 성모 마리아 성당을 위해 그려졌는데, 이 작품들은 루벤스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는 데 기여하였다. 루벤스는 그의 친구이자 Plantin Press의 소유주인 Balthasar Moretus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의 책 표지나 삽화, 프린트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 루벤스의 이름은 유럽 전역을 걸쳐 알려지게 된다.

  • 노년기(1630-1640)

루벤스는 그의 노년기를 안트베르펜에서 보냈다. 그는 여전히 세계 각지의 고객에게 작품을 그려주었다. 이 때에 그가 그린 작품으로는 화이트 홀에 위치한 이니고 존의 성의 연회장 천장에 그린 작품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자기 자신의 화가로서의 방향을 탐구하는 데에 더 몰두했다. 1630년, 그의 아내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날 53세였던 그는 16살의 소녀 엘렌 푸르망(Helene Fourment)과 결혼한다. 엘렌은 1630년대 이후의 루벤스의 작품세계에게 관능미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었고, 그는 이 영감을 살려 The Feast of Venus(Kunsthistorisches Museum, 비엔나), The Three Graces(마드리드의 프라도), 그리고 The Judgement of Paris(마드리드의 프라도)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1635년, 루벤스는 안트베르펜 밖에 있는 the Château de Steen (Het Steen)에서 사유지를 구입하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루벤스는 통풍으로 1640년 5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안트베르펜의 성 야곱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3명은 이사벨라에게서 그리고 5명은 엘렌에게서 태어났다. 가장 어린 자녀는 그가 죽었을 때 단지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예술양식

루벤스는 다작을 하던 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위탁받아 그린 그림들의 대다수는 종교적인 주제나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 역사화, 그리고 사냥을 하는 모습 등이 있다. 루벤스는 또한 자신의 친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자화상 또한 여럿 그렸으며 노년기의 그는 풍경화를 많이 그리게 된다. 그의 작품은 역사화·종교화·풍경화·인물화 등 각 분야의 작품이 있는데, 모두 생기가 넘친다. 선은 힘차고 색채는 풍부하고 화려하며, 구도도 웅대하여 야성적·관능적 표현에 뛰어났다. 그러나 힘찬 역동성에 반해 세밀함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 루벤스는 연습을 위해 오일을 이용한 스케치를 자주 하였으며 나무 패널을 이용해서 작품을 그린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17세기를 대표하는 플랑드르파의 거장이며, 동시에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대표작품

아킬레우스의 죽음.jpg

삼미신.png

  • 작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 제작: 1639
  • 소장: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크기: 221 x 181 cm

파리스의 심판.png

  • 작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 제작: 1639
  • 소장: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크기: 199 x 379 cm
  • 신화: 세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한자리에 모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시합이 열렸다. 우승자에게는 황금사과가 주어지는 이 시합의 심사위원으로는 산에서 양을 치던 목동 파리스가 낙점되었다.

파리스의 심판이라 불리는 이 세기의 미의 대결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중세 이후 신화 주제에 눈을 돌린 미술가들 역시 이 매력적인 사건에 주목하였다. 그렇게 '파리스의 심판'은 서양 미술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신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