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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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1888~1968)

생애와 연보

  • 생애
지도를 불러오는 중...

1888년 7월 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홍범식과 은진 송씨 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명문 사대부가의 자제답게 어렸을 적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1901년 상경하여 중교의숙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05년 동경으로 향하여 두 차례의 편입을 통해 대성(다이세이)중학에 정착했지만, 졸업 직전 기울어가는 고국의 정세로 학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돌연 유학 생활을 중단, 귀국하고 만다.

1910년 귀국 후,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지에 학창시절 번역했던 번역시를 실는 등 동경삼재라 불리던 이광수, 최남선과 문단 생활을 하며 조선의 신문학 건설에 힘썼다. 그러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친 홍범식이 자결하고 난 뒤 문학 활동을 관두고 괴산과 서울을 왕래하다 1912년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191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는 등 문일평, 조소앙, 신채호 등 여러 인물들과 뜻을 함께 했다. 그 이후 남양, 싱가폴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며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다졌고 1918년 드디어 귀국길에 오른다.

그 이후 1919년 3.1 운동 당시 충북 괴산에서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뤘다. 출옥한 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낀 탓에 교직생활, 언론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0년 휘문고보, 경신고보 교사,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 1924년 「동아일보」 취체역 주필 겸 편집국장, 1925년 「시대일보」 사장, 1926년 오산학교 교장까지 다양한 자리를 거쳐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사회활동을 시작한지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금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정우회, 조선사정조사연구회사상운동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기반의 연구 중심, 행동 중심 운동을 진행하였다.

1926년에는 카프의 기관지인 『문예운동』을 통해 평론을 발표하고 「학창산화」를 간행하는 등 초기 프로문학에 기여했으며 1927년부터는 신간회 창립 멤버이자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1928년 본격적으로 「임꺽정」 집필을 시작했지만, 1929년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인해 재차 투옥되면서 연재가 중단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이끌었다. 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는 정치인으로서 내각 부수상,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며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보전되어 있다.

  • 연보

1888년 (1세) 음력 5월 23일, 충북 괴산에서 홍범식과 은진송씨간의 장남으로 태어남.본관은 풍산, 호는 가인, 벽초.

1900년 (13세) 여흥 민씨가의 규수 민순영과 조혼하다.

1902년 (15세) 서울중교의숙에 입학하다.

1903년 (16세) 장남 홍기문 태어나다.

1906년 (19세)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도요상업학교예과에 편입하다.

1907년 (20세) 도쿄 다이세이 중학교에 편입하다.

1910년 (23세) 다이세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소년』지에 번역시「사랑」등을 발표하여 신문학 운동에 동참하다. 8월 29일, 군산군수로 재직중이던 부친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하다.

1912년 (25세) 해외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중국으로 떠나다.

1913년 (26세)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가담, 활동하다.

1914년 (27세)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남양으로 행하다.

1919년 (32세) 3.1운동 당시 괴산만세시위를 주도하여 투옥되다.

1920년 (33세) 출옥하다.

1923년 (36세) 서울에서 조선도서주식회사 전무로 근무하고 사회주의 사상단체 신사상 연구회에 창립회원으로 가담하다.

1924년 (37세)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고 화요회에 가담하다.

1926년 (39세) 시대일보 사장이 되고 칼럼집 『학창산화』를 간행하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단체 조선사정조사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다. 평북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다.

1927년 (40세) 민족 협동전선 신간회가 결성 될 때 주도적 역할을 하고 결성 후 신간회 조직부 총무간사로 활동하다. 오산학교 교장직 사임하다.

1928년 (41세) 11월 21일『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하다.

1929년 (42세) 12월 신간회 민중대회사건으로 투옥되고『임꺽정』연재를 중단하다.

1932년 (45세) 가출옥으로 출감하다. 12월『조선일보』에『임꺽정』연재를 재개하다.(「의형제편」부터)

1935년 (48세) 12월 병으로 인해『임꺽정』연재를 중단하다.

1937년 (50세) 12월 조선일보에『임꺽정』연재를 재개하다.(「화적편」 ‘송악산’ 장부터)

1939년 (52세) 7월 임꺽정 연재를 중단하다.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임꺽정』4권이 간행되다. (~1940년) 경기도 양주 창동으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하다.

1940년 (53세) 10월『조광』지에『임꺽정』연재를 재개하다. 그러나 단 1회 게재 후 임꺽정 연재는 영구히 중단되다.

1948년 (61세) 을유문화사에서『임꺽정』6권이 간행되다. 4월 김구, 김규식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 회의에 참가하다. 그 후 북에 남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부수상으로 임명되다.

1954년 (67세) 평양국립출판사에서『림꺽정』6권이 간행되다.(~1955)

1961년 (73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대위원장이 되다.

1962년 (74세) 부수상직을 사임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다.

1968년 (80세) 3.5일 노환으로 별세하다.

작품활동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장편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林巨正)』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사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1928년 『조선일보』에 첫 연재를 시작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중단되었다가, 광복 직후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방의 도둑으로 실록에 그 행적이 단편적으로 기술되기도 한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내었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는 첫째,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 준다. 당시 종래의 역사소설이 철저히 왕조사 중심이거나 근거 없는 야사에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역사 왜곡과 함께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 주었던 것에서 벗어나 이 소설은 충실하게 민중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둘째, 그로인해 당시의 상·하층에 두루 걸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관습을 충실히 재현해 내고 있다. 셋째, 우리말의 고유어와 사투리를 자주 사용하였다. 소설 속에 부려쓰고 있는 낱말과 문체에서 우리 고유어를 풍부히 되살려 내고 있으며, 일본어 번역투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입말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 내고 있어, 연재 당시에도 ‘조선말의 무진장한 노다지’라고 평가받기도 하였던 소설 문체의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넷째, 민중정서의 형상화를 그려내었다. 봉건적 요소에 저항하는 반봉건적 움직임의 강한 생명력을 드러냄으로써 건강하고 낙천적인 민중정서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역사소설의 양대 흐름을 지배하던 이광수(李光洙)류의 교훈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나, 박종화(朴鍾和)·김동인(金東仁) 류의 야사에 기댄 영웅주의적이고 부정확한 역사소설의 경향을 뛰어넘어 민중 정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홍명희의 수필집으로 B6판, 반양장 18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6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하였다. 서문이나 후기 없이 바로 본문에 들어가 <과학> <질소량><양><활동사진><색각과 감정><인도사회><미신> 등 92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필이라기보다 해설과 단상이 주가 되어 있는 지식을 위한 교양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두의 <과학>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과학은 무엇인가. 실험, 관찰, 비교, 추리로 얻은 각각의 지식을 통일하여 일과학문을 조직한 것이다. 그 목적하는 바는 곧 개개 지식을 추구하여 일정한 이법에 도달함이다. 과학을 광의로 말하면 자연계 특수 현상을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사상 행위 미감의 법칙을 연구하는 정신과학을 포함하나, 협의로 말하면 자연과학을 지칭함에 그치는 것이다. 희랍 대학자 아리스토톨은 싸이엔스(Science)를 3종으로 대별했다. 一(일)은 순리적(純理的 Theoretical)이니 수학 물리학 철학 같은 것을 이름이요, 二(이)는 실천적(Practical)이니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같은 것이요, 三(삼)은 창조적(Creative)이니 시학, 미사학(美辭學) 같은 것을 이름이다.”와 같이 거의 해설로 되어 있다.


관련 컨텐츠

  • 드라마 임꺽정

임꺽정을 소재로 한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드라마

1996년 11월 10일부터 1997년 4월 6일 까지 방송됨

드라마임꺽정재생목록

  • 만화 임꺽정

고우영이 그린 임꺽정 이야기를 다룬 만화이다. 1972년부터 일간스포츠에서 연재했다. 고우영작 만화 '임꺽정' 설명

만화임꺽정.jpg 만화임꺽정2.jpg 만화임꺽정4.JPG

  • 애니메이션 임꺽정

김청기 감독이 만든 임꺽정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1997년 개봉되었다.

애니메이션임꺽정.jpg


  • 영화 임꺽정

임꺽정을 소재로 한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1961년에 개봉됨


유학생활

1905년, 18세였던 홍명희는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다시 고향인 충북 괴산으로 내려왔다. 우연히 그곳에 잠깐 머물던 일본인 부부에게 일본어를 배운 뒤로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05년 여름 무렵 동경으로 간 그는 이듬해 봄 동경상업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지만, 1907년에 다시 대성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동경상업학교와 대성중학교에서의 첫 학기 성적은 우수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독서 탐독에 빠져 학과 공부를 등한시하였다. 당시 일본은 1900년대 후반기부터 일본문학사상 근대문학의 확립기이자 자연주의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러일 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문학 형성에 러시아 문학이 큰 영향을 끼쳤다. 홍명희 역시 그곳에 지내며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탐독했다. 이때 가인(假人)이란 필명으로 폴란드 시인 네모에프스키의 작품 「사랑」을 비롯하여 여러 소설작품을 번역했다.

그의 유학 시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동경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후대에 우리나라 문학사, 사상사에 이름을 알린 인물들과 넓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동경에 도착한 직후에 홍명희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호암 문일평을 만나게 되고, 그 뒤로 춘원 이광수를 알게 된다. 그리고 후에 육당 최남선과 연을 맺은 홍명희가 이광수에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여기서 ‘동경삼재’, ‘조선삼재’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1910년 봄, 홍명희는 돌연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유학 시절 주로 탐독했던 일본 자연주의 작가들의 문명비평적인 작품들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큰 혼란을 주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당시 조선의 암울한 정세와 민족의 비극적 상황들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일합병 직전에 이르기까지 점점 악화되는 정치 상황은 일본 유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홍명희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의 신문학을 건설하는 것보다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의 행보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아버지 홍범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활동

동제사 (출처:[1]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에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홍범식 유언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홍명희는 1913년 정인보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서 활동했고, 홍명희는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14 년 11 월 상하이를 떠나 남양으로 향하여 김덕진 정원택 김진용과 함께 일화 배척운동에 참가. 1919년 3월 괴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반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이는 충청북도 최초의 3.1운동 참여이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보고 왔으며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신간회 활동

신간회 (출처:[2]

홍명희는 민족해방운동이 분열되고 연정희가 부활을 기도하는 상황에 민족협동전선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1927 년 1 월 29 일 권동진 · 김준연 · 문일평 · 신석우 · 신채호 · 안재홍 ·이관용 · 이승복 · 한기악 · 한용운 · 한위건 · 홍성희 등 28 인의 명의로 신간회 발기를 정식 공표하였다. “신간회 운동은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 간의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첫 시발로서 의의가 크다

벽초가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그는 1927년부터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민족유일당운동신간회를 이끌었다. 벽초와 함께 ‘조선 3재’라 불렸던 최남선 이광수가 일찍이 일제에 투항하여 조선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그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고 민족개량주의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길을 걸었다.

홍명희는 1926 년 10 월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신간회 운동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겪고 있던 홍명희는 안재홍의 권유로 1928 년 11 월부터 『조선일보』에 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생활을 떠난 문예는 생활의 문예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임꺽정』에 강하게 반영하였다.

정치활동

광복 이후

1946년 2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식

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 개선 환영대회에서 축사했다. 또한,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월 29일 서울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역설했다. 김구와 임시정부 측이 신탁통치안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면서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홍명희도 박헌영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과 상임위원(常任委員)이 되었다. 또 같은 해 12월 30일에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열었는데 그가 위원장이 되어 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박헌영, 여운형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반탁운동에서 탈퇴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로 인해 홍명희는 지조를 꺾고 스스로 반동분자가 되었다는 비판받게 된다.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는 여운형에 가려져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로도 민주통일당(民主統一黨),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등 군소 정당의 대표를 맡았으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세력 확대에는 실패했다.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명성이 드높았던 인물이지만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남북한 단일 수립 정부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

김일성과 무정. 무정의 세력은 연안파가 되어 김일성과 크게 대립한다.

1947년 11월 총선 실시 및 감시를 위해 입국하는 UN 위원단 환영대회에 명예회장 이승만, 회장 조소앙에 이어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했다.

그는 1945년 12월 김일성과 연안파의 우두머리였던 무정의 환영준비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그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이때부터 홍명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체로 보아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인물인 홍명희는 1946년 봄부터 북한 공산당에 포섭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46년 3월 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의 비밀 방북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둘째 아들홍기무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은 성시백(成始伯, 1905~1950)의 공작도 있었지만, 홍명희의 설득이 결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김구 등의 방북 직전인 1948년 2월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왔다고 하는데, 소련군의 군사위원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혀졌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을 때 방북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살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본격적인 정치 활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홍명희는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다.

북한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副首相)에 선출되었다.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 정치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949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조소(朝蘇) 공식회의(제1차 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소련 사절단에게 공군을 확장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김일성이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러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그도 부수상 자격으로 동행하였고, 당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스탈린은 당시에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군이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그 후로 김일성은 무려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 번번이 거절하던 스탈린은 중국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는 등 상황이 유리하게 변하자 마지 못해 1950년 1월 30일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이런 일들은 부수상이었던 홍명희도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고 이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6.25 남침 개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으므로 주요 6.25 전범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의 시행을 발표했다. 이미 그 이전인 1949년 5월 13일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가 조직되어 남한 토지개혁 준비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여기서 홍명희가 그 위원장을 맡아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 법령안을 만들었다. 이런 것들은 그가 일찍부터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숙이 죽자 김일성(金日成)은 1950년 1월 15일에 홍명희의 딸 홍영숙(洪永淑)과 재혼한다. 6.25 남침 당시 그는 김일성의 장인이었다. 6·25 때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가 홍영숙은 심장이 약하다고 증언했으므로 아마 그 문제 때문인 것 같지만 그녀가 결혼 초기에 죽어 이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김일성은 홍명희를 여러모로 배려하고 지원하여 두 사람은 상당한 유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월북 문인들이 숙청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만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이러한 김일성과의 유착 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여러 문인의 숙청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적극적으로 변호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근로자"지에 《김일성 장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며 조직자이다》라는 글을 써서 전범 김일성을 찬양한 바도 있다.

한국전쟁 때 피난 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는 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61년 5월 13일 부수상 홍명희가 위원장이 되어 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이 모여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조직했고, 이를 통해 대남 정치공세를 펼쳤다. 올림픽 위원장(委員長), 과학원장(科學院長)으로 있다가 1962년에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부위원장(最高人民會議常任委員會副委員長)에 선임 되었다.


대남 적대 활동, 선전에 개입

북한에 아무 기반도 없었고, 공산주의 활동을 맹렬히 한 전력도 없던 홍명희가 1948년 4월 월북 직후 부수상이라는 최고위직에 발탁된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인사로 보인다. 하지만 이면에는 그가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북한에 포섭되어 남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 활동을 주로 했고, 김구김규식의 방북을 성사시키고, 동행한 400여 명의 인사 중 70여 명이 북한에 눌러앉게 하여 아직 정부 출범도 못 한 남한의 우파 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남북협상 찬반으로 남한 내 갈등을 조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로 보인다. 당시 남으로 귀환하지 않은 70여 명은 방북 후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처음부터 북한을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자신이 월북 직후인 1948년 8월 말에 대남 비방 방송을 한 적이 있지만 1949년 6월 25일 ~ 28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 결성대회에서 중앙 위원회 위원과 중앙 상무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 되었다. 이 단체는 남한 내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는데, 당시 일어난 김구의 피살에 대해 홍명희는“김구 씨는 일생을 두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분투한 분입니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적 자주독립 방향에 대하여는 반민주주의적, 철저하지 못한 견해가 있었으나 … 미군 주둔을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인사였습니다. 이러한 분이 이승만 도당의 손에 조난당한 것은 비분할 뿐입니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구가 피살되는 단서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홍명희 자신이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김구, 김규식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남한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일으켰다. 김구는 방북 이후 끝까지 남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하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에 유리한 행동으로 일관하여 그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암살의 주된 원인이다. 홍명희가 진심으로 그렇게 독립지사의 죽음에 분노했다면 왜 김일성 일당이 조만식과 민족진영 인사들을 잡아 가두거나 처형한 것에 대해서나, 이후의 수많은 항일 투사들의 숙청, 처형에는 입 닫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6·25 때 서울에 온 북한 공작원들의 납북 대상자 목록에는 1948년 4월 남북 정치협상에 참여한 정당·단체 지도자와 개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홍명희의 설득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김규식은 실제로 납북 당했다. 김구도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6·25 때 납북 대상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북한애국열사능에 안장된 홍명희의 묘

홍명희의 아들과 비서가 남파되어 간첩 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남 공작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1949년 9월 초순에 남파되어 홍명희가 월북 전 당수로 있었던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의 조직을 강화하고, 한국 정부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을 기도하다 12월 말에 체포되었다. 그는 6·25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감옥을 탈출하여 장인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09.07)를 납북하였고, 위당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25 당시 그는 김일성의 처남이었다.

6.25 전후로는 전쟁 준비와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전쟁에 대한 책임이 상당하다. 휴전 이후로는 1961년 5월 13일 부수상이었던 그가 위원장이 되어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祖國平和統一委員會, 조평통)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대남 정치공작과 선전을 지속해서 수행해, 남한 내 여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일을 해 왔다.


사망

1968년 3월 5일 사망했다.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관련정보

홍명희문학비

홍명희문학비

벽초 홍명희문학비’는 1998년 홍명희 30주기, <임꺽정> 연재 70주기를 기념한 제3회 홍명희문학제 때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 앞면

'임꺽정'만은 사실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입지 않고 순 조선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 후면

근대 민족 문학사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1888~1968)는 경술국치때 순국한 홍범식 의사의 아들로 충북 괴산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3.1운동때 괴산에서 충북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뒤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을 집필하여 민족적 저항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꼐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북한으로 넘어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 그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이곳 괴산은 민족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그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괴산 홍범식 고가

홍범식고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이 고가는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생가이며, 2002년 12월 20일 충청북도의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 구조는 전체적으로 정면 5칸·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一’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하여,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의 살림집의 특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집에서는 금산군수로 재직하다 1910년 한일합방에 항거·자결한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 1871∼1910) 선생이 성장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당시 지역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꾀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 가옥은 1730년(옹정 8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고가인 동시에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며, 문학사적 유산이자 항일지사의 고택인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임꺽정로

임꺽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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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로는 부천 역곡역에 위치해 있다. 임꺽정로 정비계획은 2013년에 언급되었으며 상가번영회, 주민협의체, 자문단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만화 임꺽정의 이두호 작가의 재능기부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 돼 2015년 말 임꺽정로가 조성되었다. 현재 임꺽정로 먹자골목을 이루는 상가는 모두 36개이며, 이 상가들의 출입문에는 '임꺽정상우회 등록업소'라는 마크가 등록되어있다. 최근에는 임꺽정로 통용화폐까지 만들어서 임꺽정로 상우회 등록업소에서 3만원 이상 결재한 고객들에게 쿠폰으로 증정하고 있다. 이 화페는 역곡남부시장과 상우회 전 업소에서 현금과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재미까지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관련영상

관련문헌

홍명희 소설가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평전으로 강영주가 집필하였다. 홍명희가 가담했던 사회운동과 정치활동에 대한 복잡한 논의는 과감하게 축소하고 개인 사와 인간적 면모에 밀착하여 홍명희 소설가의 삶을 재구성한 책이다.

  • 『자서전(自敍傳)』(홍명희,삼천리,1929.6.)
  • 『벽초론(碧初論)』(이원조,신천지,1946.4.)
  •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연구』(한승옥,『숭실어문』,1989.4.)

네트워크 그래프

홍명희 그래프.PNG

RDF구축 내역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명희 가인 A는 B라는 필명을 가진다
홍명희 동경삼재 A는 B라 불린다
홍명희 홍범식 A는 B와 부자지간이다
홍명희 동제사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3.1운동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신간회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일화배척운동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독립선언서 A가 B를 작성했다
홍명희 만세시위 A가 B를 주도했다
홍명희 괴산홍범식고가 A는 B에서 거주했다
홍명희 홍명희문학비 A를 B가 기념한다
홍명희 부수상 A는 B다
홍명희 김일성 A는 B의 장인이다
홍명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A는 B를 조직했다
홍명희 근로인민당 A는 B에 속해있다
홍명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A는 B에 속해있다
홍명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A는 B에 속해있다
홍명희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A는 B다
홍명희 중앙위원회 위원 A는 B다
홍명희 올림픽 위원장 A는 B다
홍명희 임꺽정 A는 B를 집필하다
홍명희 학창산화 A는 B를 집필하다
홍명희 홍명희평전 A는 B에 언급되다
임꺽정로 2015년 A는 B에 조성되었다
임꺽정로 부천 A는 B에 위치해있다
괴산홍범식고가 홍명희 B는 A에 거주하였다
괴산홍범식고가 홍범식 B는 A에 거주하였다
괴산홍범식고가 1730년 A는 B에 건축되었다
홍명희문학비 홍명희 A는 B를 기념하고 있다
홍명희문학비 1998년 A는 B에 건립되었다
홍명희문학비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A는 B에 의해 건축되었다

참고문헌

  • 강영주.(1986).「홍명희와 역사소설 ‘임꺽정’」문학과지성사
  • 한승옥.(1989).「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연구」, 민음사
  • 이남호.(1990).「벽초의 '임꺽정' 연구」 동서문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임꺽정」
  • 강영주.(2004).『홍명희 평전. 사계절출판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학창산화」

작성자 및 기여자

권순영, 김민우, 김연정, 노홍우, 최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