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남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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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쟁 이후 남한과 북한의 관계

남북한의 공동선언문 역사

6.25 전쟁 과정 이후의 남북한의 관계를 선언문으로 살펴보자

1-1.<7.4 남북공동성명>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한반도 휴전 및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에 대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

당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다. 주요 내용은 1.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2.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3.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로, 이것이 ‘자주ㆍ평화ㆍ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이다. 또 합의된 내용과 원칙을 바탕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ㆍ운영하기로 한다.



7ㆍ4남북공동성명.png


2-1.<6.15 남북 공동 선언문>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은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정상들이 직접 만나 성사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대북 유화정책의 기조를 지칭한 용어로, 화해와 포용을 기본태도로 하고 남북한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켜 북한을 개혁ㆍ개방으로 유도한다는 대북정책을 말한다. ‘대북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나 ‘대북 화해 협력정책’도 같은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6.15 남북 공동 선언문.png


2-2-1. <개성공단>
  •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의 하나로 2000년 8월 9일 남쪽의 현대 아산과 북쪽의 아태, 민경련간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여 공단 조성에 단초가 되었다. 그 이후 북측이 2002년 11월 27일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개성공단조성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하여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남북교류협력의 새로운 장을 마련한 역사적인 사업이다.



개성공단.png


3. <10ㆍ4 남북공동선언>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2~4일까지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개최한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 서명한 남북공동선언이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① 6ㆍ15 공동선언 적극 구현

② 상호 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로 전환

③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④ 6자회담의 9ㆍ19 공동성명과 2ㆍ13 합의이행 노력

⑤ 경제협력 사업 활성화

⑥ 백두산 관광 실시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발전

⑦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협력사업 적극 추진

⑧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 강화 등이다.



10ㆍ4 남북공동선언.png


4-1.< 4.27 남북 선언>

■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전문]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와 번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지향을 담아 한반도에서 역사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뜻깊은 시기에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였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다.

양 정상은 냉전의 산물인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 빨리 종식시키고 민족적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열어나가며 남북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역사의 땅 판문점에서 선언하였다.


판문전 선언.png


=4-2<남북연락사무소 폭파>=

2020년 6월 16일 개성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가 북한에 의해 폭파되었다. 지난 2018년 남북은 판문점에서 만나 판문점선언을 이뤘다. 판문점선언에는 다양한 합의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적대행위 금지에 대한 조약이 있었다. 여기에 포함된 적대행위 중엔 전단살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마침 탈북단체가 전단살포를 한 것이다.. 북한은 이 대북전단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한다. 물론 대북전단 살포가 모든 사태의 원인은 아니다. 이로 인해 남한이 약 170억 가량을 투자한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6.25전쟁 당시경제적 피해뿐만이 이 외에도 잦은 마찰과 국방비등으로 많은 경제적 피해가 있어왔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북연락사무소 폭파.png




남북한의 협력 사업과 주요 마찰등

1.<금강산 사업>

남한 주민들이 북한의 금강산을 관광하는 것으로, 현대아산에서 1998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북한의 금강산 일대 관광사업을 말한다. 1989년 고 정주영 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고, 1998년 6월 북한(조선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와 금강산관광총회사)과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 계약을 체결하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현대는 금강산 관광을 위해 매월 1200만 달러를 북한에 지불하기로 했으며, 이에 따라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당초 현대와 북한이 공동으로 금강산관광개발 합영회사를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이는 무산되었고, 이에 1999년 2월 금강산 관광을 위해 '현대아산'이 설립되었다. 이후 '풍악호', '봉래호' 등 유람선과 쾌속 관광선인 '설봉호'가 현대상선에 의해 운항되었으며, 육로를 통한 관광과 금강산 관광특구 지정 등이 논의되었으나 계속 지연되었다. 여기에 현대그룹의 자금난과 관광객 감소, 이로 인한 대북지불금 연체 등으로 2001년 들어 금강산 관광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다 2001년 6월 한국관광공사가 금강산 관광사업 참여를 발표하였고, 대북지불금도 월 600만 달러로 조정했다.

그러나 결국 금강호, 풍악호, 봉래호는 운항을 멈추었으며 2001년 11월 현대상선은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철수했다. 이에 정부는 남북협력기금법에 규정된 '남북 간 왕래경비 지원'에 따라 관광경비를 보조해주기로 결정, 2002년 4월부터 금강산관광 경비 보조가 시작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2002년 11월 북한은 개발자에 대한 비과세 원칙을 규정하고 외화의 자유로운 반출입을 허용하는 '금강산관광특구'를 공식 지정했다. 이에 따라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지구의 토지에 대해 2052년까지 50년간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을 북측으로부터 확보했다.

하지만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금강산관광 경비 보조가 2003년부터 중단되어 금강산 관광객이 다시 감소하였으나, 2003년 9월부터 육로를 통관 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관광객은 다시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이 북한군 초병이 쏜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금강산관광은 잠정 중단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6.25 전쟁이후 다양한 분단 문제점들이 발생했고 이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금강산 사업.png


2.<연평도 해전>

6.25전쟁은 단순히 전쟁 당시의 인명피해 뿐만이 아닌 전쟁 이후 냉전시대의 두 나라의 인명피해로 이어졌다.1999년 6월 7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 서북쪽 10㎞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 보호 미명하에 북방한계선을 3.5㎞ 침범했다. 다음날에도 북한은 경비정 4척과 어선 10척을 북방한계선 남쪽 9㎞까지 침범시켰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을 접근시켜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해 퇴각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 투입해 전적인 행동을 계속하였다. 6월 9일에는 북한 고속정이 대한민국 해군의 고속정을 충돌하여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북한 경비정의 침범이 계속되자 대한민국 해군은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선체 뒷부분을 부딪치는 “함미(艦尾) 충돌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은 계속되던 중 6월 15일 오전 8시 45분경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이에 맞대응하여 대한민국 해군도 충돌공격을 가하였다. 양측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중 오전 9시 28분 북한 함정이 먼저 사격을 가해옴에 따라 대한민국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사격을 가하였다. 쌍방간의 교전은 오전 9시 42분까지 14분간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 당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제1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2002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북한은 다시 한번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여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오전 9시 54분부터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10시 25분 근접차단을 실시하던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도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한편 인근의 제천·진해함(PCC)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격파사격을 실시하였다. 교전은 오전 10시 56분까지 31분간 진행된 후 북한의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남한에서 연평해전이라는 영화로 제작이 되었다. 이 외에도 남한이 북한과 남한을 소재로 다룬 다양한 6.25 전쟁 영화작품이 존재한다.


연평도해전.png


3.<연평도 포격 사건>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을 본격화한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서해 연평도의 우리 해병대 기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곡사포로 추정되는 포탄 100여 발을 발사했다. 북한의 포격 도발로 인해 해병대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래 민간을 상대로 한 대규모 군사 공격으로는 첫 사례다. 군 당국은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고, 교전규칙을 전면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2010년 11월 28일~12월 1일 서해 인근 우리 영해와 공해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이 실시됐으며, 12월 20일에는 연평도에서 사격훈련이 실시됐다.


6.25 전쟁 배경

연평도 포격.png

창의적이조 6.25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