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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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87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 명성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여러 학문을 탐독하며 1888년 17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을 역임하는 등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 정세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정신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은 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책임을 다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옮겨가 활동하던 중,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표되고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자결을 택했다.

활동

군수

태인군수로 있을 1907년, 당시 태인군은 아전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탓에 백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물론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없도록 힘썼다.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진행하는 등 군수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에 군민들은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세운 송덕비가 총 38개이며, 현재 남아있는 송덕비는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가 있다. 1906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독립운동

그가 금산군수에 있으며 군민들을 위한 행정을 펼치던 와중에도 국내 정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1910년, 조선의 경찰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경찰권을 강탈 당하고 이후 외교와 군사, 사법권까지 일제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이 한일병합에 관한 협의를 주고받은 뒤 친일내각이 회의를 거쳐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8월 29일, 한일합방이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선포 당일, 홍범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유서가 담긴 상자를 건네고 집으로 돌려보낸 뒤 관아의 객사로 향했다. 시종하는 고을 사령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목을 매어 자결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러나 그는 사령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김지섭에게 건넨 상자에는 가족들에게 남기는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있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아들 홍명희에게 남긴 유서 중에서(1910. 8. 29)


그러나 일제는 홍범식의 순국이 민중들에게 큰 파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자결 동기를 왜곡시켰다. '본래 있던 광증(狂症)이 발(發)하여', 즉 미치광이 증세가 발동하여 자살한 것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한민보≫를 통해 그의 자결 순국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이들이 독립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아들 홍명희와 김지섭이다. 홍명희가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그가 남긴 유서가 큰 작용을 했으며,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도 아버지 홍범식의 독립정신을 전하려 했다. 김지섭 역시 홍범식의 자결에 가장 맞닿아있던 인물로서 그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향해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4년 일본 왕궁의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를 결행하였다. 그 외에도 송철은 홍범식의 자결 소식을 듣고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동료 군수로 지내던 조용하는 군수직을 내려놓고 중국과 하와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그의 의열투쟁 정신을 본보기로 삼았다. 이처럼 홍범식의 자결 순국은 아들 홍명희와 손자 뿐만 아니라 그와 가깝지 않던 많은 이들에게도 독립 쟁취의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큰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관련장소

군수홍후범식애민선정비

태인면 태창리에 있는 피향정 경내에 '군수홍후범식애민선정비(郡守洪侯範植愛民善政碑)'가 세워져 있다. 보물 289호로 지정된 피향정은 본래 조선 전기의 누정인데, 담장 안에 위치한 21개의 비석 중 오른쪽 첫 번째에 바로 홍범식의 애민선정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운 형태로 되어있는데 뒷면에는 그가 재임 중 '흥학선치(興學善治)'의 선정을 베풀었기에 군민들이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한다는 내용이 새겨져있고 '(경술입절庚戌立節)'이라 하여 그가 순절한 뒤 1910년에 건립하였음을 나타낸다.


홍범식군수애민선정비(피향정).jpg


홍후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에 있는 감곡면사무소의 화단 내 5개의 비석 중, 오른쪽 첫번째에 '홍후범식휼민선정비(洪侯範植恤民善政碑)'가 세워져있다. '경신(庚申) 9월'이라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홍범식이 금산군수로 재임 중이던 1908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곳 감곡면사무소 화단으로 옮겨진 것은 1980년 경이다. 오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진 이 비석은 윗부분이 깨진채로 아랫부분 80cm 정도만 남아 있으며 측면에도 글자를 새겼던 흔적이 있으나 훼손이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다.


홍후범식휼민선정비.jpg


군수홍후범식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 마당 옆에 위치한 세개의 비석 중 맨 왼쪽에 '군수홍후범식선정비(郡守洪侯範植善政碑)'가 있다. 하단부가 땅에 묻혀 온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기유(己酉) 8월'이라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1909년 6월 금산군수로 전임한 직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노인정 앞 도로 건너편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군수홍후범식선정비.PNG


홍범식공원

금산읍 상옥리에 있는 조종산에 '홍범식 공원'이 있다. 본래 이 공원의 이름은 금산공원이었으나, 금산읍이 '홍범식 군수 순절지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그의 순절비, 순절지비 등을 이곳에 옮기고 정자의 이름 또한 그의 호를 딴 '일완정(一阮亭)'으로 고쳐 홍범식 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1940년 건립된 '군수홍공범식순절비(郡守洪公範植殉節碑)', 1993년 건립된'군수홍공범식순절지(郡守洪公範植殉節址)' 등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여러 개의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 2010년 8월 29일, 홍범식 서거 100주년을 맞아 홍범식 공원에서 그의 추모제를 가졌다.

홍범식공원1.jpg


  • 그의 호를 따서 만든 정자 일완정(一阮亭)이다.

일완정.jpg


  • 그를 기리기 위해 1904년 건립된 군수홍공범식순절비(郡守洪公範植殉節碑)이다.

군수홍범식순절비.jpg


  • 홍범식 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금산읍 상옥리 조종산의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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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F구축 내역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범식 홍명희 A는 B와 부자지간이다
홍범식 군수 A는 B로 일했다
군수홍후범식애민선정비 홍범식 A는 B를 기린다
홍후범식휼민선정비 홍범식 A는 B를 기린다
군수홍후범식선정비 홍범식 A는 B를 기린다
홍범식공원 홍범식 A는 B를 기린다
홍범식 독립운동 A는 B에 참여했다

네트워크 그래프

홍범식htm.PNG

참고문헌

이달의 독립운동가 홍범식

정읍 방교리 비석군

홍범식 공원 성지순례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김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