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이후 분단문제 및 정치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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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후 분단 문제

분단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일본의 강압통치 아래에 있던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각각 남쪽과 북쪽에 주둔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갈라지게 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무력침공으로 전쟁을 시작해 한반도는 국제적인 이념대립의 끔찍한 전쟁터가 됐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고 나서야 한민족의 비극적인 총성이 멎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이후로 계속되어 왔다.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휴전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이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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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치는 대략의 차이는 있으나 전쟁 이전의 38선을 중심으로 동서에 걸쳐 놓이게 되었으며 동으로는 강원도 고성군에서 부터 서로는 임진강에 이른다. 군사분계선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분단 문제점

문화적 이질성 증가

남북한 간 사고방식, 언어, 가치관, 행동 양식 등의 차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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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역량의 낭비와 손실

막대한 규모의 국방비 지출, 국토의 비효율적 이용, 자원의 분할 사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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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고통 지속

분단으로 인해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고통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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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후 정치적 영향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반미주의(反美主義)가 굳게 자리 잡았으며, 전쟁 중 북한이 패배위기에 직면했을 때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회생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혈맹의식이 두터워진 반면, 소련에 대한 불신은 커져갔고 스탈린 사후 소련의 공산주의 노선에 변화가 생기고 중·소 분쟁이 심화됨에 따라 북한은 친중노선을 강화해 나갔다.

남한

한국사회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서방과 미국 주도의 자유경제체제를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국가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산업생산 시설과 주택, 사회간접자본 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나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경제활동을 유지시켜나갔다. 이로 인해 친미감정이 주민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창의적이조 6.25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