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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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벽초 홍명희문학비’는 1998년 홍명희 30주기, <임꺽정> 연재 70주기를 기념한 제3회 홍명희문학제 때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홍명희 문학비

  • 앞면

'임꺽정'만은 사실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입지 않고 순 조선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 후면

근대 민족 문학사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1888~1968)는 경술국치때 순국한 홍범식 의사의 아들로 충북 괴산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뒤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을 집필하여 민족적 저항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꼐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북한으로 넘어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 그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이곳 괴산은 민족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그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RDF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명희문학비 홍명희 A는 B를 기념하고 있다
홍명희문학비 1998년 A는 B에 건립되었다
홍명희문학비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A는 B에 의해 건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