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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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후반

전개

베르사유 행진(10월 행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할 때의 프랑스는 부랑 인구와 실업자가 증가함에 따라 경작 농민의 사회 불안이 높아지고, 지난 해의 흉작 때문에 곡물 등의 식료품 가격이 치솟았다. 국민들의 가난한 생활과 대조적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매일같이 화려한 잔치가 열리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1789년 10월 5일 새벽 7000여명의 주부들을 중심으로 베르사유 궁전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행진에 참가한 국민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삶을 호소하며 빵을 달라고 외쳤다. 루이 16세는 국민들에게 빵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으나, 이후 국민들은 폭도로 변해 베르사유 궁전을 약탈하고 국왕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베르사유 행진 이후 루이 16세와 그의 가족들은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졌으며, 파리 시민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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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바렌느)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자신의 모국이었던 오스트리아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하기까지의 많은 절차와 어려움이 있었기에, 국왕은 북동쪽 국경의 몽메디에서 국왕군과 합류해 혁명 세력에 대항하기로 계획했다. 1791년 6월 20일 새벽, 루이 16세를 비롯한 국왕 가족은 감시를 피해 튈르리 궁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몽메디에 도달하기도 전, 베르당 근처 바렌에서 도주가 발각되었고 결국 6월 25일 파리로 다시 압송되었다. 바렌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은 국왕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도주뿐만 아니라 국왕군의 힘을 빌려 혁명 세력을 탄압하려고 했던 것이 밝혀지자 국왕을 옹호하고 국왕의 지위를 인정하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다수의 세력 역시 국왕으로부터 돌아서며 혁명은 점점 급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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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쟁 발발

바렌 사건으로 인해 혁명 세력의 힘이 미칠 것을 두려워하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인 프랑스 혁명 세력을 위협하였고, 이에 혁명 세력은 큰 반발을 일으키며 1792년 4월 20일과 7월 8일,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반혁명군과 싸우며 국경을 빼앗기고 있었다. 총사령관 브랑쉬비크 장군은 프랑스가 해방되는 날에 혁명 세력을 모두 파괴하고 구제도로 복귀시키겠다 선언하였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후 혁명 세력은 점차 수를 늘려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실업자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상 퀼로트 혁명 참여를 유도하며 정치 세력까지 형성하였다. 1792년 8월 9일,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이 시청을 점거하였고, 10일 아침, 2만여 명의 시민들과 의용군들은 국왕 일가가 감금되어 있던 튈르리 궁전으로 진격하였다(8월 10일 사건). 루이 16세 가족은 입법의회로 대피하였으나 이미 왕궁은 국민들에게 점령당했기에 곧 탕플 탑에 유폐되었고, 동시에 왕권도 기능이 정지되었다. 1792년 8월 11일, 입법의회는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의 용의자 체포를 프랑스 전역에서 허용했고, 8월 17일 반혁명파를 재판하는 특별형사재판소의 설치를 승인하였다. 9월 2일 아침, 혁명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군에게 베르당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반혁명파 학살이 시작되었다. 반혁명파를 감금했던 감옥이 국민들에 의해 습격당하며 반혁명파 용의자들은 정식적인 재판 절차 없이 살해당했다(9월 학살). 9월 학살로 인해 반혁명파로 몰린 성직자가 대다수 학살당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우였던 랑발르 공작 부인 역시 이 시기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프로이센에게 계속해서 밀리던 프랑스 군대는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동북부의 발미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뒤집었다(발미 전투). 적군을 국경 밖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한 상 퀼로트는 정치적 발언권을 얻으며 급진적 정책을 옹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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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공화국 성립

1792년 9월 20일, 프로이센 군에게 승리를 거둠과 동시에 프랑스 입법의회가 해산되었다. 다음날인 9월 21일,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채택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루이 16세의 처형

루이 16세는 1792년 12월 10일에 국왕 재판이 열렸고 다음해 1793년 1월 14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의 사형을 선고했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파리 광장에 세워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처형된지 약 9개월 후인 10월 16일에 단두대(기요틴)에서 처형당했다.

공포 정치의 시작

1793년 9월 5일부터 1794년 7월 27일까지 이어진 공포 정치는 로베스 피에르를 중심으로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하며 정권을 유지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루이 16세의 사망 이후 하층민에게 부실했던 정책 탓에 하층민이 반발하자 6월 2일 국민 공회에서 당시 집권 세력을 추방하고 로베스 피에르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이후 공포 정치에 반대하며 국왕 일가를 옹호하던 세력들 역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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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프랑스 혁명, 두산백과 [웹사이트]. (2020). URL: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4488

프랑스 혁명, 위키백과 [웹사이트]. (2020). URL: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_%ED%98%81%EB%AA%85

루이 16세, 위키백과 [웹사이트]. (2020). URL: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C%9D%B4_16%EC%84%B8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