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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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을 말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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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선거의 치밀한 계획과 시행

1958년 12월 2 ·4보안법 파동 이후 자유당정권은 1960년 실시예정인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현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의 당선을 위해 치밀한 부정선거계획을 수립 ·시행 하였다.


  •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최인규의 본격적인 부정선거운동 돌입

1959년 3월 경찰과 지방행정의 총수직인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본격적인 부정선거운동에 돌입하였다. 전국 시·읍·면·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고 매주 1회씩 회합하여 득표공작을 점검토록 하였다. 또한 그는 1959년 5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인천, 대전, 춘천, 대구, 광주,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입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 부정선거와 자유당 비밀

1960년 3월초 민주당이 공개한 「3.15부정선거 지시 비밀지령」에 따르면, 자유당 정권은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일 축출' 등을 통해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이상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자유당정권의 치밀한 부정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85%,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3%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선거 결과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딛혀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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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5 부정선거 반대시위 시작되다.

3.15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1,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마산사건의 책임자 처벌, 경찰의 학원출입 금지 등을 담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을 향해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귀교 도중 청계천 4가에서 유지광이 지휘하는 ‘반공청년단’과 깡패 100여 명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 많은 사상자와 계엄령 선포

마침내 4월 19일 서울시내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여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들이 경무대 앞에까지 진출 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3시 서울을 필두로 오후 5시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 개각을 단행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 4월 25일 오후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랜 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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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를 제출하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이튿날 경무대에서 이화장으로 떠났다.


허정 과도정권 시기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7.29총선을 통해 출범한 제2공화국은 자유당 시절의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조속하고 철저한 청산 요구에 직면하였다.


  • 제2공화국 출범

그러나 1960년 10월 8일 서울지법에서 4.19 발포자, 3.15부정선거 관련자, 정치깡패 등에 대해 징역 3년 이하의 가벼운 형벌이 선고되자, 4.19시위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국회에 난입하여 이를 규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비난 여론을 감안하여 국회는 1960년 11월 개헌을 통해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부정축재자 특별처리법’,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설치법’ 등 4개의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특별법에 따라 자유당 정권 시기 관료로 활동했던 609명의 공민권이 제한되었으며, 특별검찰부는 공소시효 종료시점인 1961년 2월 28일까지 수사를 진행하였다.


  • 특별법과 특별 검찰부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진한 청산작업

그러나 이러한 특별법과 특별검찰부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장면정권의 반민주행위자에 대한 청산작업은 미진하였으며, 5.16 군사정변 직후 부정부패 일소 차원에서 다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었다.


원인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실제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선전활동·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반하여,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이제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던 것이다.

1960년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의 죽음으로 다시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졌었다. 다른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마당에서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적수가 없었으므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張勉)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 이기붕(李起鵬) 사이에 벌어졌다.

선거전에서 야당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인조·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 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봉기에 필요하였던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면 되었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산의 시민들은 최루탄을 눈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마산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그 소년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하여 체포 당했음에 틀림없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전개

시기 내용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 대구지역 고교생 1,700여명은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데모.
3월 15일 3.15 부정선거, 제4대 정·부통령 선거 투표율 97%, 이승만 이기붕 당선

마산의거, 민주당 마산시장이 선거부인 공고 후, 시위대 데모

4월 11일 '김주열군 시체, 마산 중앙부두 200M 앞 바다에서 떠오름

마산 2차의거, 3만여명의 데모대는 자유당과 관계있는 곳을 부수며 시가지 누빔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명 시위 종로 4가에서 폭력배 습격사건 발생
4월 19일 서울 시위 및 경찰발포, 시민 경무대 앞 시위중 경찰은 무차별적 실탄사격 데모는 전국적인 규모, 부산, 광주, 대구, 전주, 청주, 인천에서 데모
4월 20일 전국적으로 시위확산, 대구, 인천, 광주, 수원, 이리 등으로 시위 확산 산발적 데모 계속, 20일부터 24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데모 계속
4월 25일 교수단 300여명 시위(대통령, 국회의장 등 총사퇴 요구)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 하야성명,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사퇴서 제출

관련콘텐츠

영상


사진

RDF 및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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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수영 4.19 혁명 (A)가 (B)에 의해 각성하다
김수영 민주주의 (A)가 (B)를 추구하다
이승만 장기집권 (A)가 (B)를 저지르다
이승만 독재정권 (A)가 (B)를 강화하다
이승만 부정선거 (A)가 (B)를 저지르다
국민 이승만 (A)가 (B)에게 분노하다
학생 부정선거 (A)가 (B)에 분노하다
학생 반대시위 (A)가 (B)를 주도하다
국민 반대시위 (A)가 (B)를 동참하다
국민 민주주의 (A)가 (B)를 추구하다
국민 학생 (A)는 (B)를 포함하다
국민 4.19 혁명 (A)는 (B)를 주도하다
4.19 혁명 이승만 (A)가 (B)를 하야시키다

참고문헌

국가기록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및 기여자

윤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