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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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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8년(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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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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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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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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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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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5일 (목) 02:22 판

명정전전.jpg 명정전전2.jpg

지정 등록일

1985년 1월 8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시대

조선 광해군 8년(1616)

문화재 설명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으로, 명정이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 치러지기도 했다. 1484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