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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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한양도성의 역사

초기

1395년(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성벽을 처음 축조할 때 산지와 구릉에는 석성으로 쌓았고 평지에는 토성으로 쌓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등 대대적으로 고쳐쌓았다.

축성 시기

첫 번째 유형은 14세기말 태조 때의 성벽으로, 화강암이나 편마암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으며 수직으로 쌓아 올려 거친 느낌을 준다. 동북면의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서북면의 평안도의 민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지역별로 97개 구간으로 축성구역을 나누어 쌓았다. 두 번째 유형인 15세기 초 세종 때의 성벽으로, 아랫부분은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전국에서 322,400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고 성벽높이를 보강, 여장도 완비하였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水門을 2간 더 설치하였다.

중기

1422년(세종 4년)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문종 1년)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년)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숙종·순조 때의 것이다.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하였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하였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후기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한제국은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한양도성의 원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1899년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부설되었지만 전차가 성문으로 드나들도록 선로를 공사하여 성벽의 훼손은 없었다. 이듬해에 숭례문에도 전차가 놓이지만 문루와 성벽은 온전하게 남겼다. 일제는 1907년 7월 이때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고 한양도성의 훼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해 10월로 예정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裕仁, 훗날의 다이쇼大正]의 방문을 빌미로 숭례문 좌우성벽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까지 계속된 공사로 숭례문의 서측성벽은 헐려나가게 된다. 숭례문 성벽을 끊고 길을 내면서 한양도성의 훼철은 계속되었다. 1908년 서소문 주변 성곽이 헐려나가고 1915년에는 서대문이 205원 50전이라는 헐값에 매각, 철거되었다. 1925년에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짓고, 동대문에 운동장을 만들면서 성벽은 자취를 감추었다. 1928년 혜화문은 보수비가 없다는 명목으로 철거해 버렸고 1930년대에는 광희문 주변에 주택단지를 건설하면서 성벽을 없앴다. 광복 후에도 도성의 훼손은 계속되어 1961년 자유센터공사에 따라 남산 동쪽 자락의 성벽이 훼손된다. 1966년 도로확장과정에서 광희문 옆 도로가 사라졌고 1975년에 광희문을 고쳐 지으면서 남쪽으로 15m 이동시킨다. 다행히도 1975년부터 한양도성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한양도성의 추가적인 훼손은 멈추게 되었다. 서울시의 주도로 이루어진 한양도성복원사업은 도성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다. 주택가 사이에 방치되어 있던 퇴락한 성벽은 주변 불량주택 철거, 성벽 복원이라는 절차를 거치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되살아났다. 1975년부터 2012년까지 복원과 정비가 이루어진 구간은 12,771m이다. 한양도성 전체길이 18,627m으로 볼 때 70%가까이 남아있는 셈이다. 천만 명이 모여 살아가는 대도시 속에서 이토록 보존상태가 좋은 도시성곽을 보유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한양도성의 탐방구간

백악구간

소개

  • 구간 : 창의문~혜화문
  • 거리 : 4.7km
  • 소요시간 : 약3시간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백악(북악산, 342m)은 옛 서울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 매주 월요일 휴무,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무

- 매일 09:00 - 16:00 하절기(3월~10월) 하산시간 18:00까지 - 매일 10:00 - 15:00 동절기(11월~2월) 하산시간 17:00까지

  • 창의문 · 숙정문 · 말바위 안내소 입장 시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 어른 :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 아동 : 부모님 동반시 입산 가능

일부 지역은 사진촬영이 제한될 수 있다. 출발하면 약 2시간 동안 화장실이 없으므로 미리 다녀오는 것이 좋다.

교통편 안내

경복궁역(3호선) 3번 출구 → 지선(초록)버스 7212, 1020, 7022번 버스(자하문고개.윤동주시인의언덕) → 도보 2분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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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주요지점

창의문.jpg <보물 제1881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숙정문.jpg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창의문·숙정문·말바위 안내소 입장 시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다면 숙정문 안내소에서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백악마루.jpg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白岳山 海拔 342m’라고 적힌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과 세종로는 물론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天), 끝나는 구간은 조(弔)였다. 이곳이 바로 천(天) 구간에 해당한다.

백악곡성.jpg 곡성(曲城)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는데 인왕산과 백악에 하나씩 있다. 이 중 백악 곡성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도성을 둘러싼 서울의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1.21사태 소나무.jpg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총탄 자국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이곳에서 성 바깥을 바라보면 북한산과 백악 사이에 자리 잡은 평창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선혜청의 부속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말바위안내소와 우수조망명소.jpg 말바위는 삼청공원 안에 있는 바위로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백악의 끝자락에 있는 바위여서 말(末)바위라 하였다고도 하고,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이 바위에 말을 매어 두어 말(馬)바위가 되었다고도 한다. 동쪽 능선을 따라 백악에 오를 때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을 매어 두는 바위라는 설이 유력하다. 우수조망명소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에서는 성북구 방향이, 다른 한 곳에서는 종로구 방향이 보인다. 우수조망명소는 숙정문 안내소 · 말바위 안내소 · 삼청공원 ·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들이 갈라지는 분기점이기 때문에 안내표지판을 잘 확인해야 한다. 창의문·숙정문·말바위 안내소 입장 시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다면 말바위 안내소에서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낙산구간

소개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낙산(124m)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낙산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특히 가톨릭대학 뒤편 길을 걷다보면 축조 시기별로 성돌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다.

  • 24시간 개방
  • 장수마을이화마을을 지날 때에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암문-낙산공원 놀이마당-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동대문성곽공원-흥인지문

교통편 안내

혜화문 방향에서 출발하려면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분출구에서 낙산입구까지 도보로 3분이 소요된다. 순성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편리하며 인접한 마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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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주요지점

혜화문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에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 자리보다 북쪽에 새로 지었다.

가톨릭대학교 뒷길





가톨릭대학교 뒷길

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대부분 성 안쪽에 조성되어 있어서 주로 어깨 높이 정도의 여장만 보인다. 그러나 낙산 구간은 전 구간이 성 바깥에서 걸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물론, 암문을 통해 성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특히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면 한양도성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세종 · 숙종 · 순조 연간의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장수마을





장수마을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기원한다. 60세 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뉴타운 예정지였으나 주민투표로 뉴타운 재개발을 중단하고 마을재생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하여 지금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주민 참여형 마을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낙산공원



낙산공원

장수마을에서 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이 나타난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불릴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백악과 인왕산에서 서울의 원경이 보인다면, 이곳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도심을 느낄 수 있다.


이화마을




이화마을

이화마을은 낙산 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 있다.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이 많고 골목도 좁아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마을은 낙산 정상부까지 이어지는데 계단 끝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울타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공사실명제와 각자성석




공사실명제와 각자성석

축성과 관련한 글을 새겨 넣은 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한다.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동대문성곽공원 옆에 가장 많다. 성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각자성석들을 이곳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태조 · 세종 때의 각자성석에는 구간명과 구간별 축성 담당 군현(郡縣)명이, 조선 중기 이후의 각자성석에는 감독관과 책임기술자의 이름, 날짜 등이 명기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의 각자성석들은 낙산 구간이 끝나는 부분의 도성 바깥에 위치해 있다.


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한양도성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동대문병원 일부를 철거하고 세운 서울디자인지원센터 1~3층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방문객들에게 한양도성의 역사와 가치를 알려주며 순성 정보를 제공한다.

흥인지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흥인지문구간

소개

  • 구간 : 흥인지문~흥인지문
  • 거리 : 2.1km
  • 소요시간 : 약 1시간


코스: 흥인지문-오간수문 터-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동대문역사관-광희문-광희문교회


거리:1.8km 소요시간: 약 1시간

교통안내

1호선, 4호선 동대문역 6번출구, 7번출구에서 걸어서 5분거리면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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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주요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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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인지문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서울 도성 정동(正東)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霓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인지문 [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두산백과)

오간수문 Noname01.png

서울특별시 동대문에서 중구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으로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중구 을지로(乙支路)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오간수문은 수문이 5칸, 즉 5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수문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하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이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다. 이 때문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복원하였다.

그후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동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었다. 대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것이다.

오간수교는 1926년 다시 확장·건설되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간수교는 오간수문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수문과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를 재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간수문 [五間水門] (두산백과)

동대문역사공원 Noname05.png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성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일부이다. 2007년 12월 동대문운동장 철거 작업을 시작하면서 매장된 유물들이 출토되어 2008년 1월 문화재 발굴조사에 착수하였으며, 2009년 6월 발굴된 유물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27일에 개장하였다. 부지 면적은 6만 5232㎡이며, 주요 시설은 동대문역사관, 서울 한양도성(서울 성곽)과 이간수문(二間水門) 유적,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간수 전시장, 이간수마당, 갤러리문(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대문역사관에는 조선 전기에서 근대까지의 다양한 문화층에서 출토된 2575건, 2778점의 유물이 시대별, 발굴 지역별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발굴된 유물들의 토층(土層) 탐험, 하도감(下都監) 터와 이간수문을 3D로 복원한 영상관, 유구지별 유물탐색 체험, 8면 바닥 영상, 유물발굴 체험, 동대문역사 백과사전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제공된다.

서울 한양도성(사적 10) 유적은 발굴된 265m 구간 중에 이간수문과 치성(雉城)이 포함된 142m 구간이 정비·복원되어 있고, 성곽이 멸실된 123m 구간은 지적도의 추정성곽선을 근거로 복원되었다. 이간수문은 남산 기슭에서 청계천 본류로 흐르던 남소문 동천 위에 세워졌던 2칸 구조의 수문으로, 1910~1915년 일제가 성곽을 철거할 때 묻혔다가 발굴된 것이다. 치성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돌출되어 성벽을 견고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가 취약한 곳을 보완하도록 축조된 방어시설로, 한양도성 성곽에서는 처음 발굴된 것이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는 1925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어 2007년 철거되기까지 근현대의 80여 년간 한국 스포츠의 산실이자 대중행사 및 기념행사 장소로 활용된 동대문운동장과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외부에는 1968년 보수공사 때 설치된 야간조명탑 2대와 1966년 서울에서 열린 제47회 전국체육대회 때 점화된 성화대가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이간수전시장(구 이벤트홀)은 소규모 전시회·음악회·콘퍼런스·행사 등을 위한 공간, 이간수마당은 예술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며, 갤러리문은 디자인 전용 갤러리이다. 서울시에서 설립한 서울디자인재단에서 관리, 운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Dongdaemun History & Culture Park, 東大門歷史文化公園] (두산백과)

광희문 Noname02.png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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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에 한국에 들어온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C.F.리드가, 이듬해 8월남감리교 중국연회(中國年會) 조선지방 장로사(長老師:현 監理師)로 임명되어, 이교회를 세웠다.

1897년 9월 10일 리드의 사택에서 제1회 조선지방회가 열려, 서울·개성 두구역으로 나누어 선교를 하기로 하였고, 서울구역은 교회부지를 위해 사두었던가옥을 개조, 교회로 사용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1904년 10월 띠꿀(지금의 오장동)로 교회를 이전하고 청용교회라고호칭하다가, 이듬해 5월 광희문 근처에 2층의 붉은벽돌 교회당을 짓고 광희문교회로고쳐 불렀다. 1911년에는 교육선교를 지향, 광희문여학교를 세웠는데, 그것이배명(培明)중고교의 전신이었다.

일제강점기 말에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1942년 3월 강제 폐쇄되었는데,1956년에 이전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신당동에서 재건, 광희문교회의 전통을이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희문교회 [光熙門敎會] (두산백과)

남산구간

소개

  • 구간 : 장충체육관 ~ 백범광장
    •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정류장-N서울타워 -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남산회현자락 발굴현장-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 거리 : 4.2km
  • 소요시간 : 약 3시간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목멱산, 해발 270m)은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하였다. 한강 남북을 포괄하는 현재 남산은 서울의 행정구역상 중심부에 해당하며 정상 부근에는 서울의 지리적 중심임을 표시하는‘서울 중심점’이 설치되어 있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주변 성벽을 대부분 파괴했으나 1970년대 이후의 성곽 보존·정비 사업과 1990년대 중반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현재는 옛 모습을 상당 부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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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의사항
    • 남산-24시간 개방 (신라호텔~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안쪽 구간 09:00~18:00)
    • 장충체육관 뒷길은 주택 지역이므로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교통편 안내

  • 장충체육관
    • 동대입구역(3호선) 5번 출구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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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에서 출발하는법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도보로 1분이 소요된다. 장충체육관을 지나 장충동과 신당동의 경계에 있는 한양도성길을 따라 걷는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장충단 길을 따라 남산 제이 그랜 하우스를 지나 국립극장으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 순환버스 정류장
    • 동대입구역(3호선) 6번 출구 → 동대입구역장충동 정류장
    • 02,03,05번 남산순환버스 → 남산서울타워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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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버스 타는법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동대입구역 장충동 정류장이 있다. 순환(노란)버스 02·03·05번을 타면 국립극장·남산공원·서울시립 남산도서관 정류장 등에서 하차할 수 있다.


  • 남산 케이블카
    • 명동역 (4호선) 2,3번출구 → 도보 10분 →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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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케이블카 타는법
지하철 4호선 명동역 2·3번 출구에서 퍼시픽호텔 골목으로 들어가 오른쪽의 퇴계로18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대사관 영사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남산 케이블카 승차장이 있다. 케이블카 운행시간 10:00~23:00(금요일·토요일·휴일 전날은 상황에 따라 1시간 연장운행)


  • 숭례문
    • 서울역 (1,4호선) 4번 출구 → 도보 10분 → 숭례문
    • 시청역 (1,2호선) 8번 출구 → 도보 12분 → 숭례문
    • 회현역 (4호선) 5번 출구 → 도보 5분 →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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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방향에서 출발하는법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4번 출구에서 10분,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8번 출구에서 도보 12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4번 출구에서 5분 정도 숭례문 방향 퇴계로를 따라 걷고, 소파로로 진입하면 백범광장에 도달한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대를 지나 남산 정상까지 계단길이 이어진다.

구간 주요지점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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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2월 개장한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으로 2015년 1월 리모델링을 통해 재개장한 시립체육시설이다. 체육관 규모는 지하2층, 지상3층 건물로 관람석은 4,507석이며, 체육관 외부는 원의 형태이고 돔으로 된 지붕을 가지고 있다. 체육관 내부의 원형 코트는 배구, 농구, 핸드볼 경기가 가능하고 각종 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어 도심 속에 위치한 스포츠와 문화복합시설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장충체육관 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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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지부의 석성은 대부분 세종 때 새로 쌓은 것인데,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으며, 상대적으로 큰 돌을 아랫부분에 놓아 균형을 유지한다.
  •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면‘생(生)’자 (천자문 42번째)와‘곤(崑)’자 (천자문 47번째)가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을 찾을 수 있다.
  • 이 형태의 성벽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잘 볼 수 있으며,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다.


남소문 터

  • 설치연도: 1985
  • 위치: 3호선 동대입구역 5번출구 반얀트리호텔 장충단로쪽 버스정류장 지나 왼쪽 석축 윗쪽(한양도성 축선) [장충동2가 산 5-7[도로]]
  • 조선시대 남쪽에 있던 소문(小門)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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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4개의 소문(小門)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중구 장충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은 조선시대 서울 광희문(光熙門) 남쪽 남산 봉수대 동쪽에 있었던 성문이다.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있는 광희문을 남소문이라 오인한 예도 있었지만 별도의 남소문이 있었다. 남소문이 설치된 것은 1457년(세조 3년)이다. 이 문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한강 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한강 나루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새로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 문을 설치하게 되었다. 남소문은 1469년(예종 1년)에 폐쇄되었다. 그 이유는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또한 음양설 때문이었다. 또한 음양설의 맞게 남소문을 세운 뒤 세조의 세자인 의경세자가 죽었다. 뒤 명종 ․ 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결국 남소문은 개통되지 않았다. 남소문이 언제 없어졌는지에 관한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성돌을 옮겨 쌓은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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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정문과 남산 제이 그랜 하우스 담장, 축대 등은 한양도성의 성돌을 옮겨 쌓은 것이다. 남산 제이 그랜 하우스 담장에는 ‘경주시(慶州始)’가 새겨진 성돌이, 자유센터 출입구 축대에는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이 새겨진 성돌이,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뒤편 축대에는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이라 새겨진 성돌이 있다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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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장충동에 건립된 국립 공연 · 예술 종합극장이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오름극장(대극장), 달오름극장(소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원형 야외무대) 등이 있다.
  • 남소문터에서 동대입구 지하철역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 국립극장사거리다. 장충단길과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정문, 남산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곳이다. 서울성곽을 살펴보려면 국립극장 쪽으로 길을 건너야 한다.
  • 국립극장은 남산 동쪽 언덕에 있다. 1950년 4월29일 옛 부민관(현재 중구 세종대로 서울시의회 의사당자리)에 창설된 국립극장은 1952년 12월15일에 대구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7년 6월1일 옛 명동예술극장으로 이전했다. 1973년 10월17일부터는 공연·예술의 종합극장으로 남산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1974년 8·15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한 장소기도 하다.


남산 동쪽 나무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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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시기의 성벽은 축성된 지 이미 6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특히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 태조 때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 처음에 보이는 것은 ‘禁/二所 五百七十步’(금/이소 오백칠십보, 1보는 6척으로 약 1.82m)인데 숙종37년(1711) 각자다. 禁(금)은 광희문에서 돈의문 구간을 관할했던 금위영(禁衛營)을 말하고 二所(이소)는 두 구간, 오백칠십보는 성곽을 쌓은 거리가 570보라는 의미다. 다음은 태조 때의 ‘巨字終闕百尺’(거자종궐백척) 각자다. 巨(거)는 천자문 51번째 글자고 闕(궐)은 52번째 글자다. 따라서 거자 육백척 구간이 끝나고 궐자 육백척 구간 중 첫 백척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번째는 ‘第五/一百/判官/陳(原)吉’(제오/일백/판관/진원길) 각자. 제오 다음에 십(十)자가 지워졌다고 본다면 50번째 소구간 100척을 판관 진원길이 감독했다는 각자다.
  • 겉으로는 엉성해 보이지만 600여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튼튼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 긴 세월풍우에 깎인 성벽의 시커먼 외관이 의연함
  • 나무계단은 250m나 이어지며, 오르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계곡이 깊고 아기자기함
  • 특이한 것은 나무계단에 50m 단위로 거리를 표시했고 신기하게도 50m, 100m, 150m 지점 등에 세종 때와 태조 때와 숙종 때 것으로 보이는 각자성석이 있음
  • 나무계단으로 된 성곽탐방로는 250m 지점에서 초소처럼 보이는 구름다리에 닿으며, 다리를 건너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성벽이 가려 보이지 않음. 또힌 정상에 가까운 탐방로는 경사가 완만해 한결 걷기 쉬움


서울 중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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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항법장치(GPS)로 측량한 결과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남산 정상부에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이 자리에는 서울의 중심점임을 표시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 서울시민 대다수가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도로원표를 서울의 중심점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현 광화문 네거리에 한반도 18개 도시의 거리가 표시된 표석을 설치한 것으로 서울의 실제 중심점은 아니라는 게 시의 설명이다.
  • 현재 종로구 인사동 194-4(하나로 빌딩 1층)에 1896년 설치한 중심점이 있으나 이는 조선시대 당시의 기준점으로, 그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은 서울의 행정구역 변천 등 역사적인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 이에 서울시에서 2008년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을 산출하여 최첨단 GPS측량을 실시하여 남산 정상부의 중심점 위치를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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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나라 측량의 중요한 기준점으로 사용되어 온 남산 정상의 삼각점이 규모가 너무 커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이번에 서울의 중심점과 통합하여 디자인하였다. 또한 중심점 조형물에 최첨단 GPS 수신기능을 도입해 실제 측량 기준점으로도 활용하는 등 앞으로 이 중심점이 남산 정상에 서울을 상징하는 또하나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게 될 전망이다. 중심점의 디자인은 서울과 한강의 모습을 투영해 물과 함께하는 역동적인‘문화 서울’을 컨셉으로 서울시 25개의 자치구를 함께 표시해 서울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담아 내도록 했다. 중심점 주변에는 한글, 영어, 중국어, 일본 등 4개 언어로 된 중심점에 대한 안내설명판과 바닥ㆍ지주 이정표를 설치하여 관광객 또는 남산을 찾는 이용객에게 중심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N서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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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서울타워(영어: N Seoul Tower)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2가 남산 공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 및 관광용 타워이다.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7월 30일 완공되었다. 높이는 236.7 미터, 해발 479.7 미터이다. 수도권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 타워를 이용하여 전파를 송출한다.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산에 있어서 보통 남산타워라고 널리 부르고, 서울에 있어서 서울타워라고 부르지만, 행정안전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다
  • N서울타워 전망대 이용시간 :월요일~금요일/일요일 10:00~23:00 | 토요일 10:00~24:00
  • N서울타워 전망대 2층(T2)에서 서울 한양도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재탄생하였다.


남산 팔각정과 국사당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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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정
*개요: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19의거 때 철폐되었다가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되었다. 이팔각정은 남산정상에 세워 져 있어 서울시가가 눈아래 펼쳐진다. 
*문의및안내: 02-3783-5900 (중부공원녹지사업소)
*관련 홈페이지: 남산공원공식웹페이지
*연중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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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터
*설치연도: 1993
*위치: 남산 팔각정 옆에 위치
  • 표석문구

조선 태조 4년 12월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작, 목멱신사를 세워 국사당이라 불러오다가 1925년 종로구 무악동으로 옮김

  • 표석설명
무속당(巫俗堂)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唯一)의 잔형(殘形)으로 보이는 당(堂)
당(堂)의 기원을 보면 태조가 조선을 개창(開創)하고 수도를 서울로 옮긴 1년 뒤, 즉 태조 4년(1395) 12월에 북산(北山)인 백악 산신(白岳山神)을 진국백(鎭國伯)에 봉하는 한편 남산 산신(南山山神)을 목멱대왕(木覓大王)에 봉하여 국가에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그 뒤 목멱대왕을 봉사(奉祀)하기 위하여 지은 신사를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렀는데, 이 신사는 현재 남산 꼭대기 팔각정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한강쪽 서남간에 위치한다. 매년 관(官)에서 춘추(春秋)로 초제(醮祭)를 행하였기 때문에 일반에서는 국사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종 때부터 강력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과 중종 때부터 실시한 도덕사회 건설의 지표 아래 무속신당 등 모든 음사(淫祠)는 철폐되었지만 이 국사당만은 없애지 못하였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그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국사당을 이건(移建)할 것을 협박하고 종용하였다. 어쩔 수 없이 당을 헐어 그 재목으로 현재의 위치에 건립하였는데 후면과 우측으로 내물린 것 외에는 형태나 구조를 모두 남산의 건물 구조와 같게 하였다. 현재의 위치로 택한 것은 조선시대 진산(鎭山)의 기슭이며, 또 무학대사의 기도 자리인 데다가 이 당에서 무학대사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의 평수는 원래 6칸이었으나 후면과 우측을 2∼3칸 내물려 지어 약 15평 정도로서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목멱산 봉수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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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남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하여, 갑오경장 다음해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어 왔다.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대라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게 되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5개소가 있었다 하는데, 현재 봉수대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 자리를 확인할 수는 없는데, 『청구도』등의 관련자료를 종합하여 1개소를 복원하였다.
  • 연중무휴
  • 주차시설: 공원 내 주차장이 협소함으로 가능한 대중교통 이용 바람
  • 유모차대여여부: 불가
  • 문의및안내: 중구청 문화재시설관리팀 02-3396-5843
  • 관련 홈페이지: 서울중구문화관광, 문화재청
  • 봉수대 아래 케이블카 입구에는 자물쇠를 걸 수 있는 곳이 위치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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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우리가 누에머리를 닮았다고 해 부르는 이름
  • 남산 정상 버스정류장 앞 광장에서 끊어진 성곽은 정상을 향해 이어졌다가 남산타워에서 다시 끊어지는데, 팔각정을 둘러싸고 내려가며 숭례문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 성곽을 따라 계단 길을 조금 내려가면 케이블카 정류장이 나오고, 건물을 뒤로 하고 내려가면 잠두(蠶頭)봉이 나온다.
  • 서울 도심을 가깝고도 넓게 조망할 수 있음
  • 가까이는 회현동 자락 우리은행 본점이 보이고, 남산골 한옥마을, 남대문로 한국은행과 남대문 시장,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이 보임
  •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옴
  • 주로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포토존


남산 회현자락 유구 발굴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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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변은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는데, 발굴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성곽복원 1단계 공사
    • 2010년 마무리
    •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중구 남대문 5가 회현자락 남산공원의 지형을 복원
    • 2009년 12월 1단계 공사에 들어가 총 사업비 44억원을 들어 남산공원 아동광장 일대 1만3700㎡(4144평)규모의 지형과 인근 성곽 84m를 복원함
    • 탐방로 104m를 흙으로 포장하고 주변에는 식생복원을 위해 소나무 61그루와 느티나무 83그루 등 8종 3만7039그루의 나무를 심음
    • 시민들에게 편의를 위해 진입광장 1곳, 파고라 2곳, 전망데크 1곳, 의자 16개 등도 설치


  •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성곽복원 2단계 공사
    • 2012년 마무리
    • 2012년 1월 시작하여 성곽 239m와 새로이 공원을 단장함
    • 힐튼호텔 앞에서 계단을 올라 성곽을 따라 걸으면 백범광장을 지나 70m 생태통로를 거쳐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까지 막히지 않고 갈 수 있게됨
    • 남산 일대 17만1900㎡ 공간을 재조성하고 총 777m 한양도성을 복원
    • 유구(遺構)가 나온 130m는 성곽 원형을 복원하고, 훼손이 심해 성곽 유구가 없는 백범광장 내 109m 구간은 성의 흔적을 상징하는 성곽선으로 복원함
    • 새롭게 만든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시가지를 감상할 수 있도록 산책로도 만듦


  •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성곽복원 3단계 공사
    • 숭례문과 남산 정상을 잇는 남산 회현자락에 걸쳐 있는 옛 한양도성 미복원 구간이 복원. 정비
    • 3단계 사업을 위해 성곽추정선에 위치한 중부공원녹지사업소를 옛 서울시 남산청사로 이전하고, 중앙광장분수 가동을 중단
    • 남산 회현자락 중앙광장 일대 총 448m로, 이 중 189.3m의 한양도성 유구를 대규모로 발굴
    • 2013년엔 분수광장, 식물원 일대의 평지구간에서 94.1m를, 올해엔 분수대 상․하부, 임야, 주차장 일대의 탐방로구간에서 95.2m 유구를 각각 확인
    • 교육연구정보원~옛 식물원터로 이어지는 성곽 448m 구간에서 진행
    • 발굴조사와 복원이 이뤄지는 중앙광장 일대는 조선신궁의 본전이 있던 장소로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가장 많이 훼손된 곳으로 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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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발굴2.jpg


백범광장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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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백범광장 주변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백범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모두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최근 다시 쌓았다. 다만 지형 훼손이 심해 원형을 살릴 수 없는 구간에는 성벽이 지나던 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 흔적을 표시해두었다
*주변 대중교통 (지하철, 버스)
4호선회현: 4번 출구, 도보 9분
4호선서울역: 11번 출구, 도보 12분
1호선서울역: 8번 출구, 도보 13분
교육연구정보원: 순환02, 도보 3분
백범광장: 간선402/405, 순환03/05, 도보 5분
  • 서울시 중구 회현동의 남산공원 서쪽으로 도성상곽 계단을 따라 남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넓은 잔디광장과 더불어 백범광장이 조성되어 있음
  •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앞으로 약 6000평 규모의 드넓은 잔디광장 조성되어 있고, 광장 옆에는 허례허식 결혼문화를 개선한다는 취지로 호현당이 있음
  • 백범광장에는 원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있었던 곳이나 4.19혁명때 허물고 지금은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음
  • 2009년부터 백범광장 구간의 서울성곽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한양도성 기단부를 발견하고 서울 성곽 약 84m의 성곽 복원공사를 마무리 함

주변연계구간

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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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간소개 : 비경과 풍유가 흐르던 남촌
  • 소요시간 : 1시간 30분
  • 도보구간 :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 도편수 이승업 가옥 → 오위장 김영춘의 가옥
  • 만남장소 : 남산골 한옥마을


  • 이용안내
    • 지하철: 충무로역 3·4번출구 사잇길로 도보 5분
    • 버스: 퇴계로3가, 한옥마을 정류장에서 하차 7011,104,105,140(강남방향)/ 421,463,507,604,남산순환버스02,05,90s투어/ 공항버스6001,6015, 6021
    • 입장료: 무료
    • 전통정원 개방시간: 24시간 개방
    • 한옥 관람시간: 하절기(4월~10월) 09:00~21:00/ 동절기(11월~3월) 09:00~20:00
    • 매주 월요일 휴관

숭례문구간


소개

  • 구간  : 백범광장-남대문시장-숭례문-남지 터-대한·서울상공회의소-소의문 터-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자고등학교-돈의문 터
  • 거리  : 1.8km
  • 소요시간  : 약 1시간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이어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도 가장 많았다. 상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는 문 밖에 칠패시장, 문 안 선혜청 창고 앞에 남대문 조시(朝市)가 만들어졌다.1899년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고, 1907년에는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다.이후에도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성벽이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다.
숭례문 운영시간
시기 관람시간
연중상설(월요일 휴무) 09:00~18:00
여름철(6월~8월) 09:00~18:30
겨울철(11월~2월) 09:00~17:30


교통편 안내

  • 숭례문에서 출발
숭례문으로 출발하는 길

ㆍ서울역 (1,4호선) 4번출구 → 도보 10분 → 숭례문
ㆍ시청역 (1,2호선) 8번출구 → 도보 12분 → 숭례문
ㆍ회현역 (4호선) 5번출구 → 도보 5분 → 숭례문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4번 출구 도보로 10분,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8번 출구 도보로 12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에서 남대문시장을 통해 도보로 5분이 소요된다.


  • 돈의문 터에서 출발
돈의문 터에서 출발하는 길

ㆍ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 도보 7분 → 돈의문 터·강북삼성병원
ㆍ시청역(1,2호선) 2번 출구 → 도보 20분 → 돈의문 터·강북삼성병원
ㆍ독립문역(3호선) 7번 출구 → 도보 15분 → 돈의문 터·강북삼성병원
ㆍ간선 101, 710, 470, 471, 704, 720, 601, N37
   (서대문역사거리ㆍ적십자병원)
ㆍ종로05(강북삼성병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도보로 15분, 지하철 2·5호선 서대문역 4·5번 출구에서 도보 5분이 소요된다.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경교장을 들러보고 정동으로 건너가 보자.


  • 정동에서 출발
정동에서 출발하는 길

시청역(1,2호선) 1,10,12번 출구 → 도보 5분 → 배재학당동관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12번 출구에서 덕수궁 돌담길로 도보로 1분이 소요되고, 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배재학당동관으로 도보로 5분이 소요된다.
정동 일대를 돌고 숭례문 또는 돈의문 터 방향을 선택해 걸을 수 있다. 숭례문 방향으로 간다면 남대문시장을 들러보길 추천하고, 돈의문 터 방향이라면 월암근린공원 방향으로 연계하여 역사문화유적(교남동, 행촌동)을 찾아보거나, 서울역사박물관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구간 주요지점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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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 남대문시장과 칠패시장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남대문 밖에는 칠패(七牌) 시장이 있어 종루(종로4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칠패라는 명칭은 이곳이 어영청 제7패의 순라길이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 소의문 터
소의문 터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배재학당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서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 구 러시아 공사관
구 러시아공사관

고종 27년(1890)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동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1896년 2월 이곳으로 피신해 1년 간 머물렀다(아관파천). 
한국전쟁 중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탑 부분만 남았다.




정동교회

<사적 제256호>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회이다.




  •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캠퍼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워졌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6.25전쟁 때 붕괴되었다가 1960년대 초 복구하였는데, 남쪽 건물의 외관은 처음 건축할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다. 외벽을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 건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하였다.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3호>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이 창설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887년 왕후가 지어준 것이다. 학교 경내에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와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 유관순 동상, 손탁호텔 터 표석 등이 있다.

돈의문 터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인왕산구간

소개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산에서 인왕(仁王)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어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 구간 : 돈의문터~창의문
  • 거리 : 4.0km
  • 소요시간 : 약 2시간 30분
  • 24시간 개방(매주 월요일 휴무)
  •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을 지날 때에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돈의문 터-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암문-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교통편 안내

돈의문 터에서 출발하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준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 서대문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와 도보 3분을 이동하시면 도착할 수 있다.

인왕산 교통편.PNG

구간 주요지점

  • 돈의문 터

옛 돈의문.jpg 보이지 않는 문.gif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3월 6일 일제에 의해 경매를 하여 205원 50전의 가격으로 경성 염덕기(廉德基)에게 목재가 다 낙찰되어 팔려나갔고 석재는 도로의 개수에 사용하였고 고고학적으로 참고할 부속물들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하기로 하였다 전해짐. 우리가 알고 있는 서대문(西大門)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이 시기부터 돈의문이라는 원래 이름을 잃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1915년 6월 10일에는 마침내 돈의문의 남아 있던 홍예석까지 철거되면서 완전히 그 흔적이 사라지고 지금의 터만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둘러 소의문과 더불어 돈의문을 헐어 없앤 이면에는 1915년 9월부터 경복궁에서 열기로 한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현재 옛날 돈의문이 있던 자리에는 터만 남아있고 그 자리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 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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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 건물은 1938년 일제 치하에서 금광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던 최장학이란 인물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할 때 까지,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건물을 집무실과 숙소로 이용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 청사로 이용하였다. 경교장(京橋莊)이라는 이름은 백범이 근처 개울에 있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고쳐지은 것이라 한다. 백범이 서거한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 특수부대 및 임시 의료진 주둔 시설, 한국전쟁 종전이후 베트남 대사관 등으로 활용되고 1968년부터는 고려병원(1995년 강북성심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며 이 시기에 내외부가 병원으로 개조되면서 원형이 변형된 것이다. 이때부터 경교장을 보전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1990년대부터는 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2001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129호로 지정, 2005년에는 사적 제 456호로 승격되었다. 그 이후 2010년 경교장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에는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 홍파동 홍난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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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파동 홍난파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에 위치해 있으며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가 살던 집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 과 같이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됐고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될 가치가 높다. 2004년 9월 4일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 사직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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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터널로 광화문을 조금 지나서 인왕산 자락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 도성 성벽은 바로 이 사직터널부근에서 끊어졌다가 터널 남쪽 주택가 골목에서 다시 이어진다. 터널 북쪽에 조선시대에 조성된 사직단이 위치해 있어서 사직터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 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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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또는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서울특파원을 겸하며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 2017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에는 저소득층 12세대가 거주해 오다가 퇴거하고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인왕산 순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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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38m의 인왕산(仁王山)은 한양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서북쪽에서 북쪽을 따라 내려오는 산이다. 조선 초기에는 서산, 중종 이후로는 필운산으로 불렸다. 인왕산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터로 잡고 인왕산을 강력한 진산후보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시 여겼다. 비록 정도전의 반대에 한양도성의 진산이 되지는 못했지만 백악산의 서편에 위치한 우백호가 되었으니 그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할 수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한양도성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전역이 한눈에 들어와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인왕산과 관련된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대표작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관념적인 풍경이 아닌 실제 풍경을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평가 된다. 검은 먹을 사용해 비온 뒤 인왕산의 기암괴석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바위 틈새를 흰 선으로 표현해 사실감을 더했다. 인왕제색도는 1984년에 국보 제 216호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높이 사고 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jpg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인왕산 자락 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위치해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해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으며, 가까이에는 윤동주문학관도 있다.

  • 최규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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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의 동상이 창의문 앞 길가에 위치해 있다. 1.21사태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최규식 동상은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이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백악이 각각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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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彰義門)은 도성의 서북쪽을 지키는 문으로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다. 창의문도 다른 도성문들처럼 임진왜란 당시 문루가 없어지고 망가져 있었다. 영조 17년(1741년) 1월에 창의문의 홍예석 깨진 것과 문비를 고치고 문루를 짓는 공사가 진행 되었다. 인조반정 때에는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간 지점에는 북단이라고 하는 제단이 있는데 이는 기우제나 제사를 받지 못하는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군사화가 되고 또 제의 기능이 발전하면서 북교는 임금이 친림하여 쏘기를 하거나 친히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 되었다. 그럴 때 창의문은 임금이 출입하는 문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한양도성 이야기

안이토리 애사

도성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각자는 약 300개 정도 된다 한다. 여기서 각자는 성벽의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목면산 동쪽 기슭, 각자가 많이 남아 있는 구간에 안이토리(安二土里)라는 이름이 새겨진 각자가 두 군데 있다. 석수인 안이토리는 평민으로 추정되고 석수로서 실력을 인정받아서 도편수에는 못 미치지만 편수가 되어서 도성 각자에 세 번이나 등장하였다. 특이하긴 하지만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안이토리라는 이름이 도성의 각자가 아닌, 공식 기록물인 승정원일기 1711년(숙종37년) 4월 8일자에 등장하였다. 다른 소식도 아닌 부음(訃音) 즉 죽었다는 소식으로 말이다. 석수로서 여기저기서 도성 쌓는 일을 하고 석수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편수의 자리에도 올라간 안이토리는 광화문을 짓는 공사를 하다가 돌에 깔려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안이토리의 나이가 얼마인지, 가족 관계가 어떠한지와 같이 그의 인생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고 어디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도성 쌓는데 인생을 바치다가 종국에는 목숨을 바친 일꾼 안이토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안이토리 씨는 그나마 각자로 남고 승정원 일기에 도 이름넉자가 올라갔으니 이렇게 기억이라도 할 수 있지 도성을 쌓고 고치고 하는 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땀과 피를 바치고 사라져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한양 도성은 누가 쌓았는가 물어보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쌓았다라고 답할 수 있다. 임금도 한몫 하고 관료들도 장수들도 맡은 일을 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몫은 돌을 떠서 나르고 쪼아서 모양을 만들고 땅을 파고 다지며 도성을 쌓아 올린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도성은 수많은 안이토리들의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북정마을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부분인 백악(북악)구간의 와룡공원 지나서 암문을 나선 곳에 자리잡은 북정마을 만해 한용운선생의 거처였던 심우장과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품고있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입니다.

동대문의 옛 이대부속병원 자리에 들어선 한양도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015년 2월 15일까지 한양도성 마을 특별전으로 북정마을과 함께 낙산공원 부근의 장수마을을 소개했는데 북정마을은 1766년(영조 42년), 성북동 일대에 어영청 북둔을 설치하고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나라에서 거주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정착시키는 것으로 마을이 시작되었다 전해집니다.

1933년 옥고를 치루고 나온 만해 한용운선생이 심우장을 지어 1944년 임종할 때까지 거처로 삼은 곳도 북정마을 가파른 골목길 안이고 김광섭시인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도 북정마을의 상징이 되어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피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하고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도시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지금의 북정마을이 만들어졌는데 옛 물길이 지나던 원형도로를 중심으로 약 50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2004년 주택재개발예정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한옥타운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40년 이상을 북정마을에 살면서 공동체생활을 해온 마을주민들은 마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발하려고 하여 갈등이 심한 듯 여러 곳에서 펄럭이는 현수막과 대자보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방문해보시면 성곽과 더불어서 성곽길로 산책도 가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주민들이 성곽과 어울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북정마을이 성곽마을이라고 칭하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한양도성의 오늘날

한양도성의 현황, 보존처리결과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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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낙산지역의 21구간과 24구간은 한양도성 전체구간 중에서도 성돌의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구간으로서 풍화성돌은 미관을 저해하고, 성벽의 구조적 불안 정성을 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금번 보존처리 대상으로 선정된 10개소는 낙산구간 내에서 가장 풍화가 진행된 성돌로서 훼손양상이 모두 비슷하게 확인되었다. 성돌은 오랜시간 풍화작용에 의해, 균열과 박리 및 박락, 입상분해 등이 발생하고, 성벽 내 빈공간이 생기면서 풍화성돌의 주변부 성돌, 특히 윗부재의 하중을 받쳐주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또한 24구간에 장수마을 주변 성곽이 반원형으로 돌아가는 부분에서는 배부름현상이 확인되었다. 배부름현상이 일어난 곳의 하부 성돌은 하중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성돌에 열상으로 균열이 발생되어 있었다.


보존처리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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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처리결과

한양도성 낙산구간 풍화성돌 보존처리 용역에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가에 위치한 한양도성 낙산지역 21, 24구간 풍화성돌 11개소를 대상으로 세척 및 강화처리, 서포트 제작 및 설치, 3D프린팅 성돌 복원, 균열부 수지처리를 2017년 8월 29일부터 2017년 11월 23일까지 실시하였다.


낙산지역 풍화성돌의 상태는 주로 균열, 박리 및 박락, 입상분해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상부 성돌의 하중을 충분히 지지해주지 못하여 구조적 불안정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조적인 보강을 위한 지지대를 설치하고, 지지대의 유실 방지 및 미관향상을 위해 3D프린팅복원을 하였으며, 배부름현상이 나타난 지점의 성돌 균열부에 수지처리를 실시하였다.


3D프린팅 성돌복원은 낙산지역 21구간 2개소에 대해 3D스캔 통해 획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3D프린팅 성돌을 제작하고, 서포트를 설치한 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실시하였다.


균열부 수지처리는 24구간 배부름현상이 확인된 지역의 성돌 균열부에 에폭시 수지인 L-30과 동일암종 석분, 혼합제를 이용하여 내부를 충진하고, 표면을 주변과 이질감이 없도록 색맞춤을 실시하였다.

출처: 서울특별시 담원문화유산 사적 제 10호 한양도성 낙산구간 21, 24구간 풍화성돌 보존처리 보고서

한양도성의 행사 및 순성프로그램

한양도성 행사

  • 12월 행사 일정
*순성관이 만든 한양도성 사진전(11.28~12.9)(10:00~17:00)
한양도성의 사계, 한양도성과 방문객, 유산 보존 및 활용, 시민순성관 활동 등
*시민순성관 나눔대회(12.14, 16:00~18:00)
신규순성관 위촉장 수여, 재위촉자 발표, 모범 순성관 시상 등


  • 성북진경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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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함께 해 온 성북구의 역사문화를 주제로 매년 10월 개최되는 지역축제
한양도성문화유산축제, 전시, 공연·공모전 등 개최


  • 성곽마을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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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북정·다산동 등 한양도성 성곽마을 축제
마을음악회, 전시·공연, 전통체험, 마을투어 등 다양한 주민 참여 프로그램으로 구성


  • 한양도성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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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유산가치의 공유 및 보존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해 2013년부터 매년 개최
마을잔치, 순성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


한양도성 순성프로그램

  • 해설 프로그램

해설사와 함께 한양도성을 둘러보는 프로그램 상시이용가능한 프로그램과 주말프로그램이 있으며, 한양도성을 4개 구간으로 나누어 여러 기관에서 운영

*코스안내(프로그램별로 출발장소, 소요시간은 상이함)
1. 백악(북악)코스 | 창의문~혜화문/약 3시간 소요/난이도 높음 창의문 → 백악마루 → 숙정문(북대문) → 말바위안내소 → 와룡공원 → 혜화문
2. 낙산코스 | 혜화문~흥인지문/약 1시간 소요/난이도 보통 혜화문 → 장수마을 → 암문 → 낙산공원 놀이마당 → 이화마을 → 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 동대문성곽공원 → 흥인지문
3. 흥인지문코스 | 흥인지문~장충체육관/약 1시간 소요/난이도 쉬움 흥인지문 → 오간수문 터 → 이간수문 →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 → 동대문역사관 → 광희문 → 천주교 신당동교회 → 장충체육관
4. 남산(목멱산)코스 | 장충체육관 ~ 백범광장/약 3시간 소요/난이도 약간 높음 장충체육관 → 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 → 남산공원 정류장 → N서울타워 → 남산 팔각정 → 목멱산 봉수대 터 →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 → 남산회현자락 발굴현장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백범광장
5. 숭례문코스 | 백범광장 ~ 돈의문 터/약 1시간 소요/난이도 쉬움 백범광장 → 남대문시장 → 숭례문 → 남지 터 → 소의문 터 → 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 → 정동교회 → 돈의문 터
6. 인왕산코스 | 돈의문 터 ~ 창의문/약 2시간 30분 소요/난이도 높음 돈의문 터 → 경교장 → 월암근린공원 → 홍파동 홍난파 가옥 → 암문-인왕산 곡성 → 인왕산 범바위 → 인왕산 정상 →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창의문

신청기간 : 2018.3월부터 수시, 선착순 접수 신청방법 : 온라인 접수

① 서울시 공공예약서비스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투어’검색 http://yeyak.seoul.go.kr/main.web

② 종로구 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jongno.go.kr/tour/reservation/view.do?menuId=110428&menuNo=110428&seq=6

투어신청 관련 문의 : 종로구 관광체욱과 (T.2148-1864)

  • 스탬프 투어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한양도성을 전체를 돌아볼 수 있도록 기획된 프로그램

이용방법
1. 스탬프 운영장소(4개 지점)에서 도성 지도를 받아서 투어를 시작합니다.
2. 한양도성을 걸으며 운영장소에서 스탬프를 찍습니다.
3. 한양도성을 완주하고 4개 스탬프를 모두 받으시면 운영장소에서 완주배지를 받습니다
1지점: 말바위 안내소/ (02)765-0297	
2지점: 흥인지문 관리소/ (02)2148-4166
3지점: 강북삼성병원 정문 보안실/ (02)2001-1112
4지점: 숭례문초소 우측 5m 지점/ (02)3396-4623  	

스탬프에여.jpg

출처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main/heritage

서울한양도성 http://seoulcitywall.seoul.go.kr/index.do

공공누리 http://www.kogl.or.kr/index.do

한국컨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101201960001

money S 뉴스 http://moneys.mt.co.kr/news/mwView.php?type=1&no=2017071108248020663&outlink=1

서울시 문화블로그 http://culturenomics.tistory.com/901

네이버 백과사전 https://terms.naver.com/

한국관광공사 http://korean1.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603336

한겨례 온 뉴스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1

조선일보 뉴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11/2012061100124.html

조경뉴스 http://www.lafent.com/inews/news_view.html?news_id=112446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305281362776530

한양도성 공식 홈페이지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구글맵 https://www.google.co.kr/maps

신희권 (2016).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 북촌

서울특별시 한양도성도감 [편](2016).《한양도성 : 서울특별시 한양도성도감 [편] 》. 서울특별시 한양도성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