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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6일 (목) 06:09 판






개요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0년 10월 당시 중앙중학의 4학년 학생이었던 노국환 외 5명은 민족정기와 독립쟁취에 관한
협의 및 역사·정치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5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지리를 담당하고 있던 최복현을 지도교사로 추대하였다.
5인독서회의 회원이었던 이기을의 회고록에 따르면 독서회라는 것은 3.1운동 이후 각급 학교의 맹휴와 독립투쟁을 실질적으로 지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고 한다.
5인 독서회는 1941년 7월 활동 범위를 확대하여 활동하던 중 황종갑의 서신이 발각되어 그해 8월에 검거되었다.
관련 학생들은 100일 만에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되었고 지도교사였던 최복현은 1943년에 출옥하였다.

5인 독서회

중앙중학교의 독서회 중앙중학(中央中學)은 항일학생운동의 많은 업적을 남긴 교풍을 지닌 학교로 1940년 10월 당시 4학년생인 노국환(盧國煥)·황종갑(黄鍾甲)·이기을(李氣乙)·유영하(柳永夏)·조성훈(趙成勳) 등
5명이 민족정기와 독립쟁취에 관한 협의와 역사·정치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5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지리를 담당하고 있던 최복현(崔福鉉)을 지도교사로 추대하였다.
이들 ‘5인독서회’는 1941년 7월 활동범위를 확대하여 활동하던 중 황종갑의 서신이 발각되어 그해 8월에 검거되었다. 관련 학생들은 100일 만에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되고 최복현은 1943년에 출옥하였다.
[1]


‘중앙고보 5인 독서회’는 당시 중앙고보(현 서울중앙고) 4학년생이었던 노국환이 평소 뜻이 맞는 학우인 이기을(강경화 전 외무장관 시아버지), 황종갑(육군 소장 예편), 유영하, 조성훈과 함께
1940년에 최복현 지리 교사를 지도교사로 모시고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을 몰래 읽으면서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만든 독서 조직이다.

“우리 5인은 시험기를 제외하고는 1주 2회씩 함께 자연, 국사 관계 서적을 읽고 토론을 나누었다. 토론에 의견이 대립되고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다음 날 선생님에게 달려가 문의하기도 했다.
4학년 10월경 어느 날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5인은 (북한산 자락) 우이동 계곡으로 소풍을 나갔다. 우리는 마음껏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가 날마다 이렇게 고담준론만 할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좀 더 의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1주일에 2회씩 모일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민족의 진로)에 관한 문제를 한 문제씩 연구해서 1주 1회씩 모여 토론하는 독서회를 갖자는 것이었다.
모두 찬성이어서 5인조 독서회라 하고, 매주 일요일 모이기로 했다.” (《지산 최복현 선생 회갑기념 논문집》, 민중서관, 1966. 294~299쪽에 실린 노국환의 글)

5인독서회는 1941년 7월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노국환은 그의 부친(송계 노병권)과 큰형 노일환(당시 동아일보 기자)을 통해 김성수ㆍ송진우ㆍ백관수ㆍ정인보 등 인맥을 동원
국제정세와 임시정부 소식을 알아 오는 역할을 맡고, 이기을과 황종갑은 고향이 함흥이니 여름방학 동안 고향으로 가서 항일유격대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고,
유영하와 조성훈은 일본에 유학 중인 선배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역할을 분담했다.
그런데 황종갑이 방학중 활동을 적어 노국환에게 보낸 서신이 함흥경찰서 사전검열에 발각돼 5인 학생과 최복현 교사를 차례로 검거해 함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당시 함흥경찰서는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일경은 자백을 강요하며 가혹한 고문을 했다. 학생들과 교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이기을의 회고에 의하면 몸이 약한 노국환이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가게 되면 그날은 고문하지 않아 모두가 덕을 봤다고 한다.

최 교사는 “내 강의를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나는 어떠한 처형도 감수하겠으니 학생들은 석방해 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 요청이 함흥지역 검사국에서 받아들여져 학생 5명은 함흥형무소에서 100여 일만인 12월 5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최 교사는 1943년 출옥했다.

총독부 학무국은 현상윤 중앙고보 교장에게 이들을 퇴학시키라고 지시했지만 현 교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학생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2]

생가(집터)


전북 순창 상치 운암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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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출처: 성북마을발견[3], 열린순창[4]