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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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6.25 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다.

6.25 전쟁의 평화 협정(Peace treaty, 강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현재까지 진행 중인 전쟁이지만 남북 양측의 시민들은 전쟁 진행중이라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 남북의 지도자가 전쟁 상대인 적국 원수(元帥)를 만나고 스포츠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등의 일도 이러한 특수한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6.25 전쟁의 휴전 기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전쟁이다.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국은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발발

시각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경에 38선을 넘었다. 전략적으로 본다면 새벽에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군에서 복무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군 체계는 미국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군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기에 그 많은 인력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국군도 토요일 오전이 되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전원이 외박을 나가 일요일 오후에 들어왔다.

즉,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경에 국군 병사들의 대부분은 각자의 집에서 취침 중이었다.

한편 이 날 브라질에서는 월드컵 개막전이 열렸다. 타이밍도 절묘해서 개막전이 벌어지는 딱 그 시각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북한군 탱크가 38선 철책을 넘어오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 :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

한국에서는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공산 파르티잔 세력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일성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미 트루먼 행정부의 관점은 스탈린이 미국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한 작당이다. 즉, 미국의 입장은 스탈린 주도설이다.

학계에서는 과거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최근들어 두 설을 종합한 복합요인설이 힘을 받아가고 있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로 나누어진다. 외부기원설(전통주의)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한국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인 소련 및 공산권 주도의 전초전이었다는 관점이다. 이에 반해 내부기원설(수정주의)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국제관계나 소련에게 묻지 않고 내부적인 모순이나 또는 기타요인에 의해서 발발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전통주의적 외부기원설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여 공산권 확대전쟁을 위한 전초전이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미 트루먼 행정부의 인식이었고, 이에 따라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한 것이다. 즉, 한국전쟁은 소련이 미국을 테스트 하는 것(to test American)이라 보았다. 최근에서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냥 뭉뚱그려서 공산지도부 주도의 확대전쟁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여기서도 김일성은 스탈린을 지시를 바아 움직이는 말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며, 수많은 위성 공산국가를 설립한 자이다. 그에 반해 김일성은 이제 막 리더가 된 인물이다. 그것도 혼자 힘이 아니라 소련의 힘으로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스탈린을 설득해서 전쟁을 주도적으로 진행한다? 당연히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이제 막 회사에 입사한 직원이 그룹 창업자를 좌지우지 했다는 말이다. 거기에 동구권의 국가들의 행보를 보면 대부분 소련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김일성 주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김일성 주도설은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이는 미국의 발빠른 대응이 내전에 개입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수정주의적 내부기원설은 커밍스가 최초로 주장하고 이후 학자들에 의해서 구체화된 이론이다. 국내의 분쟁이 가속화되어 전쟁이 발발했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계급 분쟁 등의 사회모순이 격화되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어떤 세력이 주도적으로 일으켜서 발발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순이 국제환경과 접합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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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양측 병력배치현황. 기호에 대한 의미는 단대호 항목을 참고.

사단을 표시한 위에 X자 2개가 있는 상자의 크기가 국군이 더 크기 때문에 국군이 병력상 우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상자의 크기와 부대의 규모는 별개다. 상자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사단이 담당하는 구역이 넓다는 것. 북한의 사단을 표현한 상자의 크기가 작으면서 여러 개라는 점을 주목하자. 즉, 북한은 동일 전역에 더 많은 사단을 투입하여 국군보다 수적으로도 우세했다는 소리다. 사실 총 병력의 격차는 2배 정도 수준이지만 후방 사단들은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을 하느라 빠르게 전방으로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배 이상 격차가 벌어지는 곳도 있었다. 즉 방어자의 이점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시, 김일성은 긴급내각회의를 소집해서 이승만이 북침을 했다고 거짓주장을 하며 헌법에 따르면 오직 내각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니 빨리 남측에 대한 역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총사령관 명의로 "지금 전쟁이냐 평화냐는 내각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전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다. 모두 동의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내각이 동의하면서 북한의 정권은 최종적으로 남침을 확정하였다.

불과 한시간 후인 새벽 4시, "폭풍" 이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물론 북한에서는 열심히 '남한이 먼저 쳤다'고 하나, 그런 식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있었다 한들 이전에 빈발했던 국지전 수준의 전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설이 절대 다수이다.

이러한 와중에 군 수뇌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전방 사단의 경우 전력의 대부분이 외박, 아니면 휴가였다. 38선상에서의 연이은 무력충돌과 전쟁 발발설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 당시 군은 직전까지 장기간동안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술한 대규모 출타도 이로 인한 병력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전투력 회복 차원에서 조치되었던 대규모 휴가이지만 아무리 병사들의 피로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대규모로 휴가를 내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기간을 두고 소수의 인원을 순환적으로 휴가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참작하기엔 무리가 있는 셈. 한편 이 건에 대해서는 역으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항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시각도 있다.

본격적 개전 이전부터 연속되던 국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6월 24일의 국지전이 있었느냐, 있었다면 어느 쪽 책임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은 북한이 전쟁 준비를 했다는 분명한 증거다. 현실적으로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대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며 수십 킬로미터를 전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설령 한국전쟁의 개전이 남한의 선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침략의사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1950년 6월 25일. 농번기에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가 가관인데, 김일성 자신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남북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남한을 단 2개월 만에 밀어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38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의 계산에 의해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이 소요되는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므로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영향

인명피해

전쟁 기간 동안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러했듯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1950년의 남은 6개월 동안 발생했다. 지역별 인명피해로는 서울특별시/경기도 지역(특히 북부지역)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엔 강원도 지역, 나머지는 거기서 거기다. 그 이후 전투는 고지쟁탈전 위주라 사망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SBS에서 한국전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확인된 사망자만 600만이라고 방송하기도 했다. 1950년대 당시 남북한 합쳐 한반도의 인구는 2~3천만 명으로, 한반도 인구 중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낮게 잡아도 10~20% 정도. 이는 거의 2차대전 동안 소련, 폴란드, 나치 독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입은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에 준하거나 맞먹는 급이다. 태평양대전에서 원폭이나 도쿄대공습을 맞았다는 일본도 인구대비 2차대전 사망자 비율은 6% 가량 정도인 것으로 보아 너무나도 안타까운 전쟁이다. 과장을 섞자면 간신히 북한군으로부터 막아낸 지역 경상남도(지금의 부산, 울산 포함)나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당시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지, 친척을 잃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거의 독일과 동유럽 국가들이 2차대전 동안 겪은 피해에 가까운 수준이다.

문화적 피해

조선, 고려, 삼국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남아있던 전통적인 풍속, 가치관, 문화, 무예, 민속놀이 등등 수많은 문화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급변해버린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전통 문화재가 파괴, 소실, 행방불명되었으며, 전국 산간 지역의 수많은 사찰들이 미군과 국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파괴된 바 있다. 전쟁상황에 따른 혼란상 + 미미했던 전통 보존 의식이 겹쳐 문화계와 예술계의 생지옥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북한은 전쟁 후반 폭격까지 겹쳐 전통 건축물은 물론, 산골의 전통마을과 암자,절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싸그리 증발해버린다.자기 나라 문화재까지 태워버린 김일성의 선제공격 전통 문화재를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더욱 마음 아픈 전쟁이다. 전국에 있던 비석, 기록, 회화 할 것 없이 소실된 것이 많으니, 한국사 연구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현재까지 그 피해는 채 통계를 낼수가 없다. 너무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피해

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는 리셋되었다고 보면 된다. 안 그래도 미국 정부의 지원에 의존에 예산을 편성하고 경제에 시동을 걸고 있다가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전후 국가경제는 이승만정부가 했지만 국가 경제는 미국의 원조금과 현물 지원을 받아, 그리고 국제지원 물자와 미군부대 불하 물품을 민간에서 유통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원조식량이 풀리면서 농업이 피해를 입었다는 말도 이전 버전에 적혀 있었지만, 당시 농업생산력으로는 전국민이 기아를 면치 못했다. 농촌에서조차 수입 밀가루가 있어도 굶는 판이었다.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해 준 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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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역대 전쟁 중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다.

단 쿠바의 경우 훗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바뀐 뒤 대한민국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월남은 북부가 공산통일하여 적으로 간주했으나, 1990년대 이후 관계를 회복중이다. 에티오피아도 공산 혁명이 일어나 적으로 간주했지만 정권이 무너지고 지금은 관계를 회복중이다.

부산광역시에 있는 UN기념공원에 2,300명의 각국 UN군 전사자가 모셔져 있다.

2012년 5월에 6.25 전쟁 당시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연구

제목 발행년도 링크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2006 바로가기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사례분석을 통한 소모전의 새로운 이해 2007 바로가기
한국전쟁사 (공개강의) 2020.05.19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