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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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고종 16년인 1879년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숙영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님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만해라는 법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14살이 되던 해에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고, 결별하구서 훗날 유숙원과 결혼했고, 자녀는 한보국과 한영숙을 두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로서 활동했으며, 대표작으로는 님의 침묵이 있다.

생애

출생과 성장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재능을 보여 6세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9세 때는 문리를 통달하여 16세의 나이에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한응순과 어머니 방숙영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집안 형편이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형인 한윤경이 토지를 마련했지만, 이마저도 한용운이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그는 14세때 지주의 딸인 전정숙과 결혼했고, 이들 사이에는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했다고 한다.


청년기

1894년 동학농민군에 가담을 했으나, 아버지가 농민군 토벌에 참여를 하셔서 대립을 했다고 한다. 그 후 1895년 고향을 떠나 1896년 오세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그 후 그는 머슴살이를 하며 불교의 기초지식을 쌓았고, 학문적으로 관심이 많아 대장경을 열람한 뒤, 1896년 하산하여 시베리아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1876년 처가에 귀가해 2년간 은신하다가 출가했다.


대한제국기 활동

그는 출가 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을 은사로 하여 득도한 후 전영제에게 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은 뒤 계명을 봉완, 법호는 만해라 하였다. 이 후 그는 불교 서적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적들을 수용하며 근대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의 설립에 참여하고,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 후 1910년 그는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했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중추원한국통감부에 승려의 결혼 자유화의 진성서를 올렸는데, 부처님이 결혼을 금지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란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조선총독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활동

불교의 단합화를 위한 만해의 활동

1910년 12월 한일 불교 동맹을 반대철폐하고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 김진응, 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저지했다. 그리고 1914년 불교학원과 명진학교의 교사로 초대되어 교편을 잡았고, 조선 불교 청년 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다. 그리고 이 해에 불교대전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때 이후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교단, 종단간의 갈등 완화 및 협력을 주장하는 선교진흥론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한글로 불교경전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불교 포교에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 후 1913년 그는 박한영외의 몇몇 사람과 조선불교 종무원을 창설했고,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였다. 이 후 정선강의 채근담을 국한문 혼용체로 저술하였으며,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18년 11월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였다. 그는 여기에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였으며, 불교의 홍보,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었다. 그리고 1931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개칭하여, 불고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 홍보에 온 정력을 기울이고 청년 법려 비밀 결사인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결국 1933년 권상로에게 잡지사는 다시 재인수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

그는 1918년 12월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했다. 이 당시 그는 평화 시위가 격하되어, 고문이 두려워 자수하려는 민족 대표 33인의 머리에 인분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그는 수감되어있을 당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지만,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상해에 전달되었다 이 후 1919년 11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 발표되었다. 1922년 5월 그는 출옥했으며,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는데, 청중들이 극도로 열광했다고 한다. 이후 1922년 9월 잡지 개벽에 옥중시 ‘무궁화를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이 후 1927년 2월에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를 결성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1928년 그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재임되고서 경성지회 회장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뢰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1940년 5월 창시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생애 후반

말년에 그는 중풍으로 생계가 어려워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회, 김성주, 만공 등 지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생활했다. 그리고 영양실조와 병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사망하였다.

연대기

1879년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에서 아버지 한응준, 어머니 방숙영의 차남으로 출생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득도
1909년 조선불교유신론》 집필
1910년 한일불교동을 반대철폐 및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들과 독립운동 협의
1914년 『채근담』 저술,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1917년 조선불교회 회장 취임
1918년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 발행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소
1926년 님의 침묵〉 발표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연재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별세

작품 목록

한시

한시
1. 영호 화상에게 만나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함
2. 완호 학사를 보내며
3. 만화 화상을 대신하여 임향장을 조상함
4. 가을밤의 비
5. 선방의 뒷동산에 올라
6. 피난 도중 비에 갇혀 머물면서
7. 석왕사에서 영호·유운 두 스님을 만나 두 수를 지
8. 영호 화상과 함께 유운 화상을 찾아갔다가 밤길을 같이 돌아옴
9. 산가의 새벽
10. 본 대로 느낀 대로(1)
11. 한적 두 수
12. 영호 화상의 시에 차운함(1)
13. 고향 생각(1)
14. 영호 화상의 시에 차운함(2)

시(님의 침묵 시집 수록)

시(님의 침묵 시집 수록)
1. 님의 침묵
2. 이별은 미의 창조
3. 알 수 없어요
4. 가지 마서요
5. 나의 길
6. 이별
7. 나룻배와 행인
8. 당신이 아니더면

기타 시

기타 시
1. 心
2. 一萃艸의 生命
3. 가갸날에 對하야
4. 成佛과 往生
5. 聖誕
6. 비바람
7. 반달과 小女
8. 山村의 여름 저녁
9. 歲暮
10. 淺日

시조

시조
1. 尋牛在
2. 還家
3. 禪友에게
4. 早春
5. 春畵
6. 襌境
7. 秋夜短
8. 春朝
9. 코스모스
10. 漁翁

소설

소설
「흑풍」, 《朝鮮日報》, 1935.4.9~1936.2.1.
「後悔」(50회 연재중 폐간), 《朝鮮中央日報》, 1936.
「鐵血美人」, 《新佛敎》 1~2호, 1937.3.~4.
「薄命」, 《朝鮮日報》, 1938.5.18~1939.3.10.
「三國志」, 《朝鮮日報》, 1939.11.1.~1940.8.11.

단행본

단행본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불교서관. 1913
『불교대전(佛敎大典)』, 범어사, 1914
『정선강의(精選講義) 채근담(菜根譚)』, 신문관(新文館), 1917
『十玄談註解』, 法寶會, 1925.6.7

한용운의 문학적 가치

작품 활동

그는 본격적으로 1924년부터 조선일보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으며,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 조선인의 번민’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26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해, 조선불교청년회 총재에 선임되었다. 그는 이 해에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했다. 그는 이 ‘님의 침묵’에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써 검열을 피하면서도 민족정신과 민족의 현실과 이상에 관해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후 1933년에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조선일보에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그리고 1936년엔 장편 ‘후회’를 연재했다. 그리고 1938년엔 장편 ‘박명’을 발표하였으며, 이 외에도 신인문학과 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을 발표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에 중편소설‘ 죽음’을 발표하였다.

작품성

한용운의 시는 그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스님으로서 살아왔고, 이를 아름답고도 자연스럽게 문학에 녹여내었다. 그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고도의 은유와 역설법을 구사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시들을 적었다. 또한, 그 당시 조선의 시조에 얽매이지 않는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으며, 정형적인 틀을 벗어나면서도 리듬감을 갖춘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해 자유시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시에 토속적인 표현과 방언을 사용함으로서 세속적이면서도 진부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썼다.

관련 장소-한용운

기타 자료-한용운

네트워크 그래프

RDF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한용운 만해 A는 B라는 호를 가졌다
한용운 심우장 A는 B에 거주했다
한용운 심우장 A는 B에서 별세했다
한용운 독립운동가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시인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승려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서예가 A는 B라는 직업을 가졌다
한용운 3.1운동 A는 B에 가담했다
한용운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가담했다
한용운 신간회 A는 B에 속했다
한용운 민족대표33인 A는 B에 속했다
한용운 조선불교회 회장 A는 B였다
한용운 님의 침묵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흑풍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알 수 없어요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행복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A는 B를 출간했다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A는 B를 발표했다
한용운 채근담 A는 B를 저술했다
이학암 한용운 A는 B의 스승이다
전영제 한용운 B는 A 밑에서 수계하였다
조선독립의서 상하이 임시정부 A는 B로 전달되었다

참고자료

한용운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853

한용운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5300&code=kc_age_40

한국현대문학 위키 -한용운 http://ko.kliterature.wikidok.net/wp-d/5bf79683ef6f47fc0c2af5dd/View

박현수(2014), 「만해 문학의 문학사적 가치」, 『만해 용운스님 70주기 추모특집』 vol16.한국불교선리연구원.

기여자

느낌있조

강서연

박민선

송영찬

송찬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